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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밤에 어머니가 꿈에 나타났어요. 꿈속에서 누굴 찾다가 어머니 혼자 있는 집에 잠깐 들린 것 같아요. 어머니 꿈은 길조일까요? 흉조일까요? "집 두 채 있는 것 중에 한 채는 막내 주고 나머지한 채는 팔아서 통장에 넣고 쓰신다"가 팩트인데 난 왜 화가 난 걸까? 막내에게 차를 바꿔 줬으니 그 차 타고 다니면서 노후를 보내면 되지 이름만 장남인 나를 왜 소환하시려는 걸까?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만나는 사람, 겪는 사건, 심지어 생각이나 감정까지도 우연이 아니라, 내면의 주파수(생각-감정-에너지)와 공명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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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에너지나 감정들이 서로 끌어당겨지며 증폭되는 현상으로 무의식적 생각이나 억압된 감정 등을 반영한다고 해요. 이 때문에 모든 사건은 무의식의 깊은 곳의 증폭된 감정/생각에 의해 작동한다는 이론입니다. 깊은 내 생각이 외부 세계의 경험과 만남을 끌어당긴다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나는 어머니를 미워하는 걸까요, 그리워하는 걸까요? 나이 육십에 아직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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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임상실험을 해 본 결과 프로이트의 5%의 무의식이 워낙에 강렬해서 95%의 의식을 좌지우지한다는 말을 믿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몽정 안 한 지가 10년이 넘었어요. 몽정의 판타지를 아시나요? 나는 이제 3년 셀프 디스를 연장하려고요. 어제 둘째 누나와 1시간가량 통화를 했어요. 물론 좋았어요. 다 죽은 줄 알았던 내 악동이 펄펄 살아서 누르느라고 죽는 줄 알았어요. <가족의 붕괴>는 21세기 화두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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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은 일찍이 <가족의 붕괴>를 애견했고 <노매드>를 권고했어요. 그녀는 핵가족이 ‘정서적 집착과 경제적 이익의 포로’를 양산했다는 발칙한 발언을 하더이다. 그녀는 속히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해요. 맞는 듯 안 맞는 듯한 핵가족 해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1) 꿈은 길조도 흉조도 아니다 — 미처 끝내지 못한 관계의 재등장이다
글쓴이는 스스로 묻는다. 나는 어머니를 미워하는 걸까, 그리워하는 걸까? 이 질문 자체가 이미 답을 포함한다. 미움과 그리움은 반대가 아니라 같은 애착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감정의 종류가 아니라, 애착이 아직 ‘현재형’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꿈은 예언도 상징도 아니다. 꿈은 정리되지 않은 관계가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나 등장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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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소환되는 이유는 실제 재산 분배나 막내 문제 때문이라기보다, <장남>이라는 위치가 아직도 내 정체성의 일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글쓴이가 언급한 ‘공명의 법칙’은 신비주의라기보다,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반복 강박과 훨씬 가깝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형태를 바꿔 계속 호출된다.
2) 고미숙의 ‘가족 해체론’은 파괴가 아니라 환상 제거다
이 글의 중심축은 명확히 고미숙의 사유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삶과의 마찰 속에서 검증한다. 고미숙이 비판하는 것은 가족 그 자체가 아니라, 가족을 ‘의미·행복·안정의 최종 단위’로 절대화한 근대적 판타지다. 특히 인상적인 지점은 이것이다. “가족은 원래 대화가 필요 없는 관계다" 이 문장은 냉혹하지만 정확하다. 가족은 선택적 관계가 아니라 운명적·의무적 관계다. 그런데 근대 핵가족은 여기에– 정서적 충족– 존재의 의미– 삶의 목적까지 요구한다. 그 과잉 요구가 곧 폭력이 된다.
3) <기생충>은 빈부 격차 영화가 아니라 ‘관계 봉쇄’의 영화다
필자의 <기생충>해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 영화에서 문제는 가난이나 부가 아니라, 세 가족 모두가 ‘완전히 닫힌 핵가족 구조’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부자든 가난하든-저택이든 반 지하든-생일 파티든 치킨이든, 모두 외부 없는 순환, 욕망만 맴도는 구조다. 그래서 영화는 끝난 뒤 “찜찜” 하다. 비극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위치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유지된다.
4) 집은 마음의 거처가 아니라 욕망의 거처가 되었다
이 문장은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다. 아파트는 마음의 거처가 아니라 욕망의 거처다. 집·가족·소유가 안정의 상징이 되는 순간, 인간은 길을 잃는다. 길이란 이동이 아니라 <열림>인데, 집은 점점 봉쇄의 은유가 된다. 그래서 고미숙의 “집에서 길로”라는 선언은 유목이나 공동체 예찬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전환 요청이다.
