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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연
재림운동 후에 우치무라가 성서연구회에서 다룬 주제는 모세의 십계, 다니엘서, 욥기 등이었다. 모두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인간만의 자족적인 문명으로 치닫는 ‘근대인’을 다루면서,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는 문명이 어떤 말로를 맞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강의했다.
이어서 시작한 것이 로마서 강연이었다. 로마서의 중심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1장 17절)이라고 했듯이, 사람의 구원은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직 신앙 만에 의한다는 신앙 의인(義認)의 사상이었다. 로마서 첫 강의에서 우치무라는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우러러봄으로써 의롭게 여김을 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러러봄으로써 깨끗함을 받고, 재림하실 그분을 우러러봄으로써 영화롭게 된다. 어느 것 하나 자기의 공로, 행위, 선행, 노력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 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그가 이루신 공로로 말미암는다. 오직 그를 받아들이고 그를 신뢰하고 그를 우러러봄으로써 우리는 의롭게 여김을 받고, 깨끗함을 받고 또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 처음 출석한 것은 1921년 1월 16일이었는데, 공교롭게 이날부터 로마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로마서 강의는 1922년 10월 22일까지 모두 60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로마서 첫 강의에서 우치무라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우러러봄으로써 의롭게 여김을 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러러봄으로써 깨끗함을 받고, 재림하실 그분을 우러러봄으로써 영화롭게 된다. 어느 것 하나 자기의 공로, 행위, 선행, 노력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로마서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본대로 우치무라의 재림신앙 제창은 인간의 행위주의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었다. 자기의 공로나 행위나 선행이나 노력으로 의인이란 인정을 받는 게 아니고, 신앙에 의해 그것을 인정받는다는 사상이 전제된다.
믿음에 의해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사상이 세계사에 가져다준 큰 복음의 하나는 ‘차별의 타파’였다. 우치무라는 로마서 3장 22절을 강의하면서 율법주의, 행위주의와 대비되는 복음주의, 신앙주의를 천명했다.
전에는 유대 사람만이 택함을 입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것을 확신한 바리새 사람 사울도 그리스도에게 돌아온 후로는 국적의 차별은 헛된 것이기에 버렸다. 그러므로 국적의 차별 없이 사람은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국적의 차별만이 아니다.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고, 학자·무학자의 차별도 없고, 부자·가난한 자의 차별도 없다. 또한 의인과 죄인의 차별도 없고, 선인과 악인의 차별도 없다.
우치무라의 로마서 연속강연이 정점에 달한 건 8장 22절에 나오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안다”는 대목에서였다. 젊은 날의 우치무라는 『전도의 정신』(1894)에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서와 역사와 자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자연은 홋카이도의 대자연처럼 타락한 인간세계와는 대조적으로 아름답고 찬양받을만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로마서 강연 무렵에는 자연도 인간과 같은 타락한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자연을 썩어짐의 종으로 보는 바울의 자연관은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보통 사람은 자연을 아름다움이 가득 찬 것으로 보고 그에 비해 사람의 더러움을 탄식하며, 자연에서 영구불변을 보고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이것은 천박한 자연관이다. 자연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겉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한 단계 더 깊이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추악함, 혼란, 잔인, 투쟁으로 가득하다. 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숲속에서는 무서운 생존경쟁, 살벌한 약육강식이 자행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저보다 약한 것을 학대하고 저보다 강한 것에는 학대받는 비참한 상태다. … 참으로 자연계에서는 밤낮으로 괴로움의 부르짖음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해방과 자유를 원하고 있다.
자연은 허무한 데 매여있다. 자연계에 이런 불운이 임한 건 인류의 타락 때문이었다. 인간의 호전성, 이기적 욕심, 기업가의 탐욕이 석탄이나 석유 같은 지하자원을 남용하여 땅의 타락을 초래했다. 타락한 인류가 자연을 정복한다고 하면서 자연을 타락시켰다. 그러므로 자연계는 하나님 아들들의 영화와 함께 자신도 부활, 완성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구원을 갈구하는 건 인류뿐만이 아니라 자연도 마찬가지다. 우주에 있는 만물이 모두 고통의 신음을 내고 있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그것이 산고(産苦)의 신음이고 새로운 우주의 완성을 맞으려는 희망의 고뇌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우치무라와 김교신
식민지 청년 김교신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철심(鐵心)을 가지고 동해를 건넌 자”라고 일본행 당시의 심경을 술회한 바 있다. 조선을 짓밟은 일본에 대한 그의 생각은 한마디로 말하면 ‘적개심’이었다. 학문을 쌓아 입신하여 언젠가는 적국을 쓰러트리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가 청년 김교신의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끓어올랐던 청년 김교신의 눈에 우치무라의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국적(國賊)으로 전 국민의 비방 중에 매장된 지 반생여일(半生餘日)에 오히려 그 일본을 저버리지 못하는 애국자의 열혈(熱血), 이것이 무엇보다도 힘 있게 나를 끌었었다. 조선에 만일 그와 같은 애국자가 출현했다면 쏟아 바쳤을 경모(敬慕)의 염(念)을 전혀 저에게 봉정(奉呈)했다.”
