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83]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의 존명은 아미타불, 수인은 항마촉지인 의상은 부처의 힘으로 마귀를 물리치고자 항마촉지인 수인 주불로 봉안 황수영, 부석사 무량수전 내 봉안된 불상의 재질이 소조(塑造)임을 확인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여래좌상은 창건기의 불상이 지금까지 이어온 것 부석사 무량수전 내 소조여래좌상(2023 현재) 어릴 적 사월초팔일날 아침. 할머니가 쌀을 한 되박쯤 흰보자기에 싸 머리에 이고 동네 할머니들과 신작로를 따라 부석사(浮石寺)로 향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할머니는 절집(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부처님 전에 공양미를 바치고 ‘군대 간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달라’고 108배를 올렸다. 이렇듯 부석사 부처님은 이 고장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였다. “부석사”하면 누구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그 안에 모셔진 부처님을 주인으로 안다. 부석사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 무량수전 부처님 앞에 불전을 놓고 삼배(三拜)의 예를 행한다. 이런 부석사 부처님을 ‘소조여래좌상’이라고 하고, 존명은 ‘아미타불’이라 하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라고 하니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여러 책 속에서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에 대한 내용들을 찾아 간추려 쉽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소조여래좌상 기단과 바닥 전돌(1916) 부석사 창건과 소조여래좌상 부석사는 676년 2월 의상이 왕명을 받고 부석사를 창건했다. 『삼국사기』 기사 중 676년 2월 전후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무렵 신라는 당나라와 국운을 건 치열한 전쟁을 치루는 도중에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기사에 보면 당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신라의 여러 성이 함락되고 지휘관과 백성이 죽은 내용이 많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의상이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게 되는데 그 다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현대 사학자들이 밝혀내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의상은 부석사에 아미타불(阿彌陀佛, 서방극락세계의 부처)을 조성하면서 수인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결정했다. 주불의 수인(手印)을 항마촉지인으로 결정한 이유는 항마촉지인은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고 승리를 증명하는 수인(手印:손모양)으로 부석사의 창건 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의상에게 있어 당나라 군대는 신라를 침략한 마귀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국운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의상은 부처님의 힘으로 마귀(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자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부석사 주불로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해 11월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부석사 부처님 덕분이다. 무량수전 해체수리 당시 기와 제작 모습(1916) 소조여래좌상 존명 ‘아미타불’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부석사 무량수전 내 주존으로 봉안되어 있다. 국보(45호)로 지정돼 있는 이 불상은 높이 2.75m로 대형 소조불로 분류된다. 이 소조불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처음 논의되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편단우견의 법의를 착용한 부석사 여래좌상을 목조로 제작된 석가여래상으로 추정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황수영(黃壽永, 1918〜2011, 동국대교수)에 의해 진행됐다. 그는 부석사 무량수전 내에 봉안된 불상의 재질이 소조(塑造)임을 확인했으며, 1054년에 조성된 원융국사비의 내용을 분석해 부석사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의 존명이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밝혔다. 아미타불은 우리가 죽은 후의 세계, 즉 서방세계를 담당하는 부처이다.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로서 중생을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사바세계에 내려 온 부처가 아미타불이라는 뜻이다. 아미타불은 한량없는 수명을 의미하기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법당 내의 독존의 아미타불상만을 봉안하는 양식은 창건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 근거로 창건기에 해당하는 신라 시대 녹유전(綠釉塼)과 고식의 방형불좌(方形佛座)가 남아 있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무량수전 건물은 고려 중기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머리와 오른팔 등이 후보된 것을 제외하면 무량수전 소조여래좌상은 창건 시기의 작품을 충실히 전해 온 것으로 파악했다. 