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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玄永燮, 창씨명 天野道夫, 1907∼?
◆ 1937년 녹기연맹의 일본문화연구소 근무.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주사. 1940년 황도학회 이사.
일본인도 혀를 내두른 극렬 친일파
나는 몽상한다. 반도의 청년이 대다수 군국을 위해 기쁘게 죽는 날을! 완전하게 일본화한 조선인 중에서 재상이 나오는 그 찬란한 날을! 백년 후인가 몇 백년 후인가. 내선일체를 심화, 철저하게 하여 완성시키자! 내선일체를 영구적 진리로 만들자! 내선인에 대한 당위로 만들자! 신생 조선은 내선일체의 제1단계에서 제2단계로 비약하는 바로 그 시기에 정확하게 놓여 있다.(현영섭, {신생 조선의 출발}, 183면)
해방 후에 발간된 {민족정기의 심판}에서는 현영섭을 과거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자로 반기를 들어 일제에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를 한 후 갖은 악질행동을 다하여 조선 민족을 여지없이 사지로 몰아넣던 일본의 충량한 개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일신의 안녕을 위해 일본에 협력한 자라고만 부르는 것은 오히려 그의 행동과 이상(?)에 걸맞지 않은 수준 낮은 규정일지도 모른다.
현영섭의 친일 내선일체론은 그 누구보다도 더 급진적 · 전투적이며 매우 철저했다. 즉,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으며, 완전히 일본화한 조선인 중에서 재상이 나오는 그 찬란한 날을 바라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바탕에서 극렬 친일로 줄달음친 현영섭은 일본에 혼을 판 진짜배기 매국노로 조선인에게서만 욕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경성제대의 일본인 교수들조차 그를 미운 오리새끼 취급하면서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를 단순히 친일 언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족하다. 위대한 일본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조선인의 행동 · 사고 · 생활양식 등 모든 것을 철저하게 부정하여 역사에서 조선이라는 이름조차 완전히 말살하고자 했던 인물, 따라서 자신뿐만 아니라 조선 민족 전체를 일본 민족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던 인물, 그가 바로 현영섭이었다.
한편 현영섭의 아버지인 현헌(玄櫶) 또한 교육자로서는 알아주는 친일파였다. 그는 병합후 경성고등보통학교 및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교유(敎諭)를 하다가 1921년에 학무국 시학관(視學官:교육감)이 되었다. 학무국 편수관을 겸직하면서 식민지 교육행정의 중추부에서 일하던 현헌은 1931년에 강원도 참여관이 되고, 1934년부터는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또한 그는 황도주의를 기초로 한 사회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동민회(同民會)의 이사도 함께 맡고 있었다. 이처럼 일제의 식민정책에 충성을 다하던 현헌은 1937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자 아들 현영섭과 더불어 시국강연을 하고 다니다 1939년 1월 27일 사망하였다. 이제 그 과업을 현영섭이 물려받은 것이다. 그것도 더욱 철저하고 극렬하게.
사회주의 · 무정부주의에서 황도주의로
대를 이어 일본의 충량한 신민으로 살았던 현영섭은 처음부터 친일의 길에 들어서지는 않았다. 1920년대 당시 식민지 조선의 일반 지식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이미 그는 마르크스, 레닌, 크로포토킨 등에 빠져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세가 되던 해인 1925년 봄, 교토로 건너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지도되던 조선인 노동조합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히라노 나카오(平野永男)라 자칭하였다. 그런데 활동한 지 겨우 2개월 만에 노동운동에 환멸을 느끼고 탈퇴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그는 이듬해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불어, 독어, 에스페란토어도 배웠는데, 이때 그는 문예평론가가 되기를 꿈꾸며 최재서*와 사귀기도 하였다.
