스님이나 신부, 수녀처럼
특별한 삶을 살면 모를까,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공통적으로 삶의 세가지 기본
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가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직업의 문제이고,
둘째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결혼의 문제이며,
셋째는 어떤 가치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인생관의 문제이다.
삶을 지탱하는, 행불행을 넘나
들게 하는 본질적이고 어려운
문제다. 우리는 이런 공통적인
문제로 부디끼고 갈등하고 고뇌
하며 살아간다.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버거운 일이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
직업도 결혼도 인생관도 상당
부분 그저 옵션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대개 그렇듯이 나도 직업, 결혼
문제는 적당한 시기에 어떻든
해결했다. 그러나 삶의 가치관,
즉 인생관은 IMF에 이어 예기치
못한 난치성 질병으로 신음하던
십여년간의 암흑기에 어렴풋하게
나마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을 담보하는 경제능력의
상실, 아니 포기는 존재역할(부모,
남편, 자식)을 부정당하는 것이었
고 자존감의 멸실이었다. 그 십여
년의 암흑기에는 원망과 분노와
엄습해 오는 죄책감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우물 속에 갇힌
것처럼 질식할 것 같았고 보이지
않는 신에게 날마다 날마다 착하
게 살겠다고 서원기도를 하며 왔
다갔다 하며 지냈다. 그 와중에 두
번째 건강상 경고등이 켜졌을 때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해야 되겠다
고 생각하고 한 것이 해외 불우
어린이 정기 후원이었다. 아니, 이
렇게 하면 신이 용서하실 거라는
절박함에서 그 아이 보다는 전적
으로 나를 위해서 한 행위였다.
십년 넘게 용돈을 쪼개어 차레로
세 아이를 후원하다가 이상한
이유(핑계)로 중단해버렸다.
후원 중단을 남탓으로 돌리지만
엄밀히 말해 핑계다.
건강이 회복되면서 돈을 쓸 일이
많아져 나날이 이기적인 욕망이
고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데다가 할만큼 했지 않았느냐는
오만이 자기 합리화로 작용했기
때문에 중단했다는 것이 맞다.
이런 일방적인 얘기를 읽으면서
자랑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맞다. 자랑하고 싶다.
이렇게 사람은 괜찮아지고
편해지면 간사하고 오만해져
초심은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희미해지면서 사라진다.
그러나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처음처럼의 소주 맛은 변하지 않
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쉽게 변하
고 간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불안하고 고통스럽던 시기에
나는 신이 내게 건강만 회복시켜
준다면 목숨 외에 무엇이든지
다 바치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런데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
어 큰 불편없이 생활하게 되자 잠
들어 순하던 이기심이 본색을 드
러내기시작하면서 마음은 어느새
예전의 간사함과 오만함의 수준을
회복(?)했다. 가끔 정신을 차리고
내 마음 속 은밀한 곳에 위장하고
있는 괴물들을 바라보며 한숨짓
는다. 내가 그 괴물들을 감당하기
에는 내 겸손과 자비의 자질은
너무도 적게만 느껴진다. 그 괴물
들을 마주하기가 너무 불편하다.
그럼에도 가끔 그 괴물들을 정면
으로 응시하려 애쓴다. 회피하고
도망간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바람과 감사와 인정의 끊임
없는 불협화음이라는 생각을 한
다. 노년이 되면서 신체가 쇠락해
지고 용기와 판단력이 줄어들면서
바람은 크게 줄어드는 것을 느낀
다. 그러나 바람은 내가 감당하기
에는 여전히 너무 많고 높다. 감사
또한 노년에 들어와 과거 보다는
더 많이 더 자주, 그리고 과거에 당
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도, 보잘
것 없는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만족하게 되는 것은
과거에는 시기심과 질투심, 그리
고 배아픈 심리에서 부인하고 깎
아 내리던 것도 인정하는 게 좀 더
쉬워졌다는 점이다. 이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 비해 이런 것
들이 너무 많았거나 너무 부족
해서 좀 나아진 것이 크게 느껴
지는 것일 수도 있다.
내 노년의 삶을 평화롭게 하는
이런 변화가 단순히 늙음의 지혜
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
른 어떤 경험에서 오는 것인지 궁
금할 때가 있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면서 추측해본다.
삶의 마지막 열정을 쏟아야 할 시
기에 어둠 속에서 불안과 절망, 한
탄과 원망, 그리고 불안했던 시기
의 짐승의 울부짖음이 보이지 않
는 그 어떤 존재에 의해 정화되어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 나야?
왜 나냐고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어?
대답해봐!
끝날 줄 모르게 이어지고 이어
지던 그원망과 분노의 울부짖
음이 언젠가부터 고요속으로
침잠했다.
왜 내가 그러면 안돼?
왜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그래야 되는데?
대답해봐!
그 물음이 외부가 아니라
내면으로 향하면서 울부짖음은
좀 건방진 표현이지만 자기
성찰을 이어 겸허해지기 시작
했다. 내가 겪어야 할 고통을
다른 사람이 대신 감당해야 할
이유는 하늘과 땅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 엄혹한 시기에
이 하루. 한 달, 한 해, 오년,
십년을, 이 소중한 세월을 나는
잃어버리는구나 하며 너무도
애통해 했었다. 그러면서 건강
하고 돈을 버는 친구들에게
적개심까지 품게 되고 회피하며
암울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 또한 그들의 복이었다.
나의 불행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고 내 탓이었다는 것을,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동안 겪고 누리는 불행과
행복의 각 총량은 같거나 비슷
하지 않을까 하는 통찰은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지나오는
여정을 거치면서였다.
한 때
나는 그 십년을 잃어버렸다고,
나는 이 생에서 다른 사람보다
십년을 적게 산다고 몹시도
억울해 하고 원통했다.
연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으로서
터무니 없는 생각은 이니다.
그러나 억지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언제부턴가 그 십년의
세월을 허락한 신에게 진실로
감사히게 되었다.
지금도 내 어리석음의 크기는
여전히 크지만 그 세월 동안
많이 줄어들어 바람은 많이
적어지고 감사와 인정의
마음은 훨씬 커졌다.
그러기에 내 노년의 고단한
삶에도 비교적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삶은
참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바람과 감사와
인정의 불협화음이 삶에서
평화와 행복을 얼마나 많이
앗아가는지 알게 되는 것은
노년의 축복이다.
타인에게 신에게 바람이 적고,
사소한 일상에 많이 감사하고,
타인의 뛰어남과 훌륭함, 피와
땀을 온전히 인정할 때 우리는
보다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말 젊은 날의 내 꿈이 이루어
졌다면 어깨 펴고 으스대며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이루어졌다면 그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을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기에 이제는 불운했다며
억울해 할 수가 없다.
꿈이 이루어졌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많은 서람들과 희노애락을
나누며 더 멋진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극히 일부
악연으로 만난 서람까지는 아니
지만 인연 맺어 삶을 함께해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중하고,
그저 그런 내 삶을 사랑한다.
내가 내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내 삶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는 없
지만 선하게 열심히 살려고 애써
왔고 또 고마운 마음 가지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건강이든, 경제적이든 이런
저런 고통 가운데 있다면 그런
상황을 견뎌내기란 결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지금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지금 좋은 것도, 지금 나쁜
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삶은 순식간에 변한다는 것을
알면 겸허해지고, 또 절망에
빠지지 않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았고
운도 좋아 많은 것도 누렸다.
어쩌면 우리는 이 땅에 산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기억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