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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연재원고 4회 180331 送稿 200자 50매
망국의 역사 위에서 (4)
이 원 규
호방하고 거침없는 무관 노백린의 생애
이토 히로부미 연회장에서 이완용을 ‘개’라고 조롱
지난 호에 ‘조선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갑’ 이야기를 했으니 노백린(盧伯麟 1875~1926) 장군 이야기도 해야겠다. 여기 써 나가는 이야기의 중심이 20세기 초 갑자기 망국의 역사 위에 던져진 홍사익 · 지청천(당시 이름 지석규) · 이응준 · 김석원 등 대한제국 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의 생애인데, 그들을 가르친 교장이었기 때문이다. 노백린은 일본 육사 11기로 이갑보다 4년 선배이자 동지였다.
노백린은 가까운 동지들과 신민회를 결성해 구국운동을 펼치고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10년 강제합병 후 하와이로 가서 박용만 등과 국민군단을 창설해 3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사담당 간부가 됐으며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선발되었다. 1920년 공중폭격으로 일본을 공격하려고 미국에서 동포청년들을 비행기 조종사로 양성했고 다시 임정에 참여해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비운에 찬 말년을 보내고 이역 상하이에서 궁핍에 시달리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통 큰 사나이 대인배를 찾는다면 노백린을 빼놓지 못할 것이다. 1920년대 잡지《개벽》이나 《동광》, 1930년대의 《삼천리》를 찾아보면 무수히 많은 일화들이 실려 있다. 이갑의 일화들이 애잔하고 거룩한 것에 비해 그의 이야기들은 호방하며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것들이다. 웃으면서 가슴이 싸하게 슬퍼지는 이야기들이다.
우선 청년시절 일화를 한 번 보자. 홍사익 · 지청천 · 이응준 등을 가르친 무관학교 교장이 되기 몇 해 전 일이다.
1905년 12월 21일 을사늑약을 기어이 성사시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초대 조선 통감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두 달 남짓한 기간은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가 권한대행을 했다. 이토는 1906년 3월 2일에야 경성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했고, 을사늑약에 협조한 이완용과 송병준 등 얼빠진 조선인 고관대작들을 초대해 연회를 열었다.
취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30대의 조선군 장교가 연회석 앞에 나타나 “워리, 워리”하고 소리치며 혀끝을 굴려 개를 부르는 소리를 냈다. 연회에 온 매국노 이완용을 개라고 여겨 조롱한 것이었다. 일설에는 하세가와 대장이 장군도를 뽑아들고 일어서자 그 장교도 군도를 뽑아들어 맞대결을 하려고 했는데 이토가 만류했다고 한다. 믿어지지 않는 이 일화의 주인공이 바로 청년장교 노백린이다. 노백린이 뒷날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밥상 위에 굵직한 똥을 누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일화도 있는데 앞의 것과 달리 분명한 기록이 없어 믿기 어렵다.
일본 육사 동기생과 선후배 들
노백린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토의 통감 부임이 늦어진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당시 일본 정계는 조선반도 통치 문제를 놓고 두 가지 주장이 있었다. 정한론(征韓論)을 바탕으로 강제합병으로 완전히 삼켜버리자는 이토 중심의 합병론자들, 합병은 무리하므로 우선 연방제로 가자는 육군대신 고마다 겐타로(亞玉源太郞,1852-1906)를 비롯한 연방론자들이었다.
