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는 복음 신앙에 투철한 독립 전도자였을 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예언자이기도 했다. 《성서연구》 1948년 11월호에 기고한 〈재화(災禍)의 원인〉에서 그는 예언자 아모스를 인용하면서 ‘여수·순천 사건’에서 자행된 이승만 정부의 학살 만행을 질타했다.
공의와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말에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3:6)라는 말이 있습니다. … 그들의 죽음은 우리를 대신함이며, 그들의 부르짖음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함이며, 여수·순천의 넘어짐은 민족의 패망을 경고함이라. 왜 국회는 국회대로 통회함이 없는가! 국회는 책임이 없던가! 왜 정부는 정부대로 눈물로써 사과함이 없는가!
‘여수·순천의 넘어짐’이란 ‘여수·순천 10·19사건’을 말한다. 1948년 10월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들은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 38선을 철폐하고 조국 통일을 이루자”라는 명분으로 제주 4·3사태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순천 등지까지 무력 점거를 확산시켰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뒤 순천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전라남도 일대를 점령했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 뒤, 5개 연대를 투입해 여순 지역 탈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진압 과정 중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희생당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반대 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을 제도화해 강력한 극우 반공 국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 맹목적 반공주의의 핵심이 이승만을 비롯한 극우 기독교 세력이었다. 《성서연구》 1949년 1월호 〈잡감록〉에는 여순사건의 주역인 극우 반공 기독교 세력에 대한 질타가 다시 나온다.
조선의 기독교는 그 경망한 태도를 돌이켜 세례 요한의 설교부터 다시 듣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진실한 인간수업이다. 복음의 진주는 개, 돼지에게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여수 사건’의 주동적인 인물들이 대개가 기독교인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보면 이 사건도 과거 복음의 싸구려를 부른 기독교에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서운 일이다. 즉 조선 기독교에는 구약의 뿌리가 없다. 도덕적 심판에 절체절명 두려워 떠는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문은 열리는 것이다.
“조선 기독교에는 구약의 뿌리가 없다”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노평구는 《성서연구》에 구약 예언서를 연재하기로 한다. 그는 1949년부터 《성서연구》에 구약의 예언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1949년 8월호부터 연재한 〈예언자 아모스〉였다. 우치무라 간조가 일본의 예언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1898년 창간한 《도쿄독립잡지(東京獨立雜誌)》 창간호에 주필로서 쓴 글에서 〈아모스〉 3장 8절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를 인용하면서 외쳤던 일을 떠올린다. 노평구는 아모스를 시작으로, 구약의 예언자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을 다룬 글을 기고했다.
그러나 노평구는 자신의 글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노평구 생존 시 직접 들은 말이다. 해방 정국에서 한국 사회를 위해 구약 예언서를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루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집안에 닥친 화재 때문에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다고 했다. 1948년 4월 20일 노평구 가족은 간장 공장 2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아래층 간장 공장에서 작업 중 기름을 끓이다가 일꾼의 부주의로 발화”한 것이다. 노평구는 한밤중에 발생한 화재를 피해 2층에서 뛰어내리다 다리가 골절되었고, 그가 일본에서 10년 동안 공부하면서 모았던 성경 참고서와 강의 노트 등은 모조리 불타버렸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무교회 신앙 동지들이 너도나도 참고서를 모아 노평구에게 전달했지만, 자료의 완전 복구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노평구는 그 뒤에도 일관해서 한국 사회의 모순과 비리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5.16쿠데타 이후 등장한 군사정권, 박정희 정권에서 이루어진 월남파병 등에 대해 신랄하기 그지없는 비판을 퍼부었다. 한국사학자 이기백은 노평구의 예언 정신을 이렇게 말한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월남파병을 이렇게 격렬하게 비판한 글이 당시에 있었는지 어떤지를 알지 못하겠다. 독자가 겨우 4, 5백 정도의 개인잡지에 게재된 것이니 망정이지, 일반교양 잡지에 이 같은 글이 실렸더라면 그대로 넘어갔을 성싶지 않다. 외국에 파병하는 것을 반대한 주장은 레바논 파병의 경우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평소 노평구는 ‘정치적 목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게 가장 사악한 짓’이라고 말하곤 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김대중, 김영삼의 양김(兩金)이 분열했을 때 노평구의 선택은 김대중이었다.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김영삼은 김대중보다 나이가 어리니 다음 기회가 있다. 둘째 핍박받고 억압받는 호남에 대한 동정심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강조한 것이다.
1990년대 민주 정부 수립 이후 이북 출신 기독교 지식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과거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많은 고통을 당했으면서도, 갑자기 독재정권의 후예들을 지지하는 노선으로 ‘변절’한 것이다. 역사학자 김동길과 철학자 김형석 등이 대표적이다. ‘레드콤플렉스’에 눈이 멀어 균형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경우다. 여순사건의 학살자였던 이승만의 극우 반공 기독교로 퇴행한 것이다. 평생 초지일관했던 노평구의 삶과 크게 대비되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