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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5). 김교신이 조선 반도의 지리적 성격을 밝히려 한 동기를 잘 드러낸 성경 구절이다. 학생들에게 ‘나를 분명히 알아가는 것이 인생의 근본’이라고 가르쳤던 김교신의 인생철학이 전공 영역에서 실현된 것이 「조선지리소고」다. ‘조선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의 기치를 내건 그의 무교회주의 기독교에 가장 잘 부합하는 주제 선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교신이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을 극찬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무교회주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는 고려 통일 이후 약 1천 년간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에 국한하여 전개되었다. 반도가 역사 무대였다는 지리적 조건은 한국사를 지배한 법칙을 발견하려 한 많은 사람에 의해 주목되었는데, 많은 연구자는 이 조건이 대체로 한국 역사에 불행의 굴레를 씌운 것이라고 여겼다. 중국과 같이 대륙을 차지하지 못할진대 차라리 일본과 같은 섬나라였던들 그토록 거센 이민족의 압력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고,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천하의 주인공임을 자처한 일도 없고,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天子)임을 자랑해본 일도 없는 반도 국가였다. 그러므로 역사의 주연 못 되는 조연(助演), 사대주의적 경향은 한국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른바 ‘반도적 성격론’이다. 비극적인 숙명론이다.
일제의 지배 아래 조장된 민족적인 열등감으로 조선인은 쉽사리 이런 숙명론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런 주장에 가장 열을 올린 것은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 등 일부 일본인 학자였다. 그에 따르면, 반도라는 자연환경에서 오는 특성인 부수성(附隨性), 주변성(周邊性)은 찬란한 역사 세계의 건설이 아니라, 가늘고 길게 겨우겨우 이어지는 역사를 형성했다. 또한 중국, 만주·몽골, 일본 등과 인접해 있다는 조건으로 인해 반도는 항상 그들의 압박에 시달렸다. 그 결과 조선은 중국의 전례주의적(전禮主義的)·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지배와 만주·몽골의 정복주의적(征服主義的)·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 지배, 그리고 끝으로 일본의 포옹주의적(抱擁主義的)·주정주의적(主情主義的)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제 일본의 온정적(溫情的)인 지배를 받음으로써 조선은 반도의 성격을 지양(止揚)할 때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역사는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자율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당파성·의뢰성(依賴性)·뇌동성(雷同性)·숙명론 등으로 표현되는 한국 민족성의 여러 특징도 여기에 그 근원이 있다는 것이다.
반도적 성격론은 반도가 대륙과 해양의 중간 지점에 있는 ‘완성되지 않은 지역’이므로 그 공동체 성원들의 성격도 ‘미성숙’하다는 이론이다. 반도적 성격론은 조선의 역사가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특히 대륙과 해양에 있는 외세의 영향에 의해 수동적으로 변화해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도 국가인 조선은 대륙의 중국과 해양의 일본의 영향 아래 ‘타율적인 숙명’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에 반해 섬나라 일본은 문화적인 장점을 축적할 수 있는 공간이라 하는 등, 대체로 반도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는 입지에 놓여 있다고 간주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사이비 이론이다.
반도적 성격론은 지정학, 그중에서도 환경결정론의 기초 위에 서 있었다. 이는 역사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지리적 조건과 환경에 있다는 이론이다. 지리적 조건에 따라 그곳에 자리 잡은 공동체의 기본 성격이 판가름 난다고 생각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지리적 여건은 변경할 수 없기에, 조선사는 시종일관 타율적인 숙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구미(歐美)의 지정학에서 환경결정론의 경향이 강해진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였다. 그 핵심에는 자연적 특성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지정학에서 국가는 유기체적 존재였다. 따라서 환경결정론의 시각을 따를 경우, 국가의 흥망성쇠는 그 나라가 처한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지리적 위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환경결정론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팽창과 나치 독일 침략 전쟁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일본에는 그러한 흐름이 1925년 이후 독일로부터 유입되었다. 초창기에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나, 팽창주의 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상황이 변했다. 일본이 더욱 넓은 영토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지정학적으로 뒷받침되었고, 특히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에서 반도적 성격론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반도적 성격론의 목적은 분명하다. 한국의 자주성을 말살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반도에 자리 잡은 조선은 자력으로 독립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일제의 지배는 정당화되었다. 조선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주체적으로 나라를 경영할 수 없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지리적 숙명이었다. 환경결정론은 제국주의·전체주의 국가의 대외 침탈을 합리화하는 시의적절한 이론이었고, 그것은 지구 반대편 일제 군국주의와의 만남을 통해 반도적 성격론이라는 사생아를 낳은 셈이다.
33살 청년 지리학자 김교신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한 ‘반도적 성격론’에 강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환경결정론의 시각이 일본에 도입되기 시작한 1925년은 김교신의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과 학생 시절과 겹친다. 그리고 김교신이 「조선지리소고」를 발표한 시기는 만주사변 발발 3년이 지난 시점인 1934년이다. 환경결정론을 빙자한 일제의 대외 침탈이 가시화되던 시기였다. 누구보다도 과학과 합리성을 존중하는 청년 지리학자 김교신은 조선이 반도 국가라는 숙명 때문에 외세의 영향에 의한 수동성을 면할 수 없다는 ‘반도적 성격론’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조상의 묫자리에 따라 후손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풍수지리설과 다를 바 없는 미신적 사고의 결과물이었다. 김교신이 도쿄고등사범 2학년 진급 시 지리박물과로 전과한 이유 중 하나도 풍수지리의 비과학성에서 벗어나려는 의욕 때문이 아니었던가. ‘정체성에 대한 무교회주의적 성찰’에 ‘투철한 과학 정신’이 더해진 것이다. 이것이 「조선지리소고」의 집필 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