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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탈리니(영사)론과 뉴에이지
합체불 또는 환희불은 탄트라불교에서 이상으로 삼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좌도 불교라고 하는 탄트라 불교 또는 배화교에서는 수행자를 구루라고 부릅니다. 즉 이 구루는 수행을 통하여 성적인 에너지인 쿤탈리니를 회음부로부터 정수리로 끌어올려 등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이동하게 합니다. 즉 이것을 회천이라하면 소주천과 대주천으로 나눕니다. 정수리에서는 독수리의 날개로 표현되는 데 이는 쿤탈리니라는 하얀 뱀 영사가 정수리에서는 독수리의 날개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夷라는 글자인 헤르메스지팡이지요. 즉 성적에너지를 끌어올려 득도하는 것입니다.
파탄잘리라는 요가의 성인이 작은 뱀의 형상을 한 채 하늘에서 또 다른 성인 파니니의 손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경배를 하려고 취한 두 손바닥을 모은 것과 같았다.
요가(yoga)라는 말은 "연결하다, 참여하다, 통일하다"라는 뜻을 지닌 싼스크리트어의 어근 yuj에서 파생한 용어이며, 어원적으로는 황소의 고삐를 의미하는 'yoke'관련되어 있다. 이 용어는 의미상으로는 "다시 연결하다, 묶다"를 뜻하는 "종교"(라틴어로는 re-ligio)라는 말과 유사하다. 피조물인 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다시 신과 관계를 맺게 된다.
머나먼 별의 바위 틈 속에서 살고 있던 영사靈巳, 쿤탈리니라는 생명체는 어느 날 운석에 묻히어 지구의 바다로 떨어졌다. 바다 속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이 생명체를 물고기가 먹게 되었고 이 물고기를 바닷가에서 살던 원숭이가 잡아먹게 되었다.
쿤탈리니는 원숭이의 뇌 속에 들어가서 원숭이를 조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원숭이의 두뇌는 급격히 발달되었다.
두뇌와 신체의 거친 물질 안에는 극히 일시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미세한 실체가 존재한다.
인간의 몸 속에는 박테리아보다 작은 하얀 뱀이 살고 있는데 이 뱀을 영사라고 부르고 인도의 요가에서는 쿤탈리니라고 부른다. 몸의 차크라 중 맨 아래쪽 척추의 회음부에 있는 차크라로 물라다라 (근기)라고 하며 여기에 여신이 뱀 모양으로 잠들어 있다고 한다. 이 모양을 쿤탈리니라하며 명상에 의해 깨달아서 상층의 차크라로 오른다고 한다.
사마디는(삼매)는 남성원리인 시바와 여성원리인 '삭티'의 합일에 의해 일어난다. 시바가 머무는 곳은 머리위에 있는 7번째 차크라인 '사하스라라'이며 '삭티'가 머무는 곳은 척추 끝인 미저골이다.
영사인 쿤탈리니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힘의 실체라고 한다. 그렇다면 미토콘드리아야말로 여성에게서만 유전하는 것으로서 하얀 뱀의 형상인 영사가 아닐까? 티벳종족들의 전설에 의하면 마녀가 원숭이의 몸을 변형시켜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하는데, 인간의 몸속에 있는 '쿤탈리니'야 말로 마녀인 마고 여신이 아닐까?
1983년경 나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전공필수과목인 '서양미술사' 기말고사에서 '현대미술의 역사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하여 약술하라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현대미술은 인간이 얼마나 더 겸손해 질 수 있는가의 문제와 반대로 인간이외의 동물, 식물, 물질, 색, 면, 허공 등이 얼마나 더 위대해질 수 있는지 그래서 인간과 그것들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F 학점을 받았다.