김교신은 우치무라를 가리켜 ‘모발부터 발톱까지가 전부 참 애국자의 화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1921년 1월부터 7년 동안 우치무라 문하에서 신앙을 배웠다. 그는 우치무라를 기독교 신자인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기독교의 자주성을 주장한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로 이해하면서,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 조선을 구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식민지 청년으로서 침략국 일본의 애국자를 스승으로 삼는 데 대한 거부감 같은 건 김교신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김교신은 오히려 이를 송구스럽게 여겼다.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연은 강당의 600여 좌석도 번번이 부족하여 늦게 가면 좌석도 없고 목소리를 듣기도 쉽지 않았다. 김교신은 대개 반 시간 전부터 가서 앞줄 중앙에 자리를 잡고 강의 시작을 기다려 한마디도 허투루 흘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김교신은 강의 들을 욕심에 앞줄에 자리 잡고 듣고 있으면서도 예수의 말씀이 생각났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보내면서 “명하여 가라사대 외방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태 10:5-6)고 말했다. 또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를 다른 데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내심이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마태 15:24 이하)라고 했다.
일본의 애국자가 일본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온 힘과 정성을 기울이는 자리에 조선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김교신은 너무나 황송했다. 애국자에 대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앉고 있던 의자를 일본 청년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의자 다리 밑으로 들어가거나 천장에 구멍을 뚫고서라도 들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일본에는 우치무라 같은 진리에 입각한 애국자가 있는데, 조선에는 그런 애국자가 없다는 것도 아픔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김교신이 검열 등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성서조선』을 15년 동안 158호까지 발간한 배경에는, 우치무라가 일본에 바친 애국을 자기 조국인 조선에 대해 바치겠다는 결의가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우치무라가 자기 조국에 진리를 설파한 것처럼, 김교신 또한 조선에 진리를 전하고 싶었으리라. 조선인의 힘으로 조선인에게 진리를 전하겠다는 김교신 방식의 애국심이 이때부터 싹텄을 것이다.
우치무라의 1922년 10월 24일 일기에는, 그가 1921-22년 로마서 강연을 마친 뒤 강연을 들은 한 조선인 청년이 보내온 감상문 이야기가 나온다.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연을 들은 수강생은 7백 명이었는데, 강연을 끝내고 그에게 감사를 보내온 사람이 그중 네 명이었다고 했다.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조선인 김교신이었고, 그 한 명의 감상문이 우치무라의 마음을 제일 강하게 끌었다.
“우치무라 선생님, 60여 회에 달한 로마서 강의를 아무런 권태 없이 기쁨에서 기쁨 중에 배울 수 있었음을 기뻐합니다. 소생은 작년 1월을 시작으로 그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참석을 허락받았습니다만, 이제 오늘 ‘대관(大觀)’으로 천하의 대서(大書)에 대한 강의를 완료하셨습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행운의 기쁨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느껴 흘리는 눈물이 흘러내림을 깨닫고 부끄러웠습니다. 자녀들이라면 혹은 그 양친으로부터 넘치게 받은 노고에 대해 감사의 마음이 안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상 밑에서 자녀가 떨어뜨리는 찌꺼기를 바랐는데, 자녀들과 같은 빵을 받았을 때의 개로서야 어떻게 그것을 금할 수가 있겠습니까(마태 15.26 이하). 선생님, 전 국민의 박해와 참기 어려운 국적(國賊)이라는 비방 가운데서도 극동의 일각에 굳게 서서 십자가의 거룩한 깃발을 하늘 높이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감상문을 읽은 우치무라는 깊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다. “신앙의 일에서 전체적으로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위에 있다. 아마 나의 신앙이 조선인 중에 뿌리를 내려 세월이 지난 후 일본에 전해질 것이다. 소수의 조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성서연구회를 하는 보람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장차 나의 기독교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조선인 가운데 나오지 않을까”라고 종종 말했다고 한다.
함석헌은 1923년 봄 도쿄에 가서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1924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려 나섰던 어느 일요일, 한 해 전에 입학한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김교신의 소개로 성경연구회에 나가게 되었다. 함석헌이 처음 가던 날 우치무라는 예레미야를 강의하고 있었다. 애국심이 강한 우치무라는 “이것이 참말 애국이다” 하면서 신앙을 강조했다. 함석헌은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성경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확신이 생겼다. 참 믿음이 곧 애국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오랜 번민이 해소되면서 크리스천으로 서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훗날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1970)라는 글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함석헌의 우치무라에 대한 평가는 놀라울 정도다. 한민족이 36년간 일본제국으로 인해 봤던 피해를 우치무라 한 사람으로 충분히 갚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함석헌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자 평가다. 그래서 ‘적어도 내게는’이란 전제를 붙였다. 그 정도로 함석헌의 젊은 영혼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꿈에 본 스승
김교신의 스승에 대한 존경은 확고했다. 그에게 우치무라 간조는 둘도 없는(無二의) 스승이었다. ‘유일(唯一)의 선생’이었다. 김교신은 단언한다. “나는 선생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선생’이 없는 사람도 있다. 공자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앎)의 인물이다. 사도 바울은 선생을 모시지 않았음을 자랑했다. 공자는 성인이라 일컫고, 바울은 비길 데 없는 대사도(大使徒)였다.
