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모교 복학은 불가능했다. 해방 후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혔던 학생들은 시일이 지나면 재입학이나 복학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 그런 기회마저도 주지 않았다. 학업의 길이 막힌 그는 1932년부터 두어 명의 친구들과 함께 마포 도화동 산동네에서 빈민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교육활동에 종사했다. 스무 살 나이였다. 그는 이 무렵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고 했다. 가르치던 한 여자아이가 병으로 앓다 죽게 되었는데, 죽기 직전 그 아이가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노평구 선생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소원을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평구는 마침 출타 중이어서 안타깝게도 아이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런 말을 들려줄 때도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노평구는 결국 교육사업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한글을 깨친 아이들이 남을 속이거나 도둑질을 하는 모습을 본 그는, 교육만으로는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절감했다고 한다.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이 무렵 ‘자의식(自意識)이 깨면서’ 인생 문제로 고민했다. 《노평구전집》 권말에 있는 저자 약력에도 ‘자의식’이란 말이 나온다. 그는 이 말의 뜻을 직접 설명한 적이 있다. ‘자의식’이란 바로 ‘기독교적 죄의식’이었다. 그는 젊은 날 죄짓는 게 두려워서 거리에서도 여성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 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노평구는 교육활동을 하면서 1주일에 한두 번 시내에 들어갈 때마다 종로의 서점에 들렀다. 1933년경 그는 우연히 파란색 표지의 《성서조선》을 발견한다. 내면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서광이 비쳤다. 이렇게 틈날 때마다 《성서연구》를 읽은 지 1, 2년이 지났다. 어느 늦은 봄날 밤 노평구는 “니고데모와도 같이 양정고보(養正高普) 숙직실로 향했다.” 1935년 봄의 일이었다. 노평구와 대화를 나눈 김교신은 가정에서 양정 담임 반 학생 몇 명을 대상으로 열리고 있는 성서연구회에 출석해도 좋다고 권했다.
이리하여 나는 새로운 희망으로 그다음 주일 활인동(活人洞) 선생 댁을 찾았다. 흰 두루마기에 짚신을 신으신 선생께서 직접 대문을 열고 나를 맞아주셨다. 그때의 인상이 아직도 나의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때 실로 참 조선 사람을, 아니 조선 그 자체에 접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장 한복을 갖춰 입고 대문에서 학생들을 맞이하는 김교신을 상상해보라. 노평구는 김교신과의 이 대면에서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진정한 조선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날 김교신의 성서 강의를 처음 듣고 난 후 노평구의 영혼은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한 강한 충격을 받았다.
전날 조선 사람과 조선을 선생에게서 봤던 나는 그날 또한 선생의 성서 강의를 통하여 참 신앙, 참 기독교, 교회 아닌 참 교회를 발견하고 이에 접하였다. 나의 감사와 만족은 차고 넘쳤었다. 그날부터 성서와 조선, 무교회와 조선, 이 둘이 또한 나의 생애를 바칠 대상이, 아니 실로 나의 애인이 된 것이다.
노평구의 확고한 생애 목표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김교신과의 첫 만남에서 참 조선 사람을 발견했고, 두 번째 만남에서 참 기독교를 발견했다. 그것이 23살 청년 노평구의 인생을 영구히 바꿔버린 것이다. 스승의 진실한 영혼에 점화된 젊은이의 영혼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김교신의 권유에 따라 일본에 가서 10년간 성경 공부를 하게 된다.
노평구는 만년에 접어들어 김교신과의 첫 만남에 관한 말을 자주 꺼내곤 했다. 아득한 젊은 시절 스승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에 그만큼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리는 예언적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이 〈시대의 징표〉라는 글에서 한 다음의 말은, 진실한 두 인격이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다.
기독교는 인간 영혼의 신비로운 심연 속에서 발흥했으며, 그것의 확산은 어디까지나 말씀의 전파에 의해, 그리고 자연스럽고 소박한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기독교는 마치 ‘신성한 불꽃’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마침내 모든 사람이 그 불꽃에 의해 정화되고 빛을 받게 되었다.
진실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만나 그 영혼이 ‘신성한 불꽃’에 의해 정화되고 빛을 받게 된다. 그에게 흘러 들어간 신성한 불꽃은 다시 이웃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어 둘 사이에는 존경과 사랑의 인격적 관계가 성립한다.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관계, 김교신과 노평구의 관계가 이런 것이었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영웅과 추종자의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례를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라고 언급했지만, 무교회 그룹에서의 선생과 제자 관계도 그에 버금가는 관계로 볼 수 있다. 농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