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서울, 만남, 노스탤지어(향수), 사명, 귀임
부산총회를 마치고 머물다 온 서울은 천고마비 만추의 단풍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같은 하늘인데도 나고 자란 고향, 서울서 바라보는 하늘은 높고 짙푸르고 더 맑았습니다.
지인의 배려로 반나절 시간을 내 찾았던 경복궁 향원정의 모습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 것 같습니다.
여러 동역자들과 성도들의 진심어린 환대와 만남은 이국에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새 힘을 충전케 해 주었습니다.
특별히 분주해하는 저를 위해 일부러 반나절의 시간을 내어 만남을 베풀어주신 정승희감독님의 배려는 완전 감동이었습니다.
일일이 성함을 다 거명하지는 못하지만 식사초대가 있을 때마다 하나라도 더 권하는 분들의 친절과 성의를 대하며 ‘우리 나라’에 왔다는 실감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마침 덕수궁에서 열린 한국근현대회화 100선 특별전(Masterpieces of Modern Korean Painting)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이응노, 김기창 등 대가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대하는 쉽지 않은 호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국화단의 엄선된 작품들 중에서 유독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조병덕의 저녁준비, 김인승의 홍선, 장우성의 성모자상 이었습니다.
서양미술사적으로 분류하면 앞의 두 작품은 이른바 세속화 (profane Kunst)의 범주에 그리고 한복을 입은 여인이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자상은 성화(Ars sacra)의 범주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에 와 닿은 부분은 세속의 영역이든 거룩의 영역이든 작품 모두에 등장하는 흰색 한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 이었습니다.
특히 이태리 르네상스기 동방교회의 이콘 전통을 계승한 치마부에(Cimabue)의 옥좌의 성모(Maesta, 1280) 이후 서양미술에서 성모자상을 표현할 때 강조되었던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왼팔에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아기예수는 성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표현)의 틀을 깨고 오른 손에 안기신 아기예수님이 엄마 품에 고개를 누이신 모습을 묘사한 장우성의 ‘성모자상’(1954)은 참으로 인간적이고 토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민지시대인 1930년대 이래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한국적 미의 추구를 통해 민족혼을 이어가려 했던 조병덕의 ‘저녁준비’(1942), 해방 후 그보다는 세련된 모습으로 묘사된 김인승의 ‘홍선’(1954) 두 작품이 전시된 벽면에 적혀 있는 글귀가 참 감동적 이었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 미술가들의 노고와 열정을 망각하고 있지만 근현대시기 한국미술가들이 성취한 결과는 매우 크다. 20세기 초부터 미술가들은 망국의 설움, 서구근대체제의 도입,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등으로 이어진 전쟁, 독립의 과정, 분단의 상흔 같은 복잡다단한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극복하여 나갔다. 더욱이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미술에 대한 무지와 미술가들에 대한 무시, 경제적인 어려움 역시 미술가들이 맞닥뜨린 또 다른 시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미술활동을 펼쳐나갔으며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예술가로서 자긍심을 지니고 노력하였다”
어느 큐레이터가 썼는지 참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노스탤지어(Nostalgia, 향수)가 밀려들었습니다.
밤 조명을 받고 있는 만추의 단풍들이 시리도록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덕수궁 대한문을 나서는 데 문 앞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차가운 바닥에 앉아 시국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머물자고 한 제자들에게 엄정한 산 아래 삶의 현실, 사명을 향해 내려가자고 하셨던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비행기를 타고 지구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11시간을 날아 왔습니다.
방문을 마치고 이 곳 임지에 올 때 마다 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미쳐 다 못 이루고 못 만난 사람이 있더라도 예정된 시간이 되면 그대로 남겨두고 와야만 합니다.
아쉬움과 미안함이 있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늘 깨닫습니다.
‘이 세상 살다가 떠날 때도 이런 것이겠지’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 13:14)
(Wir haben hier keine bleibende Stadt, sondern die zukunftige, Jahreslosung, 독일개신교회 2013년 연간 주제성구)
— 서울특별시 (사진 42장)
사진: 42-1 경복궁 향원정
사진: 42-2 경복궁 민속박물관 계단, 청명한 가을 하늘
사진: 42-3 경복궁 가을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