당시에 다른 교수님이 진행하는 '현대미술론'이라는 수업이 있었는데 그 수업의 기말고사 역시 비슷한 문제여서 나는 위와 똑같은 답을 적었다. 나중에 교수님은 '니가 쓴 글은 말이야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한데 도무지 받아들여질 수가 없군...'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어릴 적부터 생각해 온 것이다. 10년 쯤 지난 1993년경 나는 고 안동민 선생과 3차례 만난 적이 있다. 안동민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심령과학의 1인자이고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 그와 첫 번째 만났을 때 그분이 말한 내용이 위에 적은 쿤탈리니 영사론이다.
나는 당시에 그의 생각에 공감했고 '만약 생명체의 생존의 첫째 목적이 개체보존과 종족보존에 있다면 즉 순전히 생명체의 진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박테리아와 인간은 진화의 방향만다를 뿐 거의 같은 높이의 진화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요?' 라고 말했다. 안동님 선생은 나의 의견에 흔쾌히 공감했다.
그후 3~4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뉴에이지 계열의 생물학 책을 보다가 생물계통도를 보게되었는데 정말 놀랐다. 내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우던 생물계통도란 원시단세포생명체로부터 식물계와 동물계로 나누어지고 식물계에서 가장 발달한 것이 속씨식물이며 동물에서 가장 발달한 것이 영장류이며 그중에서도 인간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뉴에이지계열의 계통도 그림은 지구상에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종이 인간과 동일한 높이에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즉 아메바, 바이러스, 박테리아, 곰팡이, 버섯, 나무, 지렁이, 원숭이, 닭, 개 할 것 없이 인간과 동일한 높이로 진화한 존재들로 그려져 있었다. 즉 모든 종이 진화의 방향만 다를 뿐 자기 나름의 방향에서는 정점에 도달한 존재들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이다. 영적인 관점에서라면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뉴에이지 열풍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기존의 학문의 틀을 완전히 전복하는 혁명적인 발상의 학문들이다. 데이비드 붐의 <홀로그램 우주론>, 일리야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 질서>, <식물의 정신세계>, <동물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신지학에서 출간한 <시, 공, 자아> 특히 꾸준히 베스트셀러를 유지하고 있는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현재 뉴에이지학문은 학문의 모든 분야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으며 전통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계에서는 뉴에이지 학문을 '악마의 학문'으로 규정하고 실랄한 공격을 퍼붓고 있다.
학자들은 인간이란 단지 미토콘드리아라는 생명체와 핵을 가진 진핵단세포 생명체의 결합으로 탄생한 이기적인 유전자 세포가 60조개가 모여서 공동체를 이룬 세포집단이란 것이다.
프랑스 해저에 실지렁이 비슷한 종류의 연체동물이 사는데 수천만, 수억마리에 해당하는 이 생명체들이 외부의 어떤 자극을 받으면 마치 단 하나의 개체처럼 동시에 모래 속에서 고개를 내밀거나 동시에 모래 속으로 사라진다. 이러한 생명체를 '군체'라고 부른다.
즉 인간이란 60조의 염색체와 미토콘드리아의 조합인 세포들이 모인 '군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군체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정보'이다. 숲 전체의 반딧불들이 동시에 깜박이거나, 실험실의 조개가 조수의 시간에 따라 입을 벌리는 것 등의 현상을 '리듬편승'이라고 한다. 분명 각 개체들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좀 더 높은 단계에서 오는 정보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게 확실해 보인다.
자연계의 모든 존재는 주변환경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인다. 자연계의 모든 존재들은 이 정보를 받아들여 pattern화한 형태로 저장한다. 그래서 가장 안정된 형태를 유지한다. 모든 존재는 생명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원자에서 시작해서 보다 큰 집합체로 진행될 때까지는 생명이 없다가, 원자의 집합체가 일정한 단계의 조직력을 갖추어 비로소 우리 인간과 비슷한 행동을 할 때 가서야 갑자기 거기에 생명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행동양식에만 비추어 다른 조직체를 판단하는 것 같다. 생물들은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일정한 형태들을 취하여 자기동일성을 갖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패턴(pattern) 인식에 의한 정보의 압축이다.