고종황제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이토의 최대 정적이기도 한 고다마에게 보내는 어새(御璽) 찍은 밀서를 한 육사출신 고급 무관에게 주어 일본에 보냈다. ‘나는 귀하가 통감이 되어 오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밀서를 전달 받은 직후 고다마가 급서함으로써 고종황제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토는 조선통감이 되고 기어이 조선반도를 합병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것은 노백린의 또 다른 육사 11기 동기생 어담(魚潭)이 일본어로 쓴 회고록에 나온 이야기이다. 동국대 사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가 문재인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자 물러난 이기동 교수는 이 나라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던 중대한 사건의 밀사 역할을 노백린의 동기생 김성은(金成殷 1878~1906) 부령(副領 : 오늘의 중령과 같음)이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성은은 ‘백마 탄 김 장군’, 또는 ‘원조 김일성’으로 불린 김경천(金擎天 본명 김광서[金光瑞])의 친형이며 노백린의 일본 육사 11기 동기생이다. 그리고 김성은 부령은 27세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대한제국 시대의 일본 육사 출신 무관들, 육사 11기 조선인은 21명이었다. 촉망받던 인물 김성은은 그렇게 요절했고 노백린 · 윤치성 · 김희선 · 어담 등이 알려진 인물들이다. 윤치성과 김희선은 한동안 독립운동을 하다가 가망 없다고 생각한 듯 주저앉았다. 어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충성했다. 노백린 하나가 끝까지 순결하게 독립운동을 펼쳐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체면을 세웠다. 12기부터 14기까지는 조선인 입학이 없었다. 15기는 8명이 졸업했다. 이갑과 유동열만 독립운동을, 나머지는 일제에 타협하고 살았다. 그리고 계속 입학생이 없다가 23기에 위에서 말한 김경천이 혼자 입학해 생애를 독립운동에 바쳤다.
무관학교 교장으로 애국혼을 강조
노백린은 1875년 1월 황해도 송화군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이미 기골이 장대해 ‘장군’이라는 말을 들었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서 일본에 갔고 게이오의숙(慶應義塾) 특별교육부 보통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일본어를 익히고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세이조학교(成城學校에 들어갔다. 관비유학생인 어담 ‧ 윤치성 김성은 등 20명과 함께였다. 이 학교는 사관학교의 예비학교 기능을 했다. 구한말 유학간 초기 일본 육사 입학자들은 이 학교를 거쳤다. 그들보다 후배인 김경천과 홍사익 지청천 이응준 등은 유년학교 제도가 생겨 거기 입학했다.
노백린과 동기생들은 1899년 11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견습사관 과정에 배치되었다. 그 후 큰 고난을 맞았다. 아관파천 이후 고국에 새로 들어선 친러 내각이 일본 유학 관비유학생들을 친일분자로 간주해 관비 송금을 중단했다. 육사 졸업생들에게 참위 임명장을 보냈지만 봉급은 보내지 않았다.
1900년 7월, 그들은 도쿄에서 혁명일심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고 쿠데타를 모의했다. 노백린은 주모자는 아니어서 뒷날 비밀결사가 발각됐을 때 살아남았다. 그는 그 해 말에 귀국해 무관학교 교관을 맡았다. 곧 부위(副尉 : 중위) 정위(正尉 : 대위)로 승진했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종군하며 만주전선을 돌아보고 와서 참령(參領 : 소령)과 부령으로 승진하며 헌병대장 자리에 올랐다.
이 무렵 고향에 있던 조카가 연락선을 타고 인천으로 오는 길에 준수하게 생긴 가출 소년을 발견해 그의 집으로 데려 왔다. 그 소년이 뒷날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한 이응준이다. 실컷 친일을 하고 해방조국의 국군 창설을 한 사람이다.
1907년 노백린은 안창호 ‧ 이갑 ‧ 전덕기 ‧ 윤치호 ‧ 이동녕 ‧ 이동휘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였으며, 자신의 재산과 땅을 헌납, 고향인 송화에 사립학교인 광무학당(光武學堂)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는 흥사단에도 가입하였다.
이 해 군대가 해산당했다. 그때 일본 정부는 장군, 영관, 위관, 하사관에게 위로금 혹은 퇴직금 형식으로 돈을 주었다. 강제로 퇴직당한 사람들로서는 받을 권리가 있는 돈이었다. 실제로 많은 해산 군인들이 그 돈으로 토지를 사서 생계를 무난히 해결했다.
노백린의 큰아들 노선경(盧善敬)이 기록한 아버지의 전기 <노백린 장군 실기>를 보면 그는 이 돈을 직접 하세가와 사령관에게 돌려주었다.
