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고경희 (시인, 한글문화연대 대표)
오래 전의 일이다
. 집에서 기르던 '잉꼬' 한 쌍이 있었다. 어느 날 놀러왔던 후배 하나가 돌아가려고 현관에 걸터앉아 구두끈을 매다가 신발장 위에 있는 새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 이 새들은 무엇 때문에, 뭘 바라고 살까? 기껏 먹어봐야 좁쌀이고, 물이고, 또 날아봐야 새장 안일 텐데 말이죠. 야 너희 뭣 때문에 무엇을 바라고 사냐?" 장난처럼 무심한 듯 던지는 후배의 말에 새삼 새장을 바라보며 나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 뭘 하려고 살까?" 그런 말을 주고받은 이튿날 아침, '잉꼬' 한 쌍은 거짓말같이 죽어 있었다. 코를 맞대고 새장 바닥에 누워있는 새들을 발견하고, 믿기지 않아 확인하고 또 확인한 뒤에도 나는 한참을 새장 앞에 다가서지도 못하고 쩔쩔맸었다.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물그릇에 물도 있었고, 모이도 남아 있었다. 뭔가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식구들까지 동원해서 간밤에 일어났을 그 치명적일 상황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그렇게 된 까닭을 발견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때도 지금도 그 일은 이해가 안 되고 설명도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오싹하고 소름 끼치는 사건은 정말 사실이고, 생생하게 내가 겪은 일이다.
최근 말에 대한 특집으로 모 방송에서 시험관에 밥을 담아놓고 '사랑한다' '좋아한다' '예쁘다'라는 등 좋은 말을 계속 들려주는 쪽과, '밉다' '시끄럽다' '재수 없다' 등 거칠고 좋지 않은 말을 들려주는 쪽을 나눠서 실험하고, 며칠 뒤 양쪽 밥의 변화를 비교해 보여주었다. 일정 기간 거듭해서 상반되는 말을 들은 밥들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좋은 말을 들려준 밥은 하얗고 깨끗한 곰팡이꽃이 피었고, 나쁜 말을 들려준 쪽은 검게 썩어 있었다. 다소 과장되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결과를 보면서 나는 그 소름이 끼치던 내 경험을 고스란히 떠올렸고, 다시 한 번 보이지는 않지만, 치명적인 그 사람의 '말'의 독을, 무서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솔로몬의 반지' 라는 동화가 있다. 솔로몬은 동물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반지를 얻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짐승들과 벌레, 물고기는 물론 새와 같은 날짐승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솔로몬왕은 동물들의 대화를 엿들어 얻은 수많은 정보로 갖가지 문제들을 해결해서 국민에게서 더욱 지혜롭고 현명한 왕이라는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솔로몬 왕에게는 999명의 아내가 있었다. 어느 날 꾀꼬리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솔로몬 왕은, 아내들 중의 하나가 한 젊은 사내와 바람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는 그 젊은 아내를 유독 아꼈던 터라 질투와 치받치는 화 때문에 도저히 예전처럼 올바르고 공평한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필 수가 없었다. 괴롭고 분한 마음을 다스릴 수도 없어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왕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반지를 연못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솔로몬은 다시 현명한 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 기호인 말은, 조직적인 체계를 갖춰 소리에 실려 나오는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는 그 말을 가지고 서로의 느낌이나 생각을 주고받으며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만들어 살아간다. 삶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나누고, 이해를 저울질하고, 정보를 교환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과 몇 마디 말을 나누어보면 금방 그 사람의 환경과 생각과 됨됨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부려 쓰는 말 속에는 아무리 다른 말로 치장하여도 감출 수 없는, 그 사람의 정보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입말'과 '글말' 과 더불어 또 하나의 말 '전자말'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입말의 시대를 지나, 그 입말과 입말의 시간과 공간적 한계성을 극복하여 더 멀리, 오래 보존하고자 만든 글말이 함께하는 진지하고 정제된 시대를 거쳤다. 그리고 이제 '전자말'이라는 새로운 표현방식을 만들어 말글의 속도와 시간과 양의 무한대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색깔도 무늬도 다른 이 획기적이고 매력적인 문명 도구는 우리가 다스릴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하여 점점 거대해졌고, 그 괴물(?)은 저절로 몸집을 키워, 살아 움직이면서 사람 숲을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사이에 사람들은 마치 힘없는 먹잇감처럼 끙끙대면서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것의 잣대에 어긋나면 연약한 사람의 생각과 뜻은 아주 쉽게 마치 한 장의 낙엽처럼 물기도 생기도 잃어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의 독은 그 위험한 날을 더 파랗게 세워 마구 휘둘러대면서 더욱 무서운 무기가 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너나없이 모두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더 두려운 사실은 우리의 청소년들, 어린아이들이 아무런 대책 없이 방치되어 그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함부로 쏘아대는 말의 화살 밭에서 자라고 있다. 며칠 전 나는 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마치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처럼 혼란을 느꼈다. 그 소녀의 이야기에 나는 위에서 열거한 말에 대한 공포, 두려움은 그다음의 일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정말 얼마나 다급하고 기가 막히는지 한순간 말을 잊고 말았다. 우리 사회가, 우리 아이들의 환경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으며, 앞으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밖에서 하는 우리의 말과 어른들의 번드레한 생각들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책임한 공염불인지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휘젓고 지나갔다.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그 소녀의 이야기를 모아보면 이렇다.