부석사가 창건된 7세기 불상 원형보존(1916) 소조여래좌상은 창건기 불상 황수영이 현재의 무량수전 소조여래좌상을 창건기의 불상이 전해온 것으로 파악한 이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이주민(문화재청 감정위원, 박사)은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이 고려시대 많은 수리를 거치면서도 부석사가 창건된 7세기 원형을 나름대로 유지해 왔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 왕경(王京)의 성전 사원에서 사용된 것과 유사한 녹유전이 무량수전에서도 발견된 점, X-ray 조사 결과 목부분이 접합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1376년 불상의 머리가 떨어진 것을 수리해 개금했다는 「봉황산부석사개연기」의 기록과 상통하며, 14세기 보수한 머리임에도 불구하고 14세기 불상 양식을 따르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보수되었다는 점을 논의했다.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가장 주목되는 연구 성과는 부석사 소조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가 ‘와적대좌(기와+석재)’라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소조불상의 대좌가 와적대좌인 경우는 문무왕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 내 소조불상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현재의 소조불상이 창건기의 소조불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본 연구의 성과는 소조여래좌상의 성격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여래좌상을 창건기의 불상으로 볼 수 있다면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항마촉지인을 취한 여래상이기 때문이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감상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대형불상으로 분류된다. 보는 사람들마다. “우와! 크고 아름답다”란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나발(螺髮)의 머리에 육계(肉髻)가 큼직하다. 얼굴은 풍만하며, 길게 올라간 눈초리, 날카로운 콧날, 두터운 입술 등의 상호(相好)에서는 근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건장한 신체의 결가부좌한 자세는 안정감과 엄숙한 느낌을 준다. 왼쪽 어깨와 팔을 덮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는 가슴과 배를 지나며 촘촘한 평행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모양의 옷주름은 양쪽 다리에도 표현되어 있다. 당당하면서도 장중한 신체, 안정감 있는 자세, 우견편단의 착의법, 옷주름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에 특징적인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구전에서는 두 손이 파손되는 등 손상을 입어 조선시대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불상이 봉안된 전각의 명칭이 무량수전이고, 부석사 경내에 있는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 1054년)의 비문에 보처(補處: 주불의 좌우에 모신 보살)가 없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불상의 명칭은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무량수전 바닥 녹유전(현재 부석사에 3개 보존) 가장 크고 오래된 소조상 불상 뒤에는 당초문(唐草文)과 불꽃무늬가 조각된 목조 광배가 따로 조성되어 있는데,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안에 각기 3구와 4구씩의 화불(化佛)을 부착시켰던 흔적이 남아 있다. 광배 안에 새겨진 치밀한 당초문이나 광배 밖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불꽃무늬는 불상의 위엄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교한 불교 미술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의 전통을 이어 제작된 작품으로, 불상으로서의 위엄이 잘 배어 있으며 정교한 제작 기법을 보이는 우수한 예에 속한다. 또한 소조상(塑造像:진흙으로 만든 불상)으로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어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항마촉지인 수인 원융국사비문에 불상 관련 내용 원융국사는 1041년(정종7, 78세) 부석사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의상(義湘)이 전한 화엄법통을 이어갔다. 국사는 늘 부석사로 가고 싶어 했다. “절 주변 자연경관은 번뇌를 씻을 만하고 칡넝쿨에 얽인 덩굴풀들은 몸과 세상을 던져버릴 만한 곳이니, 나는 여기에서 시작하고 또한 여기에서 종신하리라”면서 부석사로 가기 위한 허락을 빌었다. 임금은 국사의 간청을 받아들인 후 난새 방울이 달린 수레를 타고 멀리까지 나가서 석별의 아쉬움을 참으며 전송했다. 국사는 속세에 나와 늦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마치 하늘을 나는 고니와 같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부석사로 은퇴했다. 비문에는 당시 무량수전의 전모(全貌)가 나온다. ‘본당인 무량수전에는 오직 아미타불 불상만 봉안하고 좌우보처도 없으며 또한 법당 앞에 쌍탑도 없다’고 적었다. 그에 대해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의상이 대답하기를 “지엄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미타불은 열반(죽음)에 들지 않고 항상 계시므로 좌우 보살을 모시지 않으며, 쌍탑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화엄일승(華嚴一乘, 의상이 화엄사상의 요지를 간결한 시로 축약한 문서)의 깊은 종지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그 이유를 기록했다. 지엄스님은 이 화엄경(華嚴經)을 의상에게 전해주었고 의상은 원융국사에 전승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