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는 학문적 진실 앞에서 진지했다. 이따금 사석에서 교육 이야기를 하다가 ‘대학물을 먹으면 머리에 때가 좀 벗겨지거든.’ 하고 말하곤 했다. 무지와 독선에 사로잡힌 무지렁이 기독교 신자들의 행태가, 폭넓은 독서를 통한 ‘교양의 세례’(‘대학물’)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의식한 지적이다. 한국 교회의 ‘무지몽매’에 대한 개탄이다.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대학생들의 학문 탐구를 적극적으로 격려하곤 했다. 특히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의 전공을 철저히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인간을 모르면서 어떻게 신을 알 수 있느냐”고 누누이 강조하곤 했다. 세상의 상식과 학문에 무지한 사람이 어떻게 신의 계시를 입에 담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신앙 진리와 별개로 학문의 진리가 분명히 존재하며, 제대로 된 신앙을 갖기 위해서라도 학문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노평구는 일본에서 대학 교육을 받는 대신, 쓰카모토 토라지, 야나이하라 다다오 등 일