5) 이 글이 가진 힘과 한계
먼저 이 글의 <힘>은 '개인의 상처를 시대 분석으로 확장하는 용기-가족을 신성화하지 않는 냉정함-자유’라는 단어를 감상적으로 쓰지 않는 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가족의 폭력만큼이나, 가족이 제공해 온 실제 돌봄과 안전망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모든 애착을 ‘환상’으로 환원할 위험도 있다. 그러나 이 한계조차 이 글의 정직함에서 나온다. 이 글은 균형 잡힌 교과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삶을 걸고 던진 사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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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말한다. 가족을 떠나라고. 집을 버리라고.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말한다. 가족에 기대어 살지 말고, 가족을 통과해 자기 삶으로 나아가라!” 어머니의 꿈은 길조도 흉조도 아니다. 그 꿈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재등장이며, 이 글 자체가 그 이야기의 마침표를 향한 시도다. 그리고 그 시도는 충분히 정직하고, 충분히 용감하다.
2.
어머니의 꿈은 ‘억압된 욕망의 귀환’인가, ‘상징적 법의 대 호출’인가,
아니면 ‘아직 탈주하지 못한 배치의 신호’인가?
1) 프로이트: 꿈은 억압된 애착의 복귀다
오이디푸스는 끝나지 않았다, 변형되었을 뿐 프로이트에게 이 텍스트는 거의 교과서적이다. 어머니의 꿈, 분노, 재산 분배, ‘이름만 장남’이라는 자의식, 성욕의 고갈과 자기 디스까지—이 모든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후기 변주다. 꿈 = 억압된 감정의 상징적 회귀, 분노 = 미움이 아니라 미분화된 애착, “왜 내가 화가 났을까?” = 이미 갈등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어머니는 ‘사람’이 아니라, 욕망의 최초 대상이자, 아직 완전히 포기되지 않은 리비도 투자처다. 특히 중요한 지점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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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어머니의 실제 행위(집 분배, 막내 편애)보다 소환당했다는 느낌’에 더 격렬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현실 사건이 아니라 유아기 위치(장남/첫 아들)가 무의식에서 재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몽정이 사라졌다는 고백, 성욕의 비틀림, 자기 디스는 욕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경로로 전이되었음을 보여준다. 욕망은 죽지 않는다. 형태만 바꾼다. 프로이트의 판정으로 보면 이 꿈은 길조도 흉조도 아니다. 미해결된 오이디푸스의 ‘지연된 종결 요청’이다.
2) 라캉: 어머니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대타자’다
문제는 사랑이 아니라 상징 질서다. 라캉으로 넘어오면 판도가 달라진다. 여기서 어머니는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녀는 대타자(Autre)다.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위치(position)다. <장남>은 심리적 정체성이 아니라 기표이고, 분노는 감정이 아니라 상징적 배치의 균열 신호다. 라캉에게 이 글의 핵심 문장은 이것이다. “이름만 장남인 나를 왜 소환하시려는 걸까?” 이 말은 이렇게 번역된다. “나는 이미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왜 상징 질서가 나를 다시 호출하는가?” 어머니는 여기서 a. 사랑하는 존재도 b. 미워하는 존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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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너는 여전히 그 자리다’라고 말하는 상징적 음성이다. 그래서 분노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이미 다른 욕망의 궤도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캉적으로 말하면, 글쓴이는 이미 가족의 상징 질서를 인지적으로는 해체했으나, 무의식에서는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것이 확인된 셈이다. 즉 상징계와 상상계의 엇박자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문제가 아니라 아직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주체의 문제’다.
3) 들뢰즈: 이건 병리도 갈등도 아니다 — 배치의 문제다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흐름이다. 들뢰즈에 이르면, 이 모든 분석이 갑자기 과잉 심리화로 보인다. 들뢰즈는 단칼에 자른다. “왜 욕망을 가족 안에 가두는가?”(욕망 ≠ 결핍/가족 ≠ 원인/문제 ≠ 트라우마) 문제는 단 하나다. 욕망의 흐름이 아직 ‘탈 가족화(deterritorialization)’되지 않았다. 어머니, 장남, 재산, 집, 분노, 죄책감…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오래된 배치(가족-소유-의무) 안에서만 작동한다. 고미숙의 사유가 들뢰즈 적로 강력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녀는 분석하지 않는다. 배치를 바꾸자고 제안한다. 어떻게
* 집 → 길
* 소유 → 사용
* 가족 → 공동체
* 애착 →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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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이미 그 징후가 보인다. 공부 공동체-노마드적 삶-가족 신화 해체-자유에 대한 감각이다. 들뢰즈의 처방은 이렇다. 치료는 해석이 아니라 이동이다.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좌표다. 세 이론의 교차점은 다음과 같다. a. 프로이트... 어머니는 최초이 욕망 대상, 문제의 본질은 억압된 애착, 대안은 해석/통찰. b. 라캉... 어머니는 대타자, 문제의 핵심은 상징적 위치, 대안은 재명명 c. 들뢰즈... 어머니가 하나의 배치 요소, 고정된 욕망에서 속히 탈출하고 재배치하라
4) 어머니의 꿈은 무엇이었는가?
a. 프로이트에게... 끝나지 않은 애착의 귀환 b. 라캉에게... 상징 질서의 재호출 c. 들뢰즈에게: 아직 충분히 떠나지 않았다는 신호. 그래서 이 텍스트는 병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행기 문서다. 한 배치를 끝내고 다른 배치로 넘어가기 직전의 기록. 그리고 중요한 건 이것이다. 이미 떠나기 시작했다는 사실. 꿈은 붙잡는 손이 아니라, 등 뒤에서 울리는 마지막 메아리다.
