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姜氏 大田廣域市宗會는 지난 4월 22일 忠南 論山市 鍊武邑 陽地里 梅花山 山麓에 贈 吏曹判書 忠烈公 沙月亭 姜壽男의 墓所와 紅線齋가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아, 大田에서 咫尺에 있는 距離이지만 그동안 大田宗會는 參拜를 하지 않은 곳을 選定을 하여, 9時에 大田을 出發한지 40여분만에 紅線齋 正門에 到着하자 미리 와서 대기한 紅線齋 姜信民 齋長께서 우리 一行 40名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고 이어서 墓所前에서 參拜를 한 다음 齋長으로부터 公의 諱는 壽男이요, 字는 仁叟이며 일찍이 南冥 曹植先生한테 師事하였다. 1580年 宣祖13年에 別試文科에 及第하여 承政院注書, 典籍, 禮曹와兵曹의 佐郞, 正郞, 陽城縣監, 戶曹正郞을 歷任하셨다. 壬亂이 勃發한지 10日이 채 안되어 近畿까지 들이 닥치자 鑾輿(난여. 임금의 수레)는 도성(都城)을 벗어나고 兩京이 陷落되자 公께서 京畿觀察使 沈垈의 裨將으로 出戰하였다.
出戰에 앞서 家族과 訣別하며 이르기를 “나는 지금 敵과 抗戰해야 한다. 만약 成功한다면 하늘의 도움으로 千萬多幸이겠으나 혹시 不幸하게 되면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죽은 뒤 眞實로 標識가 없다면 비록 遺骸를 찾아 葬事지내려하나 무엇으로 證驗한단 말인가? 하고 이어 붉은 실로 상투를 동이고 옷깃에 특별히 姓名을 쓰며 말하기를 이것이 標識이다”라고 한 다음 軍陣으로 나갔다.
이해 10월 軍陣을 朔寧(지금의 漣川)으로 옮겼는데 敵兵이 四方을 에워싸자 友軍들이 흩어졌는데 公은 홀로 피바다 가운데 꼼짝 않고 활을 당겨 연이어 敵 수십여명을 쏘아 죽이었으나 戰勢는 기울어 敵의 화살을 맞고 壯烈이 逝去하셨다. 이때가 1592년 10月 18日 밤이었고 이때 公의 나이 41세로 後孫들이 戰歿한 뒤 그 屍身을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고 다만 그 머리만을 찾았는데 그 標識한 붉은 실이 상투에 있었기 公이 보낸 戰袍로 그 머리를 염하여 高陽의 朴寺里 先塋 아래 乾坐에 葬事를 지냈다고 國朝人物考 傳한다고 하였다.
그 후 後孫들이 2007年 11月에 現 論山市 鍊武邑 陽地里로 移葬하였으며 階下山盡處에 紅線齋를 建立하였다.
壬亂이 끝난 후 朝廷이 안정되어 公의 功績이 至大함을 안 朝廷에서는 宣祖 39年(1606) 都承旨에 贈職, 肅宗 35年(1709) 吏曹判書에 加贈, 肅宗 38年(1712) 忠烈이란 諡號 下賜, 正祖 15年(1791) 朔寧戰鬪에서 殉職한 祠堂에 表節 懸板을 下賜한 壬亂의 忠臣으로 象徵되고 있으며 系譜는 博士公系 淸風公(諱 徯)의 高孫이다고 齋長께서 상세히 說明을 해주었다.
또한 朝鮮時代의 晉陽姜門이 낳은 일곱분의 忠孝烈 三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旌閭閣, 一名 三綱門으로 불리는 七旌閭 中 第3閭에 公을 기리고 있으며 位置는 慶南 宜寧郡 宜寧邑 洞里에 세워져 있다고 하였다.
紙面을 通해 時間을 割愛하여 親切히 案內하여 주신 姜信民 齋長님께 感謝를 드립니다.
홍선재 측면에서 본 모습(정면 미촬영)
첫댓글 인터넷 서핑중 <홍선재>를 검색하여 본 중앙종회의 글(작성년월일 미확인)을 보게되었는데
소개된 충렬공의 행력등 저도 아직 확인하지 못한 일부 관직등 새로운 정보를 보고 놀랐습니다.
여기에 姜信民 齋長(글쓰신 분의 임의 호칭, 정식 종회 임원직 아직 없음)이라 소개된 분은
<진주강씨 충렬공(壽男)파 종회 총무>를 20여년 맡아 봉사해 왔으며,
최근 <진주강씨중앙종회 시조님역사공원추진위원장>으로 제례등 전례에도 밝으신 현종님이셨는데
금년 2월 급작스런 병환(자가면역질환 혈관염)으로 입원치료중 2022.04..20 젊은 나이(66세)에
별세하셨습니다.
신민총무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본 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한 아쉬움이 참 많이 남네요
이에 2022.04.21 조의문상후 충렬공종회 회장단 긴급모임이 2022.04.27 홍선재에서 있었는데
이 때 찍은 위 동영상과 사진은 본글에 답사인증샷으로 가려진 충렬공묘역과 홍선재의 모습을 소개하고자
추가하여 올림
홍선재 주소 : 충남 논산시 연무읍 동안로 1242-52(성묘시 네비로 찾아 가실 때 활용 바람)
추기 : 중앙종회 홈페이지는 현재 운영중단 상태이므로 홈페이지 검색이 안되니 참고하삼
아 ~! 한 분의 인재가 세상을 달리하셨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충열공 묘역은 식사리 소윤공 묘역에서 함께 시제를 여러해 올렸으나 기사 내용과 같이 논산으로 이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명이 본문에는
박사리로 되어 있어 사진에 설명한 식사리와 일치 하지 않으니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충렬공의 원래 이장전 묘역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식사리가 맞습니다
고양시 박사동 선영 아래라 한 것은 공의 5대조이신 소윤공(安壽)의 두번째 이장된 묘역이였기 때문이니 오류라 할 수 없고
지금은 도시화에 따른 아파트 건축으로 소윤공께선 세번째 이장된 묘역이 고양시 벽제읍 대자리 용보원의 장손자이신 관찰사공 자평(子平)과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민씨의 부음에 놀랐습니다 우리 문중의 인재 한 분이 승천하셨군요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