1931년에 대학을 졸업한 현영섭은 전부터 알고 있었던 무정부주의자 원심창(元心昌)을 따라 상해로 건너가, 활발한 테러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진 남화(南華)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사회주의자로서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외국문헌의 번역, 연맹원의 교육, 기관지 사설의 집필, 내외의 운동상황의 소개 및 연락을 맡았다. 그해 11월 현영섭은 원심창의 명령으로 일본에 잠입, 역도상애회 및 일체의 조선인 반동단체 박멸에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고 자임하는 조선동흥노동동맹회에 가입해 일본인 다케우치 데루요(竹內てる代)와 함께 활동하였다. 무정부주의자로서의 활동은 1934년 가을에 발행된 조선어신문 {흑색신문}에 뮤젬의 노동자의 노래를 번역 소개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전향에 대해 한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첫번째 문제로 현영섭은 무정부주의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동경부의 학무부 사회과에 임시고(臨時雇)로 근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생계를 위한 임시방편이었는지, 무정부주의운동을 위한 전술적 고려였는지, 아니면 사상에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것이 그에게 전향의 계기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전향도 다음의 회고에서 잘 나타나듯이 외적인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절망감과 사상의 동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나는 몽상가의 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공업농촌이 만들어지고 정신 · 육체노동자라는 새로운 인간이 만들어져,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소비하는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이러한 꿈에 빠져 현실의 세계를 잊었기 때문에 나는 환멸의 비애를 느껴 좌절한 것이다.(나의 꿈, {녹기}, 1938. 8, 48면)
이러한 절망감으로 인해 그는 임시고로 근무하면서 사회사업의 발달만이 사회주의운동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나아가 쿠도 나카오(工藤永男)라 자칭하면서 마치 일본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다녔다. 그리고 1935년에는 친일적인 조선인에 의해 비공식으로 조직되고 있던 조선문제연구회(주로 관리들로 구성됨)와 교제하였다. 이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전환, 즉 친일로의 사상적 변절을 알리는 신호였다.
다음은 두번째 의문인데, 그해 11월 현영섭은 무정부주의자와 교제하였던 과거의 경력 때문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여름경에 무정부주의자로서 했던 활동에 걸맞지 않게 그는 무죄로 출옥하였다. 그 이유 역시 분명치 않으나 체포되기 이전에 이미 전향하였다는 점과 그의 아버지인 현헌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충실한 친일파였다는 점이 고려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렇게 해서 현영섭은 무정부주의자에서 적극적인 일본주의자로 변신하게 되는데, 그 행각이 참으로 가관이다. 계속해서 그의 화려한 친일행각에 대해서 보도록 하자.
조선어 전폐론 부르짖어
무죄로 출옥한 현영섭은 매달 여러 지면을 통해 조선의 관습에 대한 비판과 친일적인 내용을 담은 수필과 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그중 8월에 쓴 [정치론의 한 도막----조선어를 어떻게 할까](발표지 미상. {신생 조선의 출발}에 수록됨)에서 처음으로 저 유명한 조선어 전폐론을 들고 나온다. 즉, 조선어를 폐지하라. 국어(일어----인용자)로 사물을 생각하도록 노력하라. 그래서 먼저 내선의 생활양식을 하나로 만들자라고 주장하면서 내선일체의 기본 전제로 조선어를 폐지하라고 부르짖었다.
