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이 스승 우치무라 간조에게 압도적 존경을 바쳤듯이, 노평구도 스승 김교신에게 지극한 존경을 바쳤다. 무교회 기독교의 스승-제자 관계는 일반 제도권 교육과 차이가 있다. 학교 간판을 보고 입학해 이미 구성된 교사진 중에서 ‘우연히’ 교사와 학생 관계가 정해지는 제도권 교육과 달리, 무교회에서의 스승-제자 관계는 제도권 바깥에서 선생의 신앙과 인품과 언행을 제자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선생에게 다가감으로써 인격적 교감을 나누게 된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도 이런 식이 아니었던가.
김교신과 우치무라의 관계도 그랬다. 둘 사이에 맺어진 사제관계는 평생을 지속한다. 아니, 생사를 뛰어넘어 영원한 관계로 이어진다. 김교신이 스승 우치무라를 얼마나 극진히 존경했는가 하는 것은, 《일보》와 《일기》에서 김교신이 꿈에서 스승을 만났다고 기록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33년 11월 18일. 간밤에 꿈에 우치무라 선생을 보다.
‘성서조선사건’으로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이튿날(1943년 3월 30일) 일본의 신앙 동지 가타야마 테츠(片山撤)에게 보낸 편지에 스승을 꿈에 만나 격려와 위로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스승을 흠모하는 심정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저는 지난 만 1년간의 옥중생활에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꿈에 우치무라 선생이 나타나 혹은 격려하고 깨우쳐주시고 혹은 위로로써 나를 지도해 주셨습니다. 과연 지난 1년간은 우치무라 선생과 기거를 함께한 365일이었습니다.
우치무라에 대한 김교신의 존경, 김교신에 대한 노평구의 존경은 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김교신전집》은 노평구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빚어낸 결과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성서조선사건’으로 일제에 압수되어 사라진 《성서조선》 158권 전질을 어렵사리 확보해, 일일이 원고지에 손으로 필사해가면서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 세월을 바쳐 전집을 완간했다. 한국 사회에 김교신이란 이름이 이만큼이라도 알려진 게 노평구가 편집·출간한 《김교신전집》 덕분이라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노평구는 ‘인생 3단계’를 생선에 비유해서 말한 적이 있다. 인생도 생선처럼 ‘머리와 몸통과 꼬리’로 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이 머리와 몸통을 다 날려버리고 꼬리만 붙들고 후회한다는 것이다. 노평구는 50대 초반에서 60대 중반까지 인생에서 가장 원숙하고 활동적인 시기,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시간, 생선으로 치면 몸통에 해당하는 시기를 고스란히 바쳐 스승의 전집을 출간하는데 바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