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촌 골목
김준한
네온이 하나둘 켜질 무렵
골목도 하루의 허기를 밝혔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구두 소리가 커질수록
낡은 간판은 밤의 값을 바꿔 걸었다
고국에 남겨 둔 식구들의 허기까지 보태
제 몸을 새벽의 저울 위에 올리는 그녀
손마디 하나는 방세가 되고
핏줄 몇 가닥은 약값이 되고
잠들지 못한 눈꺼풀 아래
검푸른 새벽이 차올랐다
문이 열릴 때마다 마찰음 대신
그녀의 웃음이 닳아 없어지는 소리가 났다
문이 닫힐 때마다 그녀의 시간도
거스름돈 없이 접혔다
나는 구석진 의자에 앉아 식은 물 대신
목구멍에 걸린 울음을 삼켰다
첫차가 골목을 쓸고 지나가자
간판들은 하나둘 눈을 감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덧칠된 화장대신
엷어지지 못한 새벽이 구겨져 있었다
다음 날 하루 종일
내 속에서는 밤의 골목이 삐걱거렸다
몇 번을 비워 내도 소화되지 않는 것은
새벽까지 팔리고도 남아 있던 그 골목이었다
깊은 삶의 색/김준한
새벽 네 시, 염색공단의 굴뚝이 먼저 깨어났다
밤새 끓던 가마는 검은 하늘에 흰 숨을 토해내고
증기는 잠든 골목의 창문을 두드렸다
하얀 천들은 커다란 가마 속으로 들어가
제 고집을 버리는 법부터 배운다
한 번의 물빠짐으로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수증기처럼 끓어오르던 밤들
식어 가던 적막 속에 수없이 담갔다 뺐다
쉽게 지워지지 않던 내 색을 벗겨내고
뻣뻣하게 굳은 고집의 올을 풀어내며
나를 조금씩 비워내고 나서야
네가 살아온 삶의 모양과 네 슬픔의 치수에 맞는
한 벌의 천이 될 수있었다
세월처럼 길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위에서
물기를 말리는 천들
가장 먼저 빛을 잃은 기쁨과 가슴 속 무늬로 새겨진 슬픔
붉은 상처를 지나 얼마나 많은 체념을 견뎌야
지워지지 않는 깊은 삶의 색 하나 얻을 수있을까
점심 종이 울리면 사람들은 잠시 허리를 펴고
주머니 속 마른 한숨을 삼켰다
퇴근 무렵
건조대에 매달린 천들이 젖은 바람을 흔들 때
사람들은 수없이 헹궈도 지워지지 않는 피로를
손금 깊숙이 접어 넣고 돌아갔다
화학 발전소에서 / 김준한
한때 뜨거운 증기가 차오르듯
내 혈관에도 밤을 견뎌야 할 압력이 흘렀다
오래 묵은 기억의 찌꺼기를 태워 없애려
심장은 멈추지 않는 연소로 버텼지만
내 안에는 새벽보다 짙은 그을음이 쌓였다
끊어진 것은 한 사람과의 인연뿐인데
폐쇄되지 않은 배관처럼
체념은 오래도록 내 안을 순환했다
밸브 하나만 어긋나도
가슴 깊이 저장해 둔 슬픔은
폭발보다 먼저 나를 잠식해 갔다
사랑은 맑은 원료로 들어왔으나
수많은 열과 압력을 지나며
끝내 서로 다른 성분이 되어 섞이지 못했다
웃음은 연소 뒤 남은 작은 불씨
버렸다고 믿었던 눈물은
배관 끝에서 천천히 식어
창문에 오래된 얼룩으로 남았다
저 굴뚝 하나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이 내 안에서 재가 되었던가
나는 아직도 꺼지지 않는 보일러 하나 품고
남은 생의 온도를 지킨다
삼각주에서/김준한
마지막이 가까워져서야
낙동강은 가파른 속도를 내려놓는다
산맥의 뼈를 깎아 흙을 만들듯
가슴에 박힌 상처를 깎고
바위처럼 굳은 하루의 무게를 밀며
굽이를 늘려 온 물결
삼각주에는 세월에 떠밀린 것이 아니라
제 몸을 덜어낸 시간들이 누워 있다
새벽마다 도시의 뼈대를 세우는 망치 소리가
강안개를 깨워 제자리로 돌려보내면
물살에 튀는 은빛 비늘처럼
망치 끝에 일렁이던 불꽃
저녁이면 치열했던 하루가 닳은 작업화 한 켤레
강가의 자갈처럼 젖어들었다
좁은 물목처럼
삶을 죄어 오던 이별을 건널 때마다
기억 한 켜씩 물살에 쓸려 깊어졌다
가난은 내 삶을 자꾸만 덜어냈지만
깎여 나온 날들은 펄이 되어 하구를 넓혔다
스스로 하나의 대륙이 된 삼각주
나는 이제
잃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시간 위에 서 있다
물의 자궁
김준한
갑판 위로 올라오는 통발이 만삭이다
산통을 앓는 수평선이 붉게 젖고
양수가 터진 바다가 벌어지자
와르르 쏟아지는 생명들
생과 사를 가려내는 손끝은 분주하고
죽음을 오해받을세라
지느러미들은 더욱 힘껏 파닥인다
아들인가, 또 딸인가
상자마다 나뉘는 운명
아비의 눈길도 함께 갈라진다
크기도 생김도 다른 새끼들
열한 딸을 물 밖으로 떠나보낸 가슴은
어느새 수갈래 물길처럼 갈라졌다
자식들을 뭍으로 출가시키고
더 깊고 더 망망해진 바다
조급한 아비는
지친 물의 자궁 깊숙이
다시 노를 밀어 넣었다
낮고 긴 신음을 끌어 올리는 바다
열두 번째 밀물 끝에
드디어 막내아들을 품에 안던 밤
유난히 솟구친 별빛을
차마 바라보지 못한 달은
짙은 구름 속으로 몸을 숨겼다
깊어진 숨 삼키며
어둠 속 뒤척이던 물의 몸
새벽은 또 하나
파문의 탯줄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