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슬루는 내게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1972년, 그 전 해에 마나슬루에 도전했다가 동생을 잃고 실패한 김정섭씨는 2차원정대를 구성해서 다시 히말라야로 향했다. 당시 이 등반은 국민적 관심사였으므로, 내가 일하던 조선일보에서도 기자를 동행시켰다. 그러나 이 도전 역시 정상 등반을 앞두고 엄청난 눈사태를 만나 대원과 셰르파 등 15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로 끝났다.
참변을 모면한 대원과 조선일보 기자는 카트만두로 철수했지만 당시만 해도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이때 내가 한창 몰입하고 있던 아마추어무선이 도움이 되었다. 네팔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인 햄을 통해 그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나 그 후 한 참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히말라야는 여전히 접근할 수 없는 금단의 지역으로 생각되었다.
유피트레킹에서 마나슬루 트레킹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자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난이도는 중간 정도라고 했다. K2-곤도고롤라 트레킹에서 혼이 난 후 힘든 곳은 가지 않기로 했지만 전 일정 야영이라는 점 이외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3월 22일 카트만두공항 입국장은 한국인들로 붐볐다. 오은선씨의 안나푸르나등반을 취재하려는 KBS팀의 어마어마한 장비가 눈을 끌었다. 이번 트레킹의 가이드인 네팔로의 라게스사장이 나와 있었다. 호텔은 짱호텔 건너편 허름한 텐키. 요즘 타멜에서는 방 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을 먹는 데 새로 교육을 받았는지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면서 마치 일류 레스트랑이나 된 듯이 꼬치꼬치 캐묻는다. 식사가 끝난 후 우리는 라게스의 집으로 가서 짐을 정리했다. 넓은 정원이 있는 5층 건물이었다. 우리 일행 5명에 포터와 쿡 등 지원인력 27명인 대부대가 되었다. 포터 몇 명은 지붕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포카라로 가는 길과 갈라지는 다딩에서 점심을 먹고 먼지가 이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라게스와 포터들은 모두 이 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버스는 험로에서 전후좌우로 마구 흔들리는 데 지붕 위의 포터들이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아루갓바자르 버스정류장 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30분. 원래는 시장이 있는 마을까지 가게 되어 있었으나, 한참 살펴보던 라게스는 그냥 정류장 옆 공터에 천막을 쳤다. 정류장에는 이미 트레커를 태우고 온 듯한 버스가 몇 대 서 있었다.
3월 24일. 트레킹 첫 날이다. 된장국에 숭늉까지 나오는 한식으로 아침을 마치고 출발했다. 한식 주방팀이 동행하는 호화트레킹이다. 출발지점의 해발고도는 570m. 히말라야의 트레킹은 보통 2,000m 부근에서 시작하지만 여기는 사실상 바닥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길은 대체로 평탄했지만 내려 쪼이는 뙤약볕이 우리를 힘들게 했다. 덥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이처럼 더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산을 쓰고 언덕을 넘어오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여기 사람도 한낮의 강렬한 햇볕은 힘든 모양이다. 일행 중 한 사람은 길가 가게에서 반바지를 사서 입었다.
이날 야영지는 리딩(860m) 마을.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시원한 맥주였다.
3월 25일. 더위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한 시간 일찍 7시에 출발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오르막과 내리막을 되풀이하던 길이 갑자기 부디간다키 강변으로 떨어진다. 물가 백사장의 모래가 강렬한 태양열을 반사하니 더욱 걷기 힘들다. 일사병으로 낙오자가 생겼던 K2 트레킹이 생각났다. 나는 우산을 펴들었다. 다행이 이곳에는 물가에 천막으로 그늘을 만들어 놓은 가게가 있었고 맥주도 팔고 있었다. 아직 고산증세를 걱정할 고도는 아니므로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언덕으로 다시 올라서니 그늘과 바람이 있어 한결 걷기가 쉬웠다. 이 날 야영지는 꽤 큰 마을인 콜라베시(970m). 포터들도 힘이 드는지 한참 뒤에 나타났다. 우리는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으로 내려가 샤워를 했다.
