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 네 번째 이야기 – 영주와 철도 (1) 송호상 (동양대 교수) 전통 도시 영주가 근대화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는 철도의 개통이었다. 일제강점기 중앙선의 개통을 시작으로 해방 이후 영암선, 경북선이 개통되면서 경북 북부 철도교통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강점 이전부터 경부선 경의선 등의 철도건설을 통해 식민지 수탈과 대륙진출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철도교통의 중심지는 새로운 근대도시로 발전되어 갔다. 또한 주요 철도역과 인근 지역을 연결하는 지선 철도 건설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지선건설 과정에서 지역 유지 중심으로 철도유치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영주는 1910년대부터 충청북도와 강원도를 연결하는 경북 북부의 교통 중심지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1924년 경북선이 김천에서 상주, 점촌까지 개통되어 영업을 개시하였다. 당시 영주 지역의 유지들도 경북선을 영주지역까지 연결시키고자 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영주를 대표하는 자본가였던 전하경은 ‘영주가 팔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농산물의 주요 산지이며, 동으로 태백산 소천의 목재와 동해안의 해산물들이 모두 영주를 길목으로 하고 있는 등 충청북도와 강원도 태백산과 동해안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각종 임산물과 해산물 유통의 거점 도시임을 강조’하면서 경북선 연장운동을 전개하였다.
(「경북선 연장과 대자본가진출 –전하경씨 담」, 조선일보 1934년 1월 4일, 3면.)
영주에 철도가 건설된 것은 1930년대 후반의 일이다. 1920년대부터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의해 계획되었던 경경선(京慶線)이 1930년대 전시 체제하 철도건설 구상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1935년 중앙 종관선 노선으로 청량리를 기점으로 원주 제천을 거쳐 단양-영주-안동-의성을 지나 영천에 이르는 철도건설을 계획하였다. 우카기 총독이 1936년 4월 동경에 가서 대장성, 육군성 등과 절충함으로서 성사되었다. 당시 예천에서는 군민대회까지 개최하면서 유치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기도 하여 한때 영주 주민들이 노선변경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철도국 건설과장이 영주에 와서 영주와 안동을 통과하는 것이 기정방침이라고 밝히면서 우려가 불식되었다.
또한 동아일보에서 「전조선철도예정선 답사」라는 기사를 통해 올해 실측을 마치고 5개년의 일정으로 완료 개통예정인 중앙선 신설노선이 영주를 통과한다고 노선 지도와 함께 보도하였다. 처음 계획 당시는 중앙선이었으나 일본 동경 지역에도 같은 명칭의 철도가 있다는 이유로1938년 12월 1일 영천-우보사이를 개통한 시점 이후 경경선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경경선을 부설하고자 한 목적은 크게 보아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의 내륙 오지 개발이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는 경북 충북·강원 및 경기의 4도를 거쳐 오지 연선(沿線) 일대의 풍부한 광산·농산 및 임산 등의 개발에 도움을 주고, 지방산업의 발달을 촉진함과 아울러 최근 일본, 조선, 만주의 교통·연락·화물이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는 사정에 비추어 기존 경부선의 수송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경경선의 또 다른 목적은 일본-조선-만주-중국을 잇는 제2의 병참간선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경경선뿐만 아니라 조선의 간선철도는 처음부터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이러한 사명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그 중요성이 더욱 강화되는 추세였다. 중일전쟁 이후 이른바 대동아전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조선철도는 전쟁의 확대에 부응하여 아시아대륙과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동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서해안과 병행하며 북상하는 경부선은 미국의 함포공격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서둘러 내륙 오지를 관통하는 경경선의 부설을 계획했던 것이다. 1936년부터 본격적으로 경경선에 대한 조사와 측량이 개시되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경경선 연선에우선 43개의 역을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총연장 358.6km의 선로와 43개 역의 부지 매수가 각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곧 해당 지역의 토지가격을 삽시간에 끌어올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산간오지인 풍기의 지가도 폭등했다. 평당 70전에서 1원 정도 하던 토지가 중앙선이 들어오게 되자 10원 정도로 치솟았다. 영주역 기지 매수는 1937년 12월 16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역 기지로는 뒷세(두서(斗西) 앞 내세들(내세평(乃世坪))과 성 밑 제방(城庭堤防)을 횡단하여 예천통로(醴泉通路)에 걸쳐 총 부지 이만평으로 결정되었다. (동아일보, 1937. 12.21. 7면) 1936년부터 시작된 경경선 공사는 청량리에서 죽령으로 향하는 부분과 영천에서 영주로 향하는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죽령 이남지역 공사는 1937년 11월 영천에서부터 시작되어 1940년 3월에는 안동까지, 1941년 7월에는 영주까지 127.7km를 개통시켰다. 마침내 1942년 3월 26일 단양역에서는 철도관계자 다수가 참가한 가운데 양쪽 선로의 연결식을 거행했다. 곧 이어 북부선과 남부선이 만나는 영주-제천 구간의 건설공사가 마무리됨으로써 1942년 4월 1일 안동에서 완전 개통되었다.
(1949년 10월 16일 세워진 조흥은행(전 한성은행) 영주지점. 조흥은행 90년사, 수록 사진)
경경선의 최대 난공사는 죽령터널 부분이었다. 조선과 만주에서 가장 긴 루프식 터널이었으며, 연인원 43만 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과정에서 희생자도 적지 않았으며, 터널공사에 전력과 기계를 활용한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공법을 적용하였다.
이와 같은 경경선의 개통은 통과 지역의 도시화를 급속히 진전시켰다. 풍기는 인삼과 곶감을 두 배 이상 출하하고, 영주는 봉화, 영월, 울진, 양양, 삼척 등지의 텅스텐, 철, 석탄 등의 광산물과 홍송(紅松) 등의 임산물을 실어내는 요충지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성장을 배경으로 영주는 1940년 10월 1일 영주면에서 영주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한성은행 영주읍지점과 조선운송주식회사의 직영점이 설치되어 경북 북부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
첫댓글 철도의 상징성에 영주가 중요 위치에 있었지요
기차가 지나가는 그 철거덕 거리는 소리를 자장가로 듣고 자랐거든요
검은 석탄을 실은 화물기차는 늘 선로를 달리고..
영주역이 세상의 중심인줄 알았으니요
훌륭한 자료 입니다
감사히 읽으며 지난 시절 향수에 잠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