이러한 언론활동은 자연히 일본인으로만 구성된 녹기연맹(綠旗聯盟)의 간부의 눈에 들어오게 되어, 1937년 봄 현영섭은 녹기연맹의 일본문화연구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6월에 녹기연맹의 기관지 {녹기}에 [세계의 귀일(歸一)과 언어의 통제]를 발표하였는데,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녹기}에 글을 쓴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었다. 내용은 일본정신에 의한 세계의 통일을 기대하며, 거기에 협력할 것을 밝히고 언어, 인종에 있어 동일 계통에 속하는 조선인이 국어(일어----인용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며 인식부족이며 불령(不逞)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펼치는데, 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정동연맹)이 결성된 이튿날 미나미(南次郞) 총독을 면회한 현영섭이 조선어 전폐론을 주장하자 미나미는 조선어를 배척함은 불가하다. 가급적으로 일어를 보급함은 가하나 지금 조선의 일반 인심을 살펴보면 일어보급운동도 조선어 폐지운동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어전폐운동은 절대 불가능한 일"({민족정기의 심판}, 183[184면)라고 거부하였다. 그러나 현영섭의 주장이 그 자리에서는 거절당하고 비웃음만 샀지만, 1943년에 국어보급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학교나 관청에서 조선어를 일체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의 탁견(?)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937년 파시스트 체제를 더욱 강화한 일본 제국주의는 마침내 중국을 침략함으로써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 민중들까지 죽음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영섭에게는 이 전쟁이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은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전쟁이 일어난 7월 조선총독부는 시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전국적인 순회강연반을 조직하였다. 현영섭은 녹기연맹의 이사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8월에는 황해도, 9월에는 충청남도 등지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강연 행각을 벌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8년 7월 7일에 조선내 친일단체 및 개인을 총망라하여 전국적 기구로 만든 정동연맹이 결성되자 현영섭은 주사(主事)를 맡았다. 활동의 주무대가 녹기연맹에서 정동연맹으로 옮겨진 것이다(1939년 6월에는 기관지 {총동원}이 창간되자 그 편집도 맡았다). 또한 12월 14일 부민관 강당에서 내선일체 구현과 동아협동체 건설 및 국내 혁신 문제 등을 토론하는 시국유지원탁회의에도 참석함으로써 중심적인 친일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이처럼 각종 강연이나 단체활동 등을 하는 동시에 그는 언론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녹기}, {문교의 조선}, {조선 및 만주} 등에 붓을 들어, 중국은 정신의 평형을 상실한 소아병적적인 나라이며 중국의 정치가들은 모두 자기의 이익과 권력유지에 급급한 무리들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반해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인만큼 치열한 인류애를 가진 자는 없다, 일본은 북지(北支) 농민을 구원하기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옹호하여 일본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한편, 조선인의 장래는 모두 일본의 장래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에 조선인적 심정을 완전히 죽이고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녹기연맹도 가맹하고 있던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현영섭의 북지사변과 조선({신생 조선의 출발}에 수록됨)이라는 20면짜리 팜플렛을 수만부 발행하여 1937년 7월부터 전국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 현영섭이 일제의 중국침략을 어떻게 왜곡하고 찬양하였는가는 다음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북지사변은 일만일체(日滿一體)의 필연적 과정이며, 내선일여(內鮮一如) · 선만일여(鮮滿一如)의 원리 아래 반도에서 살고 있는 내선인 모두가 필연적으로 통과해야만 하는 길이다. 삼복의 더위에도 북지 평원에서 동양평화와 인류애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우리 황군에게 감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더욱 긴장된 생활을 할 것은 물론, 우리 내선동포의 조국 일본 및 선린 만주국의 무한한 발전을 돕기 위해 용감하게 매진하고 아름다운 내선상애(內鮮相愛)의 애국심을 고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동양평화는 확립되고 아시아의 빛은 세계를 뒤덮으리라.({신생 조선의 출발}, 37면)
조선의 민족주의자는 인류의 평화를 교란하는 페스트이다.
중일전쟁이라는 때를 만나 조선의 논단에 화려하게 등장한 현영섭은 1938년과 1939년에 잇달아 대단한 히트작을 만들어 낸다. 1938년 1월에 간행한 {조선인이 나아가야 할 길}(이하 {길}로 줄임)과 1939년 2월에 낸 {신생 조선의 출발}(이하 {출발}로 줄임)이 그것이다. 두 책 모두 현영섭이 여러 잡지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 낸 것으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내선일체의 3대 논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길}은 출판한 지 7개월 만에 11판을 냈으며, 그해 연말까지 1만 부가 팔려 조선 출판계의 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이 두 책을 통해 현영섭이 주장하는 논리는 크게 일본예찬론, 내선일체론의 당위와 방법론 그리고 조선 지식인에 대한 비난과 요구로 나뉜다.