김교신은 비범했던 공자, 바울과 달리 자신은 평범한 길을 걸었다고 말한다. 이점에서는 우치무라 역시 평범한 길을 걸었다. 김교신에게 선생이 있듯이 우치무라에게도 선생이 있었다. 미국에서 신앙을 지도받은 실리(Seelye) 선생이다. 우치무라와 김교신 둘 다 선생을 가진 사람이다.
김교신이 평생 우치무라를 얼마나 극진히 존경했는가 하는 것은, 〈일기〉에서 여러 차례 꿈에서 스승을 만났다고 기록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기〉 1933년 11월 18일. 간밤에 꿈에 우치무라 선생을 보다.
〈일기〉 1937년 10월 8일. 근래에 은사를 꿈에 보기 여러 차례. 곤란한 일을 당하거나, 영성이 다소 각성한 때에 종종 있는 현상.
〈일기〉 1937년 10월 13일. 어젯밤 꿈에 또 스승을 만나다. 환난이 새로 임하려 함인가 곤란이 해결되려 함인가. 어쨌든 단순한 믿음에 돌아서서 겨뤄야만 할 것은 명약관화.
〈일기〉 1939년 6월 4일. 간밤 꿈에 은사를 만나 뵙고 생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였다.
‘성서조선사건’으로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다음 날(1943년 3월 30일) 신앙 동지 가타야마 테츠((片山徹))에게 보낸 편지에도 스승 우치무라를 꿈에 만나 격려와 위로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소생 어제 29일 밤중에 주 예수 안에서 무사히 출감을 허락받았습니다. 함석헌, 송두용 두 분과 함께 일동 13인 영육 함께 버틸 수 있어 감사와 찬미 가운데 귀가했습니다. …
조선에 와 있는 우치무라 선생의 문하로 자칭하는 사람 가운데는 우치무라 선생의 가르침은 본토에서는 좋으나 조선에서는 부적합하다고 함부로 말하는 일본인이 있다고 듣습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요? 저는 지난 만 1년간의 옥중생활에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꿈에 우치무라 선생이 나타나 혹은 격려하고 깨우쳐주시고 혹은 위로로써 나를 지도해주셨습니다. 과연 지난 1년간은 우치무라 선생과 기거를 함께한 365일간이었습니다. 본토인을 살리는 진리가 조선에서 부적합하다는 이유를 저는 아직 발견할 수 없습니다.
『논어』 「술이(述而)」편에 보면, 공자는 만년에 “심하도다, 나의 노쇠함이여! 내가 다시 주공(周公)을 꿈속에서 뵙지 못한지도 오래되었도다(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라고 탄식한다. 주공은 공자보다 600년 전 사람이다. 주(周)나라의 이상 정치를 실현한 인물로 공자가 가장 존경하여 사숙(私淑)한 성인 중 하나다. 그 공자가 늙어서는 꿈에도 주공을 뵙지 못한다고 탄식했다는 것이다. 공자가 주공을 사모하던 모습에서 김교신의 스승에 대한 존경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19세기 영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리는 예언적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이 「시대의 징표」에서 한 다음의 말은, 진실한 두 인격이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다.
기독교는 인간 영혼의 신비로운 심연 속에서 발흥했으며, 그것의 확산은 어디까지나 말씀의 전파에 의해, 그리고 자연스럽고 소박한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기독교는 마치 ‘신성한 불꽃’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마침내 모든 사람이 그 불꽃에 의해 정화되고 빛을 받게 되었다.
진실한 인격이 그리스도를 만나 그 영혼이 ‘신성한 불꽃’에 의해 정화되고 빛을 받게 된다. 그에게 흘러 들어간 신성한 불꽃은 다시 이웃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어 둘 사이에는 존경과 사랑의 인격적 관계가 성립한다.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관계가 이런 것이었다.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두 인격의 만남이었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영웅과 추종자의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례를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라고 언급했지만, 무교회 그룹에서의 선생과 제자 관계도 그에 버금가는 관계로 볼 수 있다. 농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질적으로 같다.
무교회 기독교의 사제 관계는 일반 제도권 교육과 차이가 있다. 학교 간판을 보고 입학해 이미 구성된 교사진 중에서 담임 배정 등을 통해 ‘우연히’ 교사와 학생 관계가 정해지는 제도권 교육과 달리, 무교회에서의 사제 관계는 제도권 바깥에서 선생의 신앙과 인품과 언행을 제자가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선생에게 다가감으로써 인격적 교감을 나누게 된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도 이런 식이었다. 김교신과 우치무라의 관계도 그랬다. 둘 사이에 맺어진 사제 관계는 평생을 지속한다. 아니,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한 관계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