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은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과를 졸업했다. 당시의 학문 분류는 오늘날과 달라서, ‘지리박물’은 지리학·동물학·식물학·곤충학·지질학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학문 분과였다. 김교신의 친구인 이덕봉(1898-1987)은 광복 후 서울대와 고려대 교수를 지낸 식물학자다. 그는 1932년 김교신에게 독립 전도를 해보겠다는 선언문을 보내기도 했다.
〈일기〉 1932년 4월 17일. “주님의 은총이 친애하신 여러분께 넘치기를 비옵나이다.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믿음의 약함과 능력의 부족함을 깊이 깨달으면서도 감연히 일어나 중학생을 중심으로 독립 전도를 시작하려 합니다. … 저는 주님의 포로가 되어 4월 24일부터 매 주일 오후 2시에 중앙전도관 내에서 전도 설교를 시작합니다. 약하고 무능한 저를 위하여 간절한 기도로 도와주기를 비오며 겸하여 학생들에게 권하여 주기 바라옵니다. 1932년 4월 22일 이덕봉.”
이덕봉은 1932년 4월 24일부터 매주 종로 중앙전도관에서 중학생 상대로 전도활동을 했고, 후에 배화여자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2년 6월부터는 『성서조선』 정기구독자가 되었다. 이덕봉의 독립 전도가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광복 후 그의 활동으로 미루어 대체로 ‘학자의 삶’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교신과 전공이 같아 학문적으로도 교류했던 그는 김교신이 그 투철한 성격으로 박물학에 전념했다면 신앙적인 면 이상으로 한국 박물학계에 큰 공헌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식물학자로 크게 성공했을 인물을 기독교 때문에 놓치게 된 것이 아깝다는 말도 된다.
하지만 노평구는 이덕봉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른 의견을 피력한다. 김교신은 젊은 날 깊은 종교적 체험을 거친 후 신앙을 위해 학문을 희생했다는 것이다. 이덕봉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노평구는 이런 면에서 김교신을 기독교 신앙을 위해 수학자로서의 천재성을 포기한 파스칼과 견줄 수 있다고 말한다. 김교신과 파스칼, 두 사람 모두 신앙적 회심이 그렇게 삶을 바꿔놓았다는 해석이다. 노평구는 김교신이 “민족의 도덕적 신생을 위해 전공 학문을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보았다. 김교신은 “나의 무교회는 밑천이 너무 많이 든 것이라서 주위에서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교신이 청년기에 경험한 신앙 체험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때 확립된 인생관과 세계관을 평생 간직했다는 뜻이다.
노평구는 동양학자 류영모의 말을 종종 인용하곤 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인생의 세 토막을 내서 가운데 큰 토막은 쓸데없는 데 바치고, 그것도 늦게야 대가리와 꽁지 토막을 부둥켜 쥐고 무얼 해보려 하나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게 뻔하지 않으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평구는 이에 “실로 지당한 말씀이다”라고 류영모에게 공감하면서 “가운데 토막은 대체로 모든 사람이 돈이나 명예, 지위 등 세상의 욕망에 바치게 마련인데,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진실로 성공한 만족한 인생은 못 된다”라고 설명한다. 노평구는 인생의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방향과 목표란 이기적인 것, 낮은 것이어서는 우선 자신부터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인생을 파탄에 빠뜨려 넣는다. 그러므로 목표를 높은 곳, 자기를 위한 것 아닌 남을 위한 일에, 그리고 가치 있는 일, 정신적인 일, 도덕적인 일, 하나님의 뜻에 둬야 한다. 그때 이것이 우리 내면의 모든 선의와 사랑과 희생정신을 끌어내고 또 이를 성장시켜 우리의 인생과 일을 빛낼 것이며, 이것이 또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기쁨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까지 기쁨과 만족이 될 것이다.
노평구의 설명대로라면 김교신은 인생의 ‘머리 토막’부터 ‘가운데 토막’과 ‘꼬리 토막’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정신적인 일, 도덕적인 일, 하나님의 뜻’에 바친 인물이다. 김교신에 대한 이런 분석과 평가는 노평구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걸로 보인다. 노평구 본인도 20대 초반의 강렬한 종교적 경험을 기반으로 구십 평생을 일관했기 때문이다. 노평구는 김교신에게서 자기 내면을 본 것이다. 칼라일식으로 표현하면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 것’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