먼저 그의 일본예찬론부터 보자. 그는 이상을 가진 국가는 일본뿐이라는 전제 아래 일본주의는 이른바 제국주의나 자본주의도 아니며, 히틀러 · 무솔리니류의 파시즘도 아니라는 것을 조선인들은 기억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병합에 의해 지난날의 누습(陋習)을 모두 혁파하여 생명이 가득 찬 신조선에서 살도록 변했던 것처럼 일본의 중국 침략도 영토를 뺏으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사해동포주의, 즉 세계에 절대평화를 가져다 주는 일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억지를 부린다. 거기에 덧붙여 이런 위대한 대성업에 조선인들이 참가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내선일체는 사회법칙의 발전 코스에 순응한 현상이며, 세계의 어떤 사람도 반대할 수 없는 도덕적 현상이라 하여 내선일체의 필연성을 주장한다.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길}도 이 객관적 정세와 내 개인의 사색에서 조선의 철저한 일본화 운동을 촉진하는 의미에서 쓴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선일체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을까? 그 첫번째 방법이 앞에서도 말한 조선어 폐지이다. 언어는 사상이며, 사상은 생활에 선구하기 때문에 조선어를 폐지하여 감정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일본어가 조선인들의 언어로 되어 결국에는 일본 정신을 체득하고 행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 하나의 방법으로 의식주를 비롯하여 가족제도, 이름, 결혼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모든 생활양식을 일본과 같게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 속에는 사실 무서운 논리가 숨겨져 있다. 즉, 그는 만약 먹는 것에서까지 조선인이 독특한 생활감정을 고수한다면 배타적 정치적 감정으로까지 발전할 것이라고 단언하며 우리 자손이 불행한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그 불행을 나는 거의 병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먹는 것까지 급진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출발}, 13면)이라 하여 조선의 민족적 감정조차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것이었다. 일본 침략자들도 조선인의 민족적 감정마저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광적인 일본주의자 현영섭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불만이었기에 자칭 선구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자신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대중들이 있다는 환상까지 품게 된 것이다.
나는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하나로 될 것을 역설한다. 지금 나와 같은 태도에 대해 대중의 찬반을 구한다면, 나에 대한 투표수가 적으리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그러나 완전하게 일본인이 되고 싶다고 본능적으로 절규하고 있는 대중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 대중을 격려하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자신의 책임으로 된 지금, 나는 조선의 미래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다.({출발}, 10면)
그런데 이러한 현영섭의 선구자적인 길에는 방해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조선의 민족주의자와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제 현영섭의 광기어린 붓끝은 이들 지식계급으로 향한다. 그는 먼저 민족주의운동에 대해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려는 것을 막는 것이며, 그것은 고기가 바다를 떠나려는 것과 같은 운동으로, 몰락하는 것이 당연한 운명({길}, 69면)이라 못박고 민족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는----만약 존재한다고 한다면----인류의 평화를 교란하는 페스트이다. 새 국가를 만들어서 지나(支那) 국민정부처럼 악정을 시행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인류의 발전법칙에 배치되는 일이다. 인류를 분열 투쟁으로 몰고가는 일한(日韓) 민족주의자에게 사멸이 었어라 소리치는 바이다.({출발}, 88면)
공격의 화살은 이들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향한 지식계급 전체에게도 돌아간다. 전향한 사람들 대다수가 일본주의라는 새로운 이상을 발견하고 전향했다기보다는 가족적 이기주의 때문에 전향했다고 진단한 그는 일본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려는 조선 인테리의 장래는 지옥이다. 그 앞길은 함정뿐이다. 조선인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에서 생활하는 나는 때때로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한 만큼 고통을 느낀다. 그 대부분의 원인은 제군의 중도반단적인 불철저한 태도 때문({출발}, 15면)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따라서 그는 구원의 언어이며 신성한 의의가 부여된 종교적인 말이기도 한 내선일체를 완수하기 위해 조선의 지식계급에게 지난날의 무기력과 회색에서 벗어나 일본주의라는 깃발 아래 분기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다.