어떤 조직체가 자극에 대해 나타나는 반응의 총량을 의식이라고 한다. 진화는 바로 의식의 양과 질을 늘려 가는데 있다. 모든 생명체의 진화는 단세포에서 보다 많은 세포들의 집합체로, 그리고 인간과 같은 다수의 세포들의 집합체로, 또 정신체(精神體)들의 집합체로 마지막에는 '우주정신' 또는 '신(神)' 모나드(monad)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통합된 하나의 군체(群體)로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좀 더 큰 집합체로 가려는 현상은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모두는 하나의 군체(群體)이다. 우리들은 무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보다 높은 정신체 즉 영(靈)의 명령을 받고 있으며, 이 영(靈)은 개개의 개체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육체차원과 우리의 진정한 자아인 영적 존재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교량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영적 존재는 정신을 매개로 하여 육체 차원에서 작용한다.
비 물질인 정신이 물질인 뇌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최근에 학자들은 물질도 비 물질도 아니면서 이것들 사이를 연결하여주는 정보라는 것에 열광하고 있다. 뉴에이지학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단 하나의 단어인 '정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2000년대 이후에는 내가 쓰는 논문이나 모든 책에서 뉴에이지 학문을 '정보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데이비드 붐의 <<홀로그램우주론>>은 사실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 서적이다. 그는 인간의 뇌에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이 홀로그램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크기의 뇌를 가지더라도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나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나는 그가 주장하는 뇌가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이 홀로그램방식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뇌는 정보의 저장고가 아니다. 뇌는 단지 안테나이며 송수신기이고 정보를 분리 증폭하는 기관이지 정보를 저장하는 기관은 아니다. 인간의 실제적인 기억 저장장치는 우주공간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정보를 저장하기 위한 장치인 신체기관이 필요 없다. 실제로 인간의 모든 태고시의 기억으로부터 그 오랜 세월의 기억은 세포속의 염색체 속에 있는 지극히 작은 염색사 속에 들어있고 미토 콘드리아 속에 들어있다. 그 엄청난 정보를 저장하는데 조금도 크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은 특히 정신적인 삶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불편하고 육체 자체가 고통이요 슬픔인 경우를 자주 느낀다. 즉 육체를 최소화하고 정신은 극대화시키려는 생명체는 바이러스 같은 종류로 진화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쿤탈리니라는 영사를 그러한 존재로 보고 있다.
니이체는 인간을 '권력의지의 동물'로 보았으며, '나는 인간이다'라고 하는 말이야말로 얼마나 인간이 오만한 존재인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라고 주장했다. 즉 '나는 인간이다'라는 말은 인간은 적어도 '소나 개나 말보다 월등히 우월한 존재'라는 주장인 것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진화란 권력을 신장시킨다는 뜻으로 본다. 권력이란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의지를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이 다른 동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이들 동물보다 더 진화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란 진실을 이해하고 정보에 대한 반응력을 나타내는 것이지 권력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아무리 커다란 인간도 나에게는 너무 작았다. 아무리 작은 인간도 나에게는 너무 컷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나의 사랑이요. 분노다." 라고.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위대한 신이라도 나에게는 너무 작았다. 아무리 하챦은 미물일지라도 나에게는 너무 컷다. 이것이 우주만물에 대한 나의 사랑이요. 분노요. 슬픔이다." 라고.
인간만이 위대한 존재라는 생각은 '인본주의'를 발달시켰다. 생태주의, 자연 친화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조차도 깊게 들어가보면 인본주의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인본주의에 대한 엄청난 오해들을 하고 있다. 인본주의란 무엇인가? 물론 글자 그대로 인간이 세상의 중심인 주의이다. 여기서 '인간'이란무엇인가? 서구유럽인들이다. 서구유럽인들만이 인간이고 아프리카인들이나 황인종은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아니었다.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신과 동물의 특성을 동시에 가진 것으로 판단했고 신의 특성은 '이성'으로 동물의 특성은 '본능'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신의 특성인 '이성'을 가진 자 이성이 발달된 자들만 진정한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즉 인본주의를 다른 말로 하면 '이성 중심주의'인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갖추지 못한 자는 '광인' 취급을 하였고 프랑스에서는 파리시민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모두 정신병자 수용소에 집어넣기도 했다고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쓰고 있다.