(노백린)장군은 이를 꽁꽁 싸 가지고 댁(宅)을 나갔다. 찾아간 곳은 하세가와 대장 집이 었다. 일본 도쿄 사관학교 재학시에 하세가와는 아마 교장직에 있으면서 장군의 모든 면 이 장래에 희망이 큰 학생으로 알고 모범 학생이요 수재인 것을 탄복하였다. 그러나 군대해산을 당한 그 마당이니 한마음 쓰라린 가슴을 안고 하세가와 관저로 갔다. 그 대장 은 문안 온 줄 알고 온화한 말로 맞이하였다. 장군은 돈 뭉치를 내어던지고 분노한 표정 으로 눈을 부릅뜨고 행패를 부렸다. 대장이 만류하며 감언이설로 설명하였으나 분연히 대 장 관저를 나왔다.(<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 독립기념관, 2003.)
하세가와가 노백린 재학시절에 육사 교장이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돈뭉치를 돌려주었다는 말은 다른 증언들도 있어 사실로 보인다.
노백린은 군대 해산 뒤 대한제국 군부에 남았고 삼청동에 있던 대한제국 무관학교 교장으로 갔다. 생도는 1학년 25명뿐이었다. 그리고 오구라 유사브로(小倉祐三郎, 1878~1943)라는 일본군 수석교관이 파견 나와 있었다. 노백린과 육사 11기 동기생으로 수원수비대장을 지낸 자였다. 그는 이동휘가 지휘했던 강화진위대가 군대해산에 저항해 봉기하자 진압군으로 나서 강화로 진공했다가 매복에 걸려 수십 명 부하가 전사하고 진급이 늦어지고 있었다.
노백린은 통이 크고 너그러워서 피맛골 술집 주인과도 친구를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오구라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사사건건 학교 일에 참견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군기를 잡았다고 한다.
“이봐, 내 직책은 교장이고 계급은 일본군 대좌와 같은 정령이다. 그런데 왜 경례를 안 하는가?”
오구라는 꼼짝 없이 경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노백린은 생도들에게 자주 애국혼을 강조했다.
“기울어가는 조국을 일으킬 사람들은 그대들이다. 일본의 강요에 굴복해 보호조약을 맺었지만 아직 희망이 있다. 조국을 잃으면 너희 부모와 형제는 노예가 된다,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
그는 망국의 불행을 막으려고 분투했다. 그러나 결국 1909년 5월 교장직을 떠나게 되었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는 체구가 큰 대식가였다. 생도들에게 이임인사를 할 때 자기 식으로 했다.
그는 교관단과 조교, 생도 전원에게 일과를 중단하고 정오에 학교 서북쪽 소나무 숲에 모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나무 숲에는 시골 부잣집 잔칫날처럼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늘 배가 고팠던 생도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허리띠를 풀어놓고 실컷 먹었다. 생도들이 배를 채운 뒤 노백린 교장의 명으로 교관단과 생도들은 언덕 위에 매우 자유스럽게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장면으로 기념되며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촬영이 끝난 뒤 노백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이임인사를 했다.
“교관단과 생도 제군! 지금 우리 조국의 사정이 나를 더 이상 제군과 같이 있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조국을 지키는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오늘 부득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생도 제군! 기울어가는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는 장교가 돼야 한다. 조국을 구할 사람은 그대들밖에 없다. 조국을 지키는 전선에서 다시 만나자.” 생도들은 우상으로 여겼던 노백린이 교장이 떠난다는 말에 눈물을 철철 흘리며 마지막 경례를 올렸다.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 그리고 조종사 양성
그 후 노백린은 신민회 일에 매달리는 한편으로 애국 계몽운동에 나섰다.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대표를 맡아 고향 황해도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의 기초를 세우려 했다. 이 조직에는 백범 김구도 참여했다. 노백린은 조직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육사 동기생인 윤치성과 몇 가지 사업에 손을 댔으나 큰 손해를 보고 물려받은 가산을 잃어버렸다. 군인 출신이 사업을 벌이면 망한다는 건 옛날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해(1910년) 10월 1일 한일강제합병 직후 그는 군복을 벗고 낙향했다. 조선총독부가 고급 무관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주었고 대부분의 무관들이 받아먹었다. 노백린은 집에 끼니가 떨어질 정도로 궁핍했으나 그걸 받을 리가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와 삼엄한 감시 아래서 노백린은 김좌진 등과 대한광복단을 꾸려 활동하다가 1916년 7월 경의선 열차를 타고 만주로 탈출했다. 이후 다렌(大連)을 거쳐 상하이로 가서 독립전쟁을 펼치는 방략을 찾으려 고심했다.
