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보다 ‘고전’
1976년 설악산 여름 집회 때였다. 휘영청 보름달이 밝게 비추는 설악초등학교 운동장에 둥글게 앉아 각자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젊은 대학생들을 의식한 말씀이었다. “흔히 젊은이들이 신앙에 몰두하다 보면 전공은 집어치우고 성경만 파고드는데 이래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라고 경계하셨다. 40살까지는 인생을 경험하고 그 후에 종교를 시작하라고 하셨다. 전공 분야에서 최소 박사학위를 따고 학문에 끝장을 낸 다음에 성경 공부를 시작해야 볼만한 것이 나온다고 했다. 집회 마지막 날 감화회에서 참석자들은 많은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감화회를 마감하면서 선생이 던진 한마디가 인상적이었다. “이 자리에서 말로 표현하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더 큰 느낌을 받은 것 아니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에 주목하는 분이었다. 마음의 중심을 보는 분이었다.
선생은 기독교 신앙을 배우는데 ‘신학’보다 ‘고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무교회 진영의 중요한 특징이다. 고전에서는 ‘삶으로 체현된 인격’을 배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전독서회를 열어주셨다. 1950년대 잠깐 하다 중단된 것을 임세영·장문강 등 대학생 3명이 들어오면서 다시 시작하셨다. 우리는 선생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매주 일요일 성서 집회 파한 후 청계천 7가의 석진우 선생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단테 『신곡』, 밀턴 『실낙원』 등을 읽었다. 영문학자 고병려 교수 댁에서 히브리어를 익히게 하셨다. 임세영 교수와 나는 한동안 오류동 장문강 선생 집에서 희랍어를 배우기도 했다.
이 무렵 나는 우치무라의 『종교와 문학』, 『시인 휘트먼』 등에 흠뻑 빠져있었다. 영문학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종교와 문학』은 19세기 영미 문인들을 주로 다뤘지만, 방점은 칼라일에게 찍혀 있었다. 책은 책으로 이어지고, 다시 사람으로 이어진다. 우치무라를 통해 무교회 선구자 칼라일을 알았고, 『영웅숭배론』과 『의상철학』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두 책은 2003년과 2008년에 한국연구재단 지원으로 내 손으로 직접 번역까지 했으니 인연이 꽤 깊다.
우치무라는 무교회 진영의 고전 목록을 수립했다. 김교신·노평구 선생도 무교회 고전의 열렬한 독자였다. 노 선생은 평소 영미문학이 신앙적으로 위대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 영향으로 선생께 대학원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면 어떻겠는가 여쭤본 적도 있다. 그러나 선생의 답변은 단호한 “노!”였다. “역사학이 얼마나 좋은 학문인데 그걸 바꾸려 하느냐”라고 꾸중하셨다.
선생의 충고를 따랐지만, 전공 울타리 안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무교회 학문’을 해야겠다고 작심했다. 밀턴을 공부 주제로 잡았다. 역사학자들은 밀턴에 관심이 없기에 논문 발표는 전부 영문학회에서 했다. 그런데 영문학자들은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 역사학·영문학 양쪽에서 도토리 신세였다. 하지만 울타리에 갇히지 않은 아웃사이더의 삶도 나쁘지 않았다. 단기필마(單騎匹馬)의 자유로움 덕분에 종교·문학·역사를 아우르는 학제적 학문(Interdisciplinary Studies)을 할 수 있었고, 그 열매로 『아레오파기티카』(1999, 2016)와 『밀턴평전』(2008)을 출간했다. 『아레오파기티카』는 루터·칼뱅의 종교개혁이 완성형이 아니며, 제2·제3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창한 종교개혁 문서다. 밀턴 산문의 최고봉인 이 책은 밀턴이 무교회주의의 선구자임을 잘 보여준다.
밀턴을 공부할수록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그의 신앙과 조국애가 놀라웠다. 밀턴에게서 김교신이 보였다. 밀턴이 무교회의 고전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각국의 밀턴 연구 동향도 알게 됐는데, 일본에서는 우치무라와 야나이하라가 밀턴을 일본에 처음 소개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었다. 나 역시 한국 사회에 밀턴을 알리고 싶었다. 밀턴 탄생 400주년을 목표로 10년을 준비해 2008년 『밀턴평전』을 출간했다. 무교회 선구자 밀턴을 추모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나 홀로 400주년 헌정 행사였다. 단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과 보람이다.
『밀턴평전』을 쓰면서 『김교신평전』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 아니 『밀턴평전』은 『김교신평전』을 쓰기 위한 준비운동이었다. 밀턴·우치무라·김교신·노평구 선생에겐 흥미로운 공통점이 보인다. 단독자의 신앙, 정체성에 대한 고민, 동포에 대한 연민, 조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긍지와 책임이다. 무교회주의의 핵심 가치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