즉, 가난한 자,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자, 일자무식한 자, 타종교를 믿는 자 모두 정상인간이 아닌 미친놈이었다. 따라서 제국주의란 인간이 인간을 점령하고 노예화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동물을 지배한 것이었다. 유럽의 기독교를 믿는 지식인만 인간이고 그 외의 모든 인간들은 사실 인간이 아니고 동물이었다. 불과 200년 전 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잡아다가 짐승처럼 부렸다. 그것의 바탕이 바로 인본주의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열대>라는 책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초기 이주민시대에 대하여 쓰고 있다. 영국의 이주자들은 감자를 심었다. 그런데 그곳의 원주민들은 아직도 수렵채집생활을 했고 그들은 엄청난 감자가 많은 야생 감자밭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래서 동료들을 불러와 감자를 캤다. 이주민들은 그들의 감자를 훔쳐가는 원주민을 총으로 쏘아죽였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만약 백인이 포로로 잡히면 원주민들은 그들의 살가죽을 칼로 벗겨보았다. '그들이 신인지 인간인지 알아보려고...' 반대로 이주민들이 원주민을 사로잡으면 그들 역시 칼로 원주민의 껍질을 벗겨보았다. 그들이 '인간인지 동물인지 알아보려고...' 이같은 일은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하였을 때도 동일하게 일어났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다.
인본주의를 미술적인 용어로 하면 '원근법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원근법이란 내가 서있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에서 볼 때 가까운 것은 크고 실재적이고 분명하고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뿌였고, 작고, 시시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눈에 원근법적으로 보인다고해서 그것이 올바른 세상의 진실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우리들 자신이 서 있는 곳 그곳을 '입장'이라고 한다. 우리의 정신적입장이란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겪고 배우고, 보고 느낀 것들의 총합이다. 여기서 인간이란 누구인가? 서구 유럽인을 지칭 하는 것이다. 바로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당신의 입장에서 보는 그 세계가 올바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절대로 진실이 아니다.
다른 존재들의 입장에서 보는 것을 상상하여 종합할 때 비로소 올바른 세상의 진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이제까지 알고 있던 세계관을 과감히 벗어던질 때 당신은 다른 존재가 서 있는 쪽에 서 당신이 서있는 쪽을 바라보는 관점을 알고 이해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세상의 진실에 한 발짝 접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최근에 다원주의란 바로 서구유럽인의 시각만이 아닌 모든 종족 모든 민족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자는 것이다. 시인 이상은 '오감도'라는 시집을 발표했다. 인간의 눈은 평지에 서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원근법으로 밖에는 세상을 볼 수 없다. '오감도'란 까마귀가 하늘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선인 것이다. 적어도 인간의 시선인 원근법의 횡포로부터는 벗어날 수가 있다. 이상은 '원근법적인 세계관의 부조리'에 대하여 일찍부터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공위성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갖추어야만 한다. 나와 너가 서있는 위치가 동등한 거리에서 보여지도록.
원숭이로부터만 인간이 되었다는 기존의 진화론적 관점, 박테리아나 개나 새나 동물들은 인간보다 하등한 존재라는 관점 이러한 것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당신은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으며 절대로 진실에 한 발짝도 접근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뉴 에이지 학문의 다른 예
프리초프 카프라<물리학의 도> , 루퍼드 셀드레이크<형태장 이론>, <카오스 이론>등이다. 한편 새로운 뉴에이지학자들은 기존에 물질주의과학자들이 비과학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신비의 영역, 마음과 의식, 초능력, 죽음이후의 영혼의 세계 까지 지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우주와 나'가 하나되는 비밀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 쿤달리니 활동 인간을 정신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쿤달리니는 활동성 생체에너지로 굳게 닫혀 막혀있는 일곱 군데의 기문을 열고 좁은 기맥을 넓게 확장하여 육신과 정신 영혼을 깨어나게 하여 초월적으로 진화하는 기틀을 제공하는 에너지인 것을 아직은 연구범주에서 뛰어넘지 못했으며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미토콘드리아의 놀라운 활동을 연구하는 가운데 생체 에너지, 생체리듬, 생리현상이 보통사람들의 범주에서 벗어나 초월하는 비밀을 열어주는 힘을 지닌 쿤달리니의 작용을 연구한다면 만물중 인간이 최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밝혀지고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점검이 되고 그 베일이 벗겨진다.