"욕을 못하면 무리에 끼지 못한다.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욕을 하되 좀 더 자극적이고, 센 욕을 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무시하지 못한다. 선생님들도 다 알고 있다. 부모들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모른 체 한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배우고, 또 새로운 욕을 배우면 아이들에게 퍼뜨리며 약간 우쭐해진다. 아마 공부는 다른 학교 아이들과 진도도 다르고 차이가 날 수도 있겠지만, 욕만은 모두가 같은 수준이라고 보면 맞다. 욕은 모두가 통하고 유일한 평준화다. 욕에는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도 없고 모범생과 열등생이 없다" 그나마 놀라서 할 말을 잃은 나를 바라보며 그 소녀가 끝에 위로처럼 한 마디 덧붙였다. "하도 말로는 옮길 수도 없는 욕을 입에 달고 사니까, 어느 날 선생님께서 욕 하나를 풀어서 '이런저런 뜻이고, 그 욕은 너희 부모를 겨냥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라고 말해줬다. 그러니까 지금 그 욕만은 쓰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들도 더러는 있다."라고. 그런 소녀와 나와의 이야기를 그 소녀의 어머니도 함께 듣고 있었다. 교양 있어 보이고, 차분한 그 젊은 엄마는 시종 그 소녀의 말을 거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도 말리지 못한다. 그저 왕따를 당하지 않게, 재수 없다는 말을 듣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해주기 바랄 뿐이다."
우리 단체는 물론, 뜻있는 어른들이 청소년들의 말글 문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다. 초등학생들의 말글 문화가 마치 욕의 전시장처럼 바뀌고 있음에 생각이 미쳤고, 그것을 바로잡을 여러 가지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넌지시 '바른말 고운 말'을 제시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바르고 곱고 아름다운 말을 쓰도록 이끄는 것은 너무나 무기력한 대응임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다. 거센 장마에 홍수가 나 제방이 무너져버린 강물을 바라보며, 올바른 물길을 제시하는 것이랑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 이 사회, 우리가 사는 이 마당에 흘러넘치는 가시 돋친 말과 독 묻은 무기가 되어버린 말글 문화를 바로 잡지 않는 한, 우리는 사람으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덕목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욕심껏 거둬들이고 욱여넣은 용량 이상의 지식과 정보에 짓눌려 신음하다가 사람됨을 잊고 망가져 가는 사람들, 그들의 심성,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 그들을 서로 존중하고, 우주와 통하는 신비와 위대함을 함께 누리는 아름다운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해 줄 방법은 없을까? 이것은 한시도 늦출 수 없는, 우리 모든 어른이 당장 시작해야 할 정말 중요하고 또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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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기 아까워서 옮겨 왔습니다.^^
첫댓글 서로 존중하고, 우주와 통하는 신비와 위대함을 함께 누리는 아름다운 존재와 함께..
그들의 심성까지도 영원히 지켜줬음 하고 함께 소망해 봅니다~ ^^
내용을 읽어보니 심각하군요~ 저는 적어도 버스안에서 욕하는 학생들 야단치거든요!
욕에서 욕으로 끝내는 대화 참 심각합니다. 어른들의 책임도 있다고 봅니다.
그럼요 다 어른들 책임이죠.
나중에 읽는다고 했다가 잊어버렸습니다. 누구나 한번씩 읽어볼 만한 글입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생각입니다. '사람이 부려 쓰는 말 속에는 아무리 다른 말로 치장하여도 감출 수 없는, 그 사람의 정보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는 말이 백 번 맞는 말입니다.
저는 화초를 기르면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참 대단하더군요. 말의 힘!!
사람이나 물건이나 뭔가를 보면 '이쁘다, 이쁘다' 하는 사람이 있어요.
'장사를 하는 사람이니 남에게 좋은 말을 해야한다'는 계산속이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가식적이라는게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 ...습관이 인격을 만든다고....
다소 강한 이미지의 그 사람의 눈이 어느새 늘 웃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