3월 26일. 한 시간 가량 걸어가니 온천물이 나오는 따또파니다. 안나푸르나 서킷에 있는 같은 이름의 온천보다 규모가 작다. 돌에 파놓은 홈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세수도 하고 잠간 쉬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 시간 가량 걸어가니 도반 마을이다. 여기서부터 마나슬루보호지구로 들어가면서 해발고도가 1,000m를 넘기 시작한다. 경사가 급한 길도 나오기 시작했다. 마오이스트의 빛바랜 붉은 기를 세워놓은 집도 있다. 원래 이곳은 마오이스트 지배지역이었지만 평화협정이 이루어진 후 물러갔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도 가끔 나타나 세금을 뜯기도 한단다. 우리 포터 중에서도 한 정치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하여 삭발한 청년이 마오이스트였다고 하는데, 라게스가 야단을 쳐 나오게 해서 데리고 다닌다고 한다.
그동안은 더위와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는 것 같다. 이날 야영지는 큰 마을이 있는 자갓(1,370m). 아직은 밤에 침낭이 필요 없을 정도다.
3월 27일. 멀리 폭포를 몇 개 지나자 필림이 나타났다. 고등학교까지 있는 큰 마을이다. 넓은 밭이 있고 온통 초록색이다.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풍요한 마을 같았다. 포터들은 이 마을 특산품이라는 볶은 콩을 사서 먹는다.
점심을 먹는 동안 몇 사람은 길가 집에 들어가 화로에서 감자를 구웠다. 고지대라 감자가 단단하고 맛이 있다. 이 집 아들이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광주리 안에서 자고 있는 아기가 귀엽다.
멀리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야영지는 뎅(1,860m).
3월 28일. 이번 트레킹 최대 고비인 라르케패스를 넘기 전 여유를 가지기 위해 조금 무리를 해서 남룽((2,540m)까지 갔다. 이 지역은 티벳족이 많이 살기 때문인지 유난히 불교 관련 탑이나 설치물이 많이 보였다.
3월 29일.
아침은 춥지만 걷기 시작하면 금방 더워진다. 그 동안 매일 하루 평균 8시간 이상 걸었는데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계속 티벳족 마을을 지나갔다. 감자를 캐는 할머니, 장작을 지고 가는 여자들, 광주리를 지고 가던 여자애들이 나를 보고 이름을 묻는다. 가르쳐 주니 이름이 신기한지 깔깔대며 다라난다. 학교에 다니고 아이들 같았다.
우리는 라마승의 수도원이 보이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예비 라마승이 천막 안에서 열심히 불경을 읽고 있었다. 이날 야영지는 사마가온(3,390m). 고산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고도이지만 아직 문제가 없다. 라르케패스를 넘기 전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닭을 잡아먹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다음 야영지에서 하기로 미루었다.
3월 30일. 반나절 산행으로 삼도(3,690m)에 도착했다. 라르케패스를 넘기 전 마지막 로지가 있는 곳이다. 도중에 만나서 함께 왔다는 인도인과 오스트레일리아인 등 두 명의 트레커가 로지에 있었다. 주철로 만든 난로에서 불이 타고 있었는데 티벳에서 사왔다고 한다.
닭을 사러 갔던 포터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랫마을까지 내려가 보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그만큼 척박한 오지다.
저녁부터 비와 눈이 오기 시작했다.
3월 31일. 아침에 일어나니 텐트 주위에 눈이 5cm 정도 쌓여 있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설산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 날도 반나절 산행이므로 우리는 여유 있게 출발했다.
소 떼 근처에서 일을 보던 일행 중 한 사람이 큰일 날 뻔 했다고 한다. 황소 두 마리가 싸우다가 한 마리가 뒷걸음질 치면서 발을 밟았다는 것이다. 다행이 상처는 없었다.
다람살라(4,460m)는 라르케패스를 넘어가기 전 마지막 야영지다. 로지는 없고 돌을 쌓아 만든 피난시설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일찍 잠을 잤다.
