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력(豫知力)”이 뭘까? 하며 혼자 뇌다 정리에 한계가 있어 나눠봅니다.
“예감(豫感)"이란? 닥쳐올 일의 육적인 느낌을 말하고, "예견(豫見)"은 미리 예측하는 걸 말한다는데, 우연히 이것이 맞아질 때면 신기했어요.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건? 애착한 결과물이겠지만, 사람에게 "사물의 도리를 꿰뚫어 보는 지혜"인 예지(豫知)가 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우연히 맞아지면 묘한 체험으로 느껴지더군요.
어려서 홍수에 집을 잃어 집에 대한 집착 때문에 집 장만을 일찍 했을까?
형편없이 살고 있진 않는 것이? "잘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일까?
물려받은 신앙인으로 살면서, 한 번은 안아야 할 봉사직이 부담이 됐던지? 휑한 모습으로 제대 앞에서 교우님 들게 인사드리는 상상을 했었는데, 그 나이에 그 모습대로 되더군요.
아내가 30대에 "안면마비"를 앓아서였을까? 꿈결에 몇 번이나 내게 마비 증상으로 경각심을 줬는데도 제게도 그 병이 왔었지요.
선친께서 "이명"이 있어 혹시나 했는데 제게도 이명이 생겼고요.
이처럼 ”우려가 현실로 옴이 작은 `예지`여서 일까요? 아니면 `맞으면 집착 탓이고 틀리면 착각`일까요?”
성령 하느님께서 험한 세상 잘살라고 사람이나 짐승들 그리고 하물며 개미 같은 미물에게도 지진이나 환란의 예지를 잠재적으로 부여하셨다는데, 그 오묘함을 모르고 삶이 밝을 땐 잊고 살다가 우려가 현실로 오면 나약해져 이상에 매달리게 돼죠.
"오죽하겠나?" 싶다가도 아는 그들이 목적을 위해 예지력을 악용하고 교회에서 배척하는 짓을 하는 걸 보면 신앙의 눈으론 그것이 죄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나친 `예지 숭상`은, 1653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해 이단으로 선고받은 아우구스티노의 `극단적 경건(얀센니즘)`으로 가며 `과학과 원칙`을 경시하는 위험요소”라고도 하지요.
분명한 것은? “현실에 유혹이 있다. 하더라도 섣불리 `예지력`을 빗대어 욕망을 채우려는 순간 맴돌던 `성령 하느님`은 떠날 것이며 이는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일 것입니다.
“믿고 바라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의 섭리`라 하며, 감사하여 기쁘게 사는 거나 어둡고 우울하게 사는 것은 마음먹기에 있다."라고도 합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받았기에 "요행 심리"를 버리고 말씀대로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일 것으로 사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