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호기심
학문의 기본 태도는 지적 호기심이다. 김교신은 기독교 신앙과 호기심의 관계가 밀접하다고 말한다. 우주와 역사를 교회로 받아들이는 ‘전적 기독교’ 무교회주의는 모든 사물과 학문에 호기심을 가진다.
기독교 신앙에 사는 자의 한가지 특색은 범백사에 흥미진진하여 끝없는 취미를 자아내어 달큼한 생활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일이다. …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한 자에게 무미건조한 학문이 무엇일까. 수학인가. 증명함이 없어도 자명한 공리(公理) 있음을 배울 때 증명할 수 없어도 영원부터 영원까지 실재자이신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 약동하지 않던가. … 수(數)의 정확함이여, 이(理)의 무궁함이여! 외국어가 무미한가. 단지 상용어, 학술어로만 공부하려면 무미할 것이다. 그러나 한 민족, 한 나라의 언어와 문학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백성에게 나타난 기록이다. …
지리학이 건조한가. 모세의 출애굽, 리빙스턴의 탐험지,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명을 바쳐 싸워 흑인 노예의 고향, 간디의 수련지, 슈바이처 박사의 전도 활동 지역으로 볼 때 아프리카 대륙 같은 암흑대륙, 사막 대륙도 우리의 100%의 흥미를 돋우니 그 밖의 대륙의 흥미야 말해 무엇하랴. 복음의 생명을 속에 두고 역사를 읽으라, 『논어』를 음미하라. 과연 새로운 의미로써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이다.
‘복음의 생명을 속에 두고’ 역사를 읽고 『논어』를 음미하고 학문을 연구하라고 한다. 김교신이 무교회주의를 ‘전적 기독교’라고 부른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수학, 외국어, 지리학, 역사학, 나아가 『논어』 공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흥미로운 공부 주제다. ‘한 나라의 언어와 문학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백성에게 나타난 기록’이라는 말에서는 그의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를 추구한 김교신답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말이다. 중일전쟁 발발 후 모국어로 수업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얼마나 분노하고 괴로워했을까.
그뿐인가. 기독교 신자는 ‘본래 겸손이 저들의 생명이요, 겸허하여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참으로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는 서적에서 배울 뿐만 아니라 무식한 농부와 노파에게서도 배울 것을 발견하며 능히 배우는 겸허한 사람이다. 선진국에서 배울뿐더러 후진국에서도 배울 점을 발견하며, ‘대(大) 선생에게서 배울뿐더러 아랫사람에게 배우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김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 본연의 자태’다. 그러나 조선 기독교의 현실은 매우 달랐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 기독교도들의 실상은 어떠한가. 저들은 교파가 다르면 벌써 배울 일이 없고 가르칠 인연이 없지 않은가. 화석화된 법규에 따라 구속하고 약자의 억압에나 유효한 노회, 총회, 연회 등의 결의(決議)로써 인형(人形)의 춤을 추면서 완미하고 고루함(頑迷固陋)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결코 기독교 본연의 자태가 아니다. 독실한 신자일수록 고집불통에 빠지는 이가 많다. 우리는 아직 자연스러운 인간으로 남아있어 배울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성장할 여유 있는 겸허한 살림을 하는 것이 소원이다. 바라건대 동맥경화증보다 더 두려운 병, 우리 심령의 경화를 면케 하여 끝까지 연하고 부드러운 심령, 배우고 자랄 수 있는 청년으로 두어 주소서.
교파주의에 매몰된 교회주의자들의 고집불통 심성은 성장을 멈춘 화석과도 같다. 동맥경화증에 걸린 늙은 정신이다. 교회주의자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교회교(Churchianity)다. ‘기독교 본연의 자태’와는 거리가 멀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전적 기독교’이자 ‘예수의 종교’였다. 그러므로 청년의 정신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청년의 종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