4월 1일. 오전 4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출발했다. 발밑은 어두웠지만 멀리 앞으로 설산의 정상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걸음이 느린 나를 위해 가이드와 보조가이드가 뒤에서 따라왔다. 왼쪽으로 라르크야봉이 솟아 있고 그 뒤로 마나슬루가 보였다. 마나슬루 베이스캠프에 가려면 하루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쾌청이었고 둘러싼 설경은 우리를 압도했다. 멀리 산양 떼들이 보였다.
고도가 올라가면서 눈길이 되었다. 다 올라왔는가 하면 도 고개가 보이고...라르케패스 정상(5,200m)에 도착한 것은 거의 1시가 되어서였다. 정상에는 바람에 쓰러진 룸다가 쌓여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일행은 이미 넘어가고 보이지 않았다. 날씨는 잔뜩 찌푸렸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예정보다 2시간 늦어졌지만 이제는 하산 길이라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한 순간. 그것은 급경사에다 눈과 어름이 있고, 대부분이 너덜지대인 악로였다. 포터 한 명이 이 눈길에서 미끄러졌다고 한다. 게다가 비까지 오기 시작했다. 내 걸음은 더 느려졌다.
보기 딱했던지 가이드가 포터에게 나를 업으라고 지시했다. 가장 체격이 좋은 포터가 나섰지만 내 키에 턱도 없었다. 나는 계속 걸어서 내려갔다. 가이드의 말로는 원래 키 큰 사람은 바위와 너덜지대 하산이 느리기 때문에 빨리 내려가려고 그랬다는 것이지만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5시. 어둠이 깔렸다.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너덜 길을 내려가는 것은 최악의 조합이었다. 포터가 가끔 내 심장에 손을 대고 박동을 확인했다. 나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빔탕(3,590m)의 야영장에 도착한 것은 거의 9시가 되어서였다. 겨우 저녁을 먹고 텐트로 기어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11시간 정도 걸린 모양인데 나는 거의 17시간이나 고생을 했다. 어쩌면 나는 이날 라르케패스 통과 최고령-최장시간 기록을 세웠는지도 모른다.
4월 2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쾌청한 날씨다. 몸도 괜찮았다. 주위가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멀리 마나슬루도 보인다. 해가 있을 때 내려왔으면 장관이었을 것이다.
하산길이라도 경사가 급하고 미끄러운 토사길이 많아 쉽지는 않았다. 다라파니(1,860m)에 도착한 것은 7시경. 일행은 이미 저녁을 시작하고 있었다. 벼르던 닭백숙이 나왔다. 이번 숙소는 캠핑이 아니라 산장이라 편하게 쉴 수 있었다.
4월 3일. 계속 지루한 하산 길이다. 간간이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나푸르나 서킷을 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이 유럽인들이고, 일본인과 한국인도 있었다. 로지 옆을 지나갈 때 삼도에서 본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도 만났다. 며칠 쉬다가 귀국할 생각이라고 한다.
한참 걸어가는 데 군인이 길을 막는다. 건너편에서 찻길을 만들기 위한 발파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굉음과 함께 언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 길이 완성되면 안나푸르나 서킷은 일정이 단축되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샨제(1,150m)의 로지에 도착한 것은 6시경. 물 한통을 얻어 오래간만에 샤워를 하고 바지도 빨았다. 저녁은 트레킹 성공을 자축하는 염소파티였다. 라게스가 자랑하는 브라만식 연소요리다. 포터들은 좀 떨어진 곳에서 파티를 열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나는 그곳까지 갈 기운이 없어 그냥 침실로 들어갔다.
4월 4일.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불불레(840m)까지는 지프가 다니고 있지만 반나절 길이라 우리는 그냥 걸어갔다. 편안한 시골길이었다. 우리는 불불레에서 점심을 먹고 카트만두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가 카트만두 외곽에 도착했을 때 경찰이 길을 막았다. 은행강도 사건이 발생하여 버스진입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택시를 탔다. 텐키호텔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였다.
4월 5일. 아침에 시장을 구경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원래는 카트만두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비행기 출발시간이 2시간 당겨진 것이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은 것까지는 기억한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기장의 안내방송을 듣고 눈을 떠보니 비행기는 인천공항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다람사르(4,460m)에서 빔탕(3,590m)까지 고도변화. 출발 30분간은 기록되어 있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