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문학지로부터 나에게 “나의 수필쓰기”를 써보라는 주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는 내가 수필을 쓴다거나 수필가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저 글쟁이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잡문 쓰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보낸 적이 있다. 평생 글쟁이로 살아온 것만은 사실이지만 문인으로 수필을 써왔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10여 군데에 고정으로 글을 싣고 있지만 그 글 모두가 일종의 정치평론 또는 칼럼일 뿐 수필은 아니다. 칼럼도 수필의 일종이지 수필이 아니기는 왜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허기야 서양사람들은 칼럼을 political essay라고 부르는 것을 보지만 그것을 정치수필이라고 번역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해서다. 문학으로서의 수필에는 향내가 나야 하는데 칼럼에서는 향내보다는 비릿한 피 냄새가 먼저 난다고 할 것이다. 칼럼은 다분히 시사적(時事的)이면서 비평적이고 수필은 서정적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인 것이기에 이 둘을 똑같은 수필의 반열에 놓고 평가하는 것은 조금은 어울리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나를 칼럼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에세이스트라고는 할 수 없지 않나 싶다. 그림으로 치면 수필은 수채화 같은 존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그림의 출발은 수채화에서 출발하지 않나 싶어 그런 생각을 갖는다. 수채화도 하나 제대로 그리지 못하면서 추상화로 갈수는 없지 않은가 해서다. 이 말은 모든 문학의 기본이 수필이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수필도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시나 소설을 쓴다고 한다면 그것은 수채화도 하나 제대로 그리지 못하면서 추상화 그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잡지에 편집책임을 맡고 있을 때에 나는 어느 시인에게 원고료라는 이름으로 용돈이라도 좀 주고 싶어서 수필을 한편 부탁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온 원고를 보고 나는 깜작 놀랬다. 문장이 안 되어 있어서였다. 시를 수필적 안목으로 문장이 되었느니 안 되었느니로 따지지는 못할 일이지만 수필을 시적 상상력만으로 글을 얽어 매 놓는다면 이건 도저히 읽어 내려 갈 수가 없다. 이는 마치 구상화(具象畵)나 수채화에 자신이 없으니까 처음부터 자기도 모르고 남도 알지 못할 추상화부터 그리려는 화가와 무엇이 다르겠나 싶다. 그런 화가를 가끔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은 모든 문학의 기본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소설이나 시를 잘 쓰는 문인치고 수필 못 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시나 소설을 쓰면서 수필을 잘 쓰지 못한다면 그는 얼치기다. 나의 글쓰기는 어쩌면 평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썼다. 대학시절에도 썼고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병영일기>라는 이름으로 일기를 썼다. 특히 군 생활을 하면서 몇 년 동안 <진중신문>을 만드는 작업을 한 것이 내 글쓰기에 큰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취재하고 기사 쓰고 이를 기름먹인 원지에 긁고 로라로 밀어 인쇄하는 과정을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것이 내 복무생활의 전부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였던 것일까? 제대 후 첫 직장이 잡지사였다. 여기서 편집을 배웠다.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바빴다. 60년대 중반부터 원고 청탁이 들어오는 대로 썼다. 그건 수필이 아니었다. 전부가 논설이었다. 말하자면 잡문이라는 얘기다. 월간 <사상계> <신동아> <지성><아세아>등의 잡지에 주로 썼다. 흥사단에서 발행하는 <기러기>에도 썼다. 남의 이름으로 대필을 한 적도 많다. 영락없는 글쟁이 생활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간지, 월간지 격월간지나 계간지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글을 쓴다. 문학지냐 아니냐도 따지지 않는다. 정치현장을 떠나고 난 뒤 줄곧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 벌써 10여년이 넘었다. 그러기에 누구와 점심약속을 잘하지 않는다. 점심약속이 있는 날은 원고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점심을 하자고 그러면 차라리 저녁을 하자고 한다. 그러면 온종일이 내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술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앞서 있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까 책 볼 시간이 모자란다. 그래서 어떤 때는 새벽에 글을 쓰고 낮에 책을 본다. 칼럼은 수필처럼 색깔이 없다. 그러나 맛은 있어야 한다. 수필이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덧칠한 현란성과 문학적 표현력을 요구하는 철학적 담론이라면 칼럼은 톡 쏘는 생강처럼 매콤하면서도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감칠맛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이 읽으면서 공감하고 또 뭔가 하나라도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수 있는 글이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칼럼을 쓴다. 다시 말하면 독자가 스크랩을 하고 싶을 정도의 글을 쓰고 싶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칼럼이 좋은 칼럼이 아닌가 해서다. 칼럼은 역사적인 기록물로서도 그 존재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칼럼 한편은 그 좁은 공간에 그 시대의 고뇌와 아픔을 고스라니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칼럼을 시대의 증언이라고 말한다. 칼럼을 쓰면서 내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 비판을 하되 모자라게는 할망정 넘치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나의 은사의 가르침이었다. 젊은 시절 세상물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마구잡이로 펜대 흔드는 것을 본 대학원 때의 지도교수였던 김상협 선생(훗날 국무총리역임)이 어느 날 나를 불러 호통을 친다. “자네 요즈음 쓰는 글을 보니까 그렇게 쓰는게 아니네! 한 정권을 비판하는 데에도 긍정과 부정의 비율이 있어야지, 그렇게 100%부정을 해 대면 공정하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오늘 하루 글을 쓰고 그만 두려면 모르지만!” 내가 상사로 뫼시고 있었던 당대의 문필가인 부완혁 선생은 또 나에게 이런 충고를 해 주었다. “글은 단정적으로 쓰는 게 아닙니다. 언제나 여유가 있어야지요. 문제가 되었을 때에 재판정에서 변명할 여지는 남겨 놓아야 하는 겁니다.” 이런 스승의 충고는 내 머릿속에 석고처럼 박혀있는 글쓰기의 원칙이 되어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선배세대의 지혜가 아니었던가!
첫댓글 2018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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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끝 부분에 부완혁 선생이 나오는데 일제강점기 27살 나이에
善山郡守로 저의 초등학교 육학년때로 알고있는데 맞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