'생명나무'와 '夷(뱀 이)'-진정한 인간
원래 궁족이었던 뱀과, 거북·용 부족이었던 환인桓因부족은 견우의 화신이었으므로 소의 부족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소의 부족을 대신하여 소巢족, 즉 날개를 가진 새의 부족(환인桓仁-제우스)이 나타나는데 이는 순환적 우주의 실체이다.
최근에 《천부경》을 해석하는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천부경의 내용과 구조가 유태인의 ‘카발라’와 일치하고 있다고 하며 그것을 통하여 《천부경》을 해설하고 있다. 카발라는 흔히 ‘생명나무’로 불리고 있다.
▲ 수메르 점토판그림-나무 별 달 뱀은 모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영원한 생명
생명나무는 나무와 그것을 감싸고 올라가는 뱀과 태양과 달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가끔은 독수리와 얽혀있는 뱀으로도 표현된다. 생명나무는 우주사다리이며 인간이 신으로 올라가는 하늘사다리이다.
나무는 겨울에 죽은 듯이 보여도 봄이면 다시 새싹이 돋는 영원한 생명이다. 뱀은 허물을 벗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 불사신이다. 달은 매일 조금씩 그 살을 뜯어 먹히지만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태양은 매일 죽음을 당하지만 땅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존재이다.
우리나라 전설에 새가 변하여 '조개鳥介'가 된다고 한다. 조개鳥介라는 글자에 鳥(새 조)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동이족 중 한 갈래에 조이족鳥夷族이 있다. 최초의 나라 진辰은 조개 신辰으로도 읽는다. 새는 황소를 뜯어먹고, 원래 황소족에 해당하는 바다표범은 새가 변한 조개를 잡아먹고 산다.
웃으며 죽어가는 황소와 황소를 뜯어먹는 사자-새의 관계는 독수리와 뱀이 얽힌 관계와 동일하다.
이 생명나무의 상징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헤르메스의 지팡이, 토트의 지팡이며, 약국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얽힌 두 마리 뱀과 날개가 있는 지팡이다. 즉, 나무와 뱀과 독수리 날개가 있다. 독수리 날개는 신성을 의미하므로 생명나무의 의미와 완전 일치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이夷족이다. 오랑캐 이夷라고 읽고, ‘활을 가진 대인’을 뜻한다고 하지만, 이夷 라는 글자는 큰대大와 활궁弓이 합하여진 글자이지만, 대大는 독수리가 날개를 편 모습이고, 궁弓은 뱀이 무엇을 감고 있는 모습이다.
즉 이夷라는 글자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나 토트의 지팡이처럼 맨 위에 독수리날개가 펴지고 아래에 두 마리의 뱀이 감고 있는 모습과 일치하며 또 비라코차라고 부르는 남미의 신이 뱀의 몸에 날개를 달고 있는 것과도 일치하고 있다.
이夷라는 글자는 원래 화살시矢로도 썼다고 한다. 철銕이라는 글자를 보면 쇠금 변에 이족의 이가 붙어있다. 이는 세계최초로 철을 발명한 민족이 이족임을 말한다. 金矢 라고도 쓴다.
