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누수에 대하여
장금식
수도요금 폭탄을 맞았다. 이유인즉 누수일 거라고 한다. 땅 밑 보이지 않는 물길 찾기가 힘들고 물 새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 난관에 부딪혔다. 바닥에 귀를 수없이 바짝 붙여도 속수무책이다. 야금야금 젖어드는 땅 밑 세계를 읽어낼 방도가 없다. 겨우내 대형참사를 불러온 주범은 마모된 배관이다.
동네를 수소문해 누수 탐지 전문가를 찾았다. 탐지기를 들고 전문가 한 분이 오셨다. 실내에선 새는 곳이 없고 마당이 문제라며 한나절 이상 탐지기를 이리저리 이동하고 있다. 물을 사용하지 않는데도 계량기가 바쁘게 돌아가고 계속 비용이 줄줄 새니 초조한 감정이 나를 소모전으로 몰기 시작한다.
그때 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마음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데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응답했다.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보일러실로 들어가 가만히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오랫동안 다른 여자를 만나 온 남편, 부부 사이의 누수된 사랑을 담담히, 그리고 흐느적거리며 말하지 않는가.
들키지 않으려 낌새를 염탐하듯 하루도 빠짐없이 집에 들어오는 남편을 누가 의심하랴. 겉으론 부인을 사랑하는 척, 속내를 보이지 않고 껍데기 사랑만 남겼다. 그런 남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원망과 분노를 넘어 체념의 목소리가 전화선에서 갈라진다. 오랫동안 줄줄 새어나간 사랑에 대해 듣고 있으니 참담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또 무슨 메가톤급 소식인가. 돌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믿었는데, 그렇게 좋다고 난리를 부리며 따라다닐 땐 언제고, 울타리 없어도 될 만큼 든든한 파수꾼이라더니 스스로 담을 넘을 줄이야,’ 어이없다. 망해가는 집안을 일으키려 갖은 애를 쓰다가 가족에게 지쳤는지 그 남자의 애정 공세에 못 이긴 척 따라나서더니 희생의 대가가 이리 처참한가 싶다.
이 순간에도 배관은 틈을 벌리고 물, 사랑이 계속 새고 있는데, 아저씨는 아직 누수 배관을 못 찾고 있다. 답답할수록 젖어가는 물 자국의 모양과 크기를 상상 속에서 점점 키운다. 젖은 흔적, 젖은 사랑, ‘젖은’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기웃거린다. ‘젖은 사랑’이 무겁기만 한 지인의 심정을 어찌 헤아려준단 말인가. 땅 밑 어디선가 물 새는 소리가 상상 속 지인의 울음처럼 환청으로 들린다. 눈물이 남긴, 충혈되고 퀭한 그녀의 눈도 아른거린다.
겨울과 봄 사이, 배관이 물 자국과 눈물 꽃을 남겼다. 눈물 꽃을 피우게 내버려 둔 장본인은 방치자 남편이다. 착한 남편으로 가장假裝한 그 가장家長은 무슨 배짱으로 옮겨간 사랑에만 불태우고 있는 걸까. 배관이 낡고, 녹슬고 마모되다 틈새를 생성하고, 마침내 누수가 발생하기까지 한참 걸리는데, 둘이었다가 셋이 되는 동안 이토록 오래 가면을 썼단 말인가. 불륜 탐색 전문가를 부르라고 할까. 아니, 이미 들켰으니 이혼 전문 변호사를 불러야 하나.
집 나간 약속, 한 사람에게서 벗어난 온기, 늦게라도 돌아올 것 같은 미련, 잠시 다른 계절에 머물 거라는 추측은 그녀를 더 아프게 할까. 내게 날아온 수도 요금 폭탄 청구서만큼이나 예상하지 못한 감정 손실비용을 받아 들은 게다. 봄바람에 날아온 누수의 안부가 얼마나 매서웠을까. 지인의 심정은 하염없이 밑바닥으로 침몰해가는데 남편은 반칙 사랑으로 끝없이 부유浮游하며 비밀정원에서 무한정 즐길까.
표시 나지 않게 마모되어 가는 일, 겹겹이 쌓인 원성, 불안의 부피를 키운다. 불안의 층위를 벗겨내려 여기저기 소문을 물어 날아야 하나. 마당 이쪽 끝에서 조금씩 잰걸음하며 탐지기를 갖다 대는 아저씨에게 말한다. “제발 숨은 범인을 빨리 찾아주세요.”
그 순간, 주차장 쪽 땅을 파내던 아저씨가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찾았다”라고. ‘심봤다’로 들렸다. 달려갔다. 배관의 녹슨 자국이 저항하는 몸부림처럼 벌겋게 입을 벌리고 있다. 상처를 알리려면 예고라도 하든지, 아저씨가 손을 대자 부스럼 같은 금속 조각이 두둑 떨어진다. 수도사업소에 전화를 걸었다. 찾았노라고. 공사 현장을 사진 찍어 보내주면 정상참작해 새로 요금 정산을 하겠다는 것이다.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쓸어간 듯 마당은 맥이 빠져 고요하다. 그녀의 마음 마당도 소강상태로 접어들면 좋겠다. 그녀는 아직도 술렁거리며 집 밖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이슬비가 보슬비로, 가랑비, 단비, 장대비, 폭우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든 다 시련을 동반하는 것이고 쏟아지는, 젖는 습성을 지녔다. 새어나간 사랑을 멀리 두고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맞고 있을 그녀다. 이미 건너간 마음, 누수를 확인했으니 이별 화법으로 ‘안녕’이라 말하라 하고 싶다. 누적된 누수가 혹독하게 지내온 겨울 추위를 또다시 끄집어내지 않길 바라면서.
배관 공사를 마치고 흙으로 땅을 덮는다. 자근자근 발로 밟아 땅을 다진다. 내 배관 공사는 완료했으나 사랑의 대형참사, 그 누수는 수습할 사람이 없어 보인다. 불륜 탐색 전문가도 이혼 전문 변호사도 뿌리가 흔들린 사랑을 불후의 사랑으로 돌려놓기엔 불가항력일 것 같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속 말만 할 뿐이다. ‘사랑의 누수는 배관 문제가 아닌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