친일단체 강연회의 단골 연사로 맹활약
이처럼 일급 친일파가 된 현영섭은 이후에도 계속 매월 여러 잡지에 시국에 관한 글을 발표하고 주요 친일단체의 강연회가 있을 때마다 단골 연사로 뛰어 다녔다. 아마도 이때가 현영섭의 인생에 있어 최전성기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그는 내선일체를 완수하기 위해 맹활약을 하였다.
1940년 1월에는 잡지 {내선일체}를 발행하는 내선일체실천사(사장 박남규)의 이사와 12월에 설립된 황도학회의 이사도 맡았다. 그리고 그해 2월 창씨개명이 실시되자 그는 즉시 아마노 미치오(天野道夫)라고 이름을 고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일본인이 되었다.
그런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1년의 {녹기} 4월호에 발표한 민족의 영광에 부쳐라는 글은 우리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한다. 즉, 그는 조선 민족의 발전적 해소야말로 일본 국가의 급무 중의 급무에 속한다라고 전제한 뒤, 만약 일미전에서 조선 민족 가운데 조금이라도 동요하는 자가 있다면 용서없이 그들에게 기관총을 향하라고까지 하여 그의 광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현영섭은 베이징에 있었다. 베이징의 일본대사관 내에 설치된 화북(華北)반도인협회의 주사(主事)로 있으면서 그는 베이징, 지난(濟南) 등 화북의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서 협려회(協勵會)라는 친일 어용단체를 조직하는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1943년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그는 {매일신보} 8월 2일자에 문화인의 감격----역사 창조의 날을 기고하여 그것을 축하하였다. 또한 그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출진학도격려대회에서 강연하였다.
그의 친일행각은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기 직전까지 진행되는데, 1945년 7월 조선언론보국회 주최의 순회강연에 강사 2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현영섭의 그 화려했던 활동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막을 내린다. 그 해 8월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그는 일본으로 탈출하여 그의 조국 일본에서 살았다. 재일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했으며, 퇴직한 후에는 사이다마(埼玉)현 오미야(大宮)시에서 영어학원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현영섭은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고 부정했던 모태, 조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았는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글을 맺기 전에 한 가지만 덧붙이자. 일반적으로 민족운동이나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전향한 이후 보인 행동은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마지못해 끌려 다니거나 또는 자포자기하여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던져 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영섭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일본화라는 깃발을 내걸고 최선봉에 서서 내선일체를 외쳤으며, 그 주장 또한 조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극단적인 변화를 보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한때나마 품고 행동에 옮겼던 무정부주의사상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무정부주의라 하면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아니 폐기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는 세계를 극단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기존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기에 결국에는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수단에 의존한다. 이러한 논리가 친일로 전향한 현영섭에게는 조선 민족을 부정하는 논리로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민족에 대한 절망감에서 비롯된 민족허무주의가 무정부주의와 뒤섞여 있다가 결국에는 민족에 대한 완전한 부정으로까지 전개된 것이다. 조선어 전폐론이나 생활양식과 의식의 완전한 일본화, 그리고 민족주의자나 전향자에 대한 신랄한 공격 등은 모두 이와 같은 극단적인 논리 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처럼 그의 사상은 극에서 극으로 옮아가지만 그것은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그가 젊은날 가졌던 사상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성급한 실망감, 변혁에 대한 조급성, 그리고 민족에 대한 애정의 부재는 사상의 공허함만을 낳고, 그 공허함은 마침내 자신의 뿌리마저 파괴하는 논리로 치달았던 것이다. 속담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듯이 현영섭은 그 어설픈 사상으로 조선 민족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제 동포에게 기관총을 향하라고까지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 김민철(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 참고문헌
현영섭, {朝鮮人の進むべ道}, 綠旗聯盟, 1938.
______, {新生朝鮮の出發}, 大版屋書店, 1939.
{綠旗}, 綠旗聯盟.
{總動員},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每日申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