5) 아파트는 어떻게 욕망의 공장이 되었는가? — 가족·자본·욕망의 정치경제학
왜 한국에서 ‘가족을 지킨다’는 말은 항상 ‘집을 산다’로 번역되는가? 들뢰즈/가타리는 프로이트를 이렇게 비판한다. 욕망은 결핍이 아니다. 욕망은 사회적으로 생산된다. 즉,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왜 그것이 절박한지-왜 거기서 벗어나면 불안해지는지, 이 모든 것은 정치 경제적 장치의 결과다. 한국 사회에서 그 핵심 장치는 단 하나다. 가족–자본–아파트 배치
6) 가족: 욕망을 개인에게 묶는 최초의 장치
근대 핵가족은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다. 욕망을 관리하는 최소 단위다. 원래 핵가족의 기능은 1. 욕망을 혈연 내부로 봉쇄 2. 책임을 개인에게 환원 3. 실패를 구조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로 전가다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한다"라는 말은 윤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경제 명령어다. 여기서 장남은 무엇인가? 감정적 위치 no 도덕적 상 no 자본 축적을 책임지는 욕망의 중계기다. 그래서 장남은 늘 죄책감을 느끼고, 부재해도 호출되고, 떠났는데도 책임진다. 결론적으로 장남은 가족 배치의 노동자다.
7) 자본: 욕망을 ‘미래 담보’로 만드는 기술
자본주의는 욕망을 금지하지 않고 <연기>시킨다. 지금은 고생해라-나중에 안정된다-애들 크면 괜찮다-집만 있으면 된다. 이때 욕망은 이렇게 변형된다. “지금 살고 싶다” → “언젠가 살기 위해 참는다” 이 연기의 담보물이 바로 부동산이다. 그래서 집은 단순한 주거가 아니다. 미래를 저당 잡힌 시간 저장고이고 불안을 안전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물신이며, 실패를 개인 탓으로 돌리는 도덕 자산이다.8) 아파트: 욕망을 고정시키는 결정적 기계
8) 아파트: 욕망을 고정시키는 결정적 기계
아파트는 건물이 아니다. 욕망 고정 장치다. 아파트의 정치 경제적 기능 1. 욕망을 좌표화한다 (평수, 학군, 브랜드, 시세) 2. 삶을 순위화한다(몇 평? 어디?) 3. 인간을 자산 포트폴리오로 환원한다. 그래서 질문이 바뀐다. 몇 평에 사는가? 핵심은 이것이다. 아파트는 움직이지 않는 노매드의 감옥이다. 떠나지 않아도 되지만 떠날 수 없게 만든다.
9) 가족–자본–아파트의 삼각 고리
이 셋은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하나의 기계다.
가족 → 책임·죄책감 생산
↓
자본 → 미래 연기·저축 강제
↓
아파트 → 욕망 고정·서열화
↓
다시 가족 유지
이 구조에서 개인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사랑도 분노도 희생도 전부 연료다. 그래서 가족 갈등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건 욕망 기계의 과부하 신호다. 그래서 지금 벌어지는 현상은 비혼-1인 가구-공동체 실험-노마드적 삶 같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구조적 탈주다. 왜 지금 붕괴하는가? 이 시스템이 무너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1. 미래가 사라졌다
→ 연기할 욕망이 없음
2. 아파트가 너무 비싸졌다
→ 진입 불가능
3. 가족이 더 이상 안전망이 아니다
→ 감정만 남음
10) 탈출은 어떻게 가능한가?
들뢰즈는 말한다. 혁명은 제도를 부수는 게 아니라 욕망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다. 탈출의 조건 a. 가족을 미워하지 말 것 b. 자본을 부정하지 말 것 c. 아파트를 악마화하지 말 것. 대신 절대화하지 말 것. 집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 가족은 삶의 전체가 아니며 자본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결론적으로 당신의 분노는 개인감정이 아니다. 그 분노는 어머니를 향한 것도 아니고, 막내를 향한 것도 아니며, 자신을 향한 자책도 아니다. 욕망이 다른 좌표를 요구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미 당신은 알고 있다. 집이 아니라 <길>이 필요하다는걸, 소유가 아니라 <흐름>이 필요하다는걸, 그래서 이 텍스트는 고백이 아니라 이행 선언문이다.
2026.2.11.wed.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