즉 이夷와 시矢는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글자였다. 즉 이는 활이 아니라 화살을 뜻하는 글자였는데, 이는 남신을 ‘이시비시’ 여신을 ‘이히리시’라고 불렀는데 이 두 단어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단어인 ‘이쉬’라는 뜻이 바로 ‘화살’이었다. 점성술에서 반신반마인 캔타우르족이 성인인 샤론(카이론)이 활을 쏘려고 하는 장면이 ‘사수자리’의 상징이고 사수자리의 마크는 화살이다.
▲ 수메르점포판- 이아우 신상으로 모두가 새머리 뱀다리의 신이다.
이夷를 자세히 보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과도 비슷하다. 16세기 독일의 ‘들어올려진 뱀’이라는 금화에는 앞면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상이 새겨져있다. 뒷면에는 십자가를 감고 있는 거대한 뱀이 그려져 있다.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뱀과 나무 끝의 독수리 날개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상과도 일치하고 있다. 예수는 죽은 뒤에 3일 만에 부활하는 영원한 생명나무의 상징이며 황소와 사자-새의 영원한 상징이다.
‘사자-새’는 동시에 ‘찢겨지는 황소’이다. 이들은 일체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이라고 불리며 이 신들은 모두가 황소로 표현되기도 한다.
▲ 제우스와 싸우는 티폰 -티폰의 모습이 독수리날개에 뱀몸으로 그려져 있다.
서기 300년 경 십자가에 박힌 ‘오르페우스 박카코스’라는 원통형 석인이 나왔다. 이 그림은 아이슬러 박사의 《어부 오르페우스》에 실린 것인데 아이슬러 박사는 이것이 ‘구 종교적 신념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오르페우스교 입문자’의 것이라고 한다. 거기에 새겨진 글은 분명 오르페우스 박카코스이다. 오르페우스 박카코스는 일곱 개의 별로 플레이야데스(묘성)을 가르킨다. 이 별은 옛날에는 ‘오르페우스의 수금(7현금)’으로 불려졌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뿐 아니라, 오리온자리를 이루는 대 십자성을 뜻한다. 십자가 머리에 초승달이 그려져 있는데 초승달은 늘 기울었다가 늘 부푸는 달이다. 오르페우스교의 해석에 따르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구속자는 오르페우스(진정한 인간)라는 인간적 특징에서 볼 때, ‘최대한의 사랑을 통하여 자기를 궁극적으로 버리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오딘은 우주 못에 매달려 있어서 이그드라실(교수대에 매달린 사람의 말馬)이라고도 했고, 또는 늑대의 가죽을 쓴 사람으로 ‘울푸헤드나드’라고 했다. 두 마리의 까마귀 오딘-보단은 베르세르크르(곰의 가죽을 덮어쓴 전사들)라고 했다.
점성학적 천문학에서는 지구를 원 안에 십자가로 표시하는데 십자가의 상징은 여신 어머니이다. 또 다른 원통형 인장의 그림 속에서 두 나귀는 식물을 뜯어 먹는다. 그러나 표범과 사자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이 교훈 역시 ‘자기를 잡아먹는 힘’이다. 늘 죽고 늘 사는 신, 모든 존재의 실재들은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잡아먹히는 동시에 잡아먹는다. 자기를 무화시키는 개인은 필멸적 부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원형과 다시 결합해야만 한다.
독자들은 라스코동굴에 그려진 소살해의 그림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어리둥절 할 수도 있다. ‘소’는 ‘미르’로서 ‘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용은 뱀과 같다. 즉 소=용= 뱀인 것이다.
