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선생소천 20주년 기념강연회 발표문 (2023년 9월 16일)
일시: 2023. 9. 16(토). 14:00-17:00
장소: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 4층 소망실(서울 종로구 연지동 135)
흔들리던 청춘
태어나 한 번도 교회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논어』를 사랑한 것 말고는 종교에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20살 늦가을에 기독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기독교의 때’가 안 묻은 상태에서 낯선 세계에 들어가니 혼란 그 자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의심 많은 ‘도마’에 공감한다. ‘문화 충격’이었다. 종교적 고민에 빠졌다. 절박했지만 의논할 사람이 없으니 책을 찾았다. 이때부터 ‘세상 친구 다 버리고’ 종로와 청계천 일대 서점들을 순례하는 일상이 꽤 길게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2가 ‘종로서적’ 2층에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났다. 『기독교문답』,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 『구안록』 등이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했다. 긴 터널 끝에 빛이 보였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서 길을 찾았다. 그러다 문득 연전에 선배의 하숙집에서 본 무교회 잡지 『성서연구』가 떠올랐다.
잡지를 여러 서점에서 찾았지만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울 시청 옆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에 갔다. 2층에 국회도서관이 있었다. 검정 옻칠한 계단 난간을 짚고 오르던 촉감이 지금도 느껴진다. 『성서연구』를 찾는다고 경비원에게 말했더니 여기는 외부 대출 불가란다. 대출이 안 되면 표지라도 보여달라고 사정했다. 젊은 애가 딱해 보였던지 기다리라 하고 책을 찾으러 서고에 갔다. 그때 거절당했으면 노 선생과의 만남이 어긋날 수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책과 도서관은 내 인생의 핵심 요인이다.
『성서연구』 뒤표지에 적힌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동 353-34’ 주소를 옮겨적고, 길 건너 광화문우체국에 가서 구독료와 구독신청서를 봉투에 넣어 부쳤다. 2월 말이었다. 며칠 후 잡지가 배송되었다. 잡지 뒷면의 집회 광고를 보고 3월 9일 일요일 오후 2시 YMCA 2층 성서집회에 처음 참석했다. 노 선생님을 처음 뵌 날이다. 그날은 마침 나의 22살 생일날이었다.
김교신 선생의 1937년 5월 27일 자 ‘일기’에 노평구 선생(1912.1.16~2003.9.8.)이 나온다.
도쿄 소식. “일전에 쓰카모토 선생을 찾으니 조선인 노 아무개라는 청년이 자기 집회에 오는데 도무지 진실하기 짝이 없다고 보증하며 칭찬하기에 일단 만나기를 원했는데, 마침 지난 23일 집회 후에 만나보니 바로 노평구 형이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면직당하며, 예수 믿는 일을 배우면 학비를 안 주시겠다는 엄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으면 죽고 망하니 믿어야 하겠다고, 오직 믿는 일에만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몇몇 영혼을 지닌 조선도 아직 멸망하지는 않는 줄 알고 감사와 환희에 좁은 가슴이 터질 듯합니다.”
김 선생의 지인이 도쿄에서 보낸 편지다. 짧은 글에 노 선생에 대한 다각적인 평가가 나온다. 고향의 한의사 부친이 의대에 진학하면 학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영혼을 살리는 의사’가 되겠다며 도움을 뿌리치고 고학(苦學)을 택한 선생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진실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동의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진실한 분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마태 5.8)이라는 말씀은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 앞에서도 “내 생각이 틀렸어”라고 말할 줄 아는 분이다. 스펀지 같은 유연성을 가진 분이다. ‘내게는’ 그런 분이었다.
노 선생과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내 인생은 노 선생을 만나기 전과 후로 갈라진다. 이 만남으로 중세를 빠져나와 르네상스에 진입했다. 에커만에게 괴테가 있었다면, 내겐 노평구 선생이 있었다. 나중에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발달이론’ 5단계인 ‘정체성 위기’를 내가 이 무렵 통과했음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