그 해 10월에는 독립군 훈련기지를 마련했으니 교육훈련을 맡아달라는 박용만(朴容萬)의 요청을 받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오아후 가할루 지방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김성옥 · 허용 등과 함께 대조선국민군단 별동대 주임으로서 3백여 명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재정공급처인 파인애플 농장의 흉작, 주미일본공사관이 미국 정부에 한인들의 군사훈련을 항의한 때문이었다. 게다가 박용만과 대립관계에 있던 이승만의 영향력이 커졌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미주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열망하게 되고 하와이에 체류 하고 있던 노백린의 존재감이 커졌다. 그해 4월 그는 한성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지명되고 9월에는 통합 상하이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장 상하이로 가지 않고 미국 본토 순방길에 올랐다. 곳곳에 있는 동포들의 환영을 받으며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노백린은 일본을 공격할 비행기 조종사 양성에 돌입했다. 초기에는 비행기 2대, 미국인 기술자 1인과 비행사 6명을 교관으로 두었으나 기대한 만큼 실적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계속 미국에 머물면서 비행학교에 열성을 기울여 1920년 7월 제1회 졸업생 25명을, 1923년에는 11명을 졸업시켰다. 비행기도 5대로 늘어났고 무선통신 장비까지 갖추었다. 한편으로 그는 임정 군무총장으로서 ‘전 국민이 광복군 대열에 참가하기를 당부하는 군무부 포고 제1호를 발표하였다. 틈을 내어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계몽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비행학교가 제대로 돌아가자 임시정부 군무총장 직책을 가진 그는 1922년 비로소 상하이로 떠났다. 그 후 국무총리도 맡았다. 그러나 상하이 임시정부는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난국을 수습하려고 분투했으나 그는 교묘하게 머리를 쓰는 지략가가 아니라 단순 정직한 군인이었고 타고난 본성도 그러했다. 그는 실망을 거듭했고 심신이 허약해졌다.
불우한 말년
노백린은 생애 마지막 시간을 상하이에서 불우하게 보냈다. 그의 사정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눈길을 끈다.《개벽》1925년 8월호에 실린 권동진의 글이다.
네 거고 내 거고 닥치는 대로 먹어 없애는 기풍이 굉장합니다. 술도 맥주 같은 것은 한 꺼번에 3,4 타스를 예사로 마시고 양요리, 일본요리, 조선요리 할 것 없이 특히 요리 먹 기를 좋아합니다. 누구나 만나면 돈이 있고 없는 것을 불구하고 흔연히 가서 쾌(快)하게 한바탕 먹고 보는 기풍이 있습니다. 혼자도 가는 때가 많습니다. 돈 없이 먹고도 뱃심 좋 게 누웠다가 후기(後期)를 두고 일어서는 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풍과 수단이 어찌 좋 은지 한 번도 봉변을 당한 젹도 없습니다.
그는 어쨌든 호활(豪濶)합니다. 세상이 다 자기의 어께 아래로 보이는 듯한 태도를 가졌 지요. 그리고 「다 그만두어라. 나 혼자도 한다.」 하는 독성독래(獨狌獨來)의 기풍이 있 습니다. 그러기에 최근으로 말해도 그가 3,4년 동안 국무총리의 직을 가지고 혼자서 버티 고 지내었지요. 「다 그만두어라. 내 혼자서 버티고 있을라」 하는 무겁대담(無怯大擔)한 불구불속(不拘不束)의 쾌남아(快男兒)이지오.