▲ 프라멜의 뱀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자, 주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시어,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 2,8) 이처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인간에 있는 미묘한 신경계마다 이름이 있는데 신경에 중요한 것이 프라나 야마인데 이것은 호흡의 조절을 의미한다. 신경계 가운데의 7개의 중심이 있는 데 이것을 척추를 중심으로있고 수숨나라고 불린다. 양쪽으로 측면신경이 있고 ‘이다’라고 부르는데 음 및 달의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즉 늘 죽고 소생하는 의식은 만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뱀은 다시태어나기위하여 허물을 벗는다. 또 하나의 신경계는 '핑갈라'라고 부르는데 태양의식을 상징한다. 태양은 죽지 않는다. 이 중심들을 산스크리트어로 챠크라라고 부른다. 물라다라는 몸의 기저부인 항문과 생식기 사이에 있다. 요가의 기본자세는 물라반다사나, 곧 속박의 자세로서 근본을 묶는 것이다. 즉 이곳은 흰 뱀인 영사(쿤탈리니)가 있는 곳이다. 이 뱀은 성적인 힘을 상징한다.
성적인 억압이 계속되면 인간은 어떤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문명이 나타나며 이것이 승화라는 것이다. 뱀은 아래로서부터 위로 상승하여 차크라를 차례로 거치게 되는데 이것을 뱀이 들어 올려짐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들어올려진 뱀은 쿤탈리니의 변성과 관련된다.
▲ 뱀(쿤탈리니)의 상승, 가장 상위의 제7차크라에 독수리의 날개가 그려져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았습니다.
이 부분은 어느정도 이해가 되며, 결국 삼태극에서 말하는 신선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치솟아 올라 하늘로 가려는 염원, 그것들의 무수한 상징에 지나지 않습니다. 뱀은 물이고 물은 여성 그리고 여성은 마고로 대표되고 마고는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상징하고, 생명의 원초적 기운을 또한 물의 성질로 대표되는 뱀으로 묘사하고...잠들어 있는 뱀(氣=神)을 깨워서 활성화 시켜 하늘로 오르게 한다는 사상... 모두 우리 문화에서 나간 곁가지 들입니다. 특히 부도지의 '八呂之音'에서 말입니다. 진동=파동=주파수=소리=기=에너지=팔려지음 으로 귀결됩니다. 요즘은 인간의 유전자까지 파동유전자라고 하여,
유전자 디엔에이에 다른 파동주파수를 쏘아 전혀 다른 개체로도 변형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우주정보...사람의 뇌는 단지 우주도서관에 있는 정보를 수신하는 수신기 또는 송신기...결국 우주는 하나...결국...이 우주만물은 팔려지음의 진동=소리로 이루어졌다. 하나다... 누가 자기개발을 잘하여 즉 일신강충 성통광명해서 신과 교신할 수 있느냐 일것입니다. 즉 잃어버린 팔여지음의 주파수대로 다시 빨대를 꽂고 사는냐가 관건이지요. 이것이 해혹복본입니다. 대표적인 팔려지음에 가까운 소리를 인도에서는 옴마니밧메옴이라고 하고 증산도는 태을주를 선전광고합니다.
저는 우리가 엄마 자궁에 있을때 들었던 '음' 곧 팔려지'음'을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걍 소리내면 됩니다. 고르고 길게..그러면 님이 무수한 상상속에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풀리는 단서가 될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서 통할때 즉 성통광명할때 밖에서 들어온 '정보'들과도 통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 정보를 알려 드립니다. 프랑스의 파리대학, 유명한 지진연구소에서 말하기를 지진계가 못 잡아내는 소리=진동=울림이 없답니다. 아주 미세한 진동=소리까지 잡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원인을 알 수 없는 마치 지구속의 불덩어리가 솟구치는 듯한 끊임없이 파도치는 소리가 근본적으로 지진계에 기본적으로 감지가 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우주삼라만상의 근본 기본 울림인 부도지에서 말하는 우주삼라만상이 이 '음'에서 나왔다는 '팔려지음'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우리의 생체진동의 주파수가 맞을때 우리는 신인이 된다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위 쿤달리니 그림의 7샘 중, 맨 위 정수리 단계(사하스라라)에 그려져 있는 것은 '독수리 날개'가 아니라, '만개한 꽃=천개의 꽃잎=사하스라라'를 의미합니다. 해탈=득도한 것을 '꽃이 활짝 핀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이구,, 게시글도 좋고 댓글도 좋고... 황홀합니다.
수고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