그는 가족 관념이 본래 없습니다. 상처(喪妻)뒤에 취처(取妻)를 안하고 지냈습니다. 아 들은 아들 마음대로 딸은 딸대로 자기는 자기대로 각각 저 할대로 하라는 말을 가끔 했습 니다. 그는 또 자전거를 퍽 좋아했지요. 날마다 자전거에 올라 앉아 동서남북으로 뺑뺑 돌아다녔습니다. 어쨌든 활물(活物)이지요. 조금도 가만있지는 않았지요. 그러기에 나를 찾아왔다가 내가 방에 들어앉을 걸 보고는 「여보 나갑시다. 방안에는 무슨 방안」 하고 손목을 끌어 잡아다닌 젹이 많습니다
이것은 그래도 사정이 좋았던 시절 이야기였다. 《삼천리》 1934년 9월호에는 호사가들을 즐겁게 할 <풍문집>이라는 글이 있는데 ‘감자 봉지 든 노백린’이라는 글도 있다.
상해(上海)에서 죽은 노백린 씨가 한참 곤궁할 적에 불란서 조계에서 자취하는데 늘 전 차를 타고 공동조계 시장에까지 감자 사려 나갔다. 하루는 전차에서 뛰어내리다가 가슴에 안은 감자 봉지가 탁 터지는 바람에 감자가 애스팔트우 거리에 대굴대굴 굴러 흩어졌다. 노백린 씨가 어떻게도 그 감자가 아깝든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그 감자 한 개씩 투 개씩 모두 주워 모으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 때문에 가고 오던 자동차가 모두 서고 전차까지 서고 교통순사는 교통 방해한다고 연해 호각을 불고. 이리하야 구경꾼까지 수백 명이 삽 시간에 몰려왔다. 감자를 다 주은 노 씨는 군중들을 향하여 껄껄 웃고 다시 봉지를 안고 다른 전차에 바꿔 타고 제 집으로 향하였다고 그 호담(豪憺)을 말하는 한 에피소드이다.
상하이 시절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작은 것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고 늘 낙천적으로 살아간 남자였다.
그러다가 결국 섭생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리고 그로 인해 정신 이상까지 왔다. 늘 군복 입고 군마를 타고 남대문을 통해 입성하면 참 좋겠다고 노래하듯이 말했다고 한다. 밤마다 세를 든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말 달리는 시늉을 하면서 "한성으로 가자! 나의 보금자리!"라며 크게 외쳐 이웃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는 1926년 1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송건호 선생은 《송건호 전집》제15권에서 노백린이 자살했다고 썼는데 영양실조로 정신 이상 증세에 빠져 있었으니 제 정신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주검은 상하이에 묻혀 있다가 1993년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자식들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아버지의 전기 <노백린 장군 실기>를 쓴 장남 선경은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대한독립단에서 투쟁했고 차남 노태준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나와 이범석 장군의 광복군 제2지대의 구대장을 하며 OSS 국내 정진대 간부를 지냈다.
노백린의 일본 육사 동기생들은 그가 불행하게 죽었을 때 일본군의 조선군사령부 소속 장군이나 대좌로 승진하며 살고 있었다. 그가 삼청동 무관학교에서 열성을 다해 가르쳤던 생도들 중 독립전쟁 전선에 나온 사람은 지청천 한 사람뿐이었다. 노백린도 군대해산 때 돈뭉치를 받았다면, 경술합병 뒤 남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면 천명을 다하며 편안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는 불행했지만 이 나라 근현대사는 그의 존재 때문에 덜 부끄럽다.
사진 1.1900년대 일본 육사 정문.
2.청년장교 시절 노백린.《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독립기념관 2003)애 서 옮김.
3.무관학교장 이임식날 회식을 하고 제자들과. 이응준 자서전 《회고 90 년》(선운기념사업회 1982)에서 옮김.
4. 미국 체류 시절 이승만과.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에서 옮김.
5.미국 캘리포니아 비행기학교 시절 조종생도들과.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 운동》에서 옮김.
6.대한민국 임시정부 총리 시절.《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에서 옮김.
7.임시정부 군무총장 포고문 원본.
8.아들이 노경선이 쓴 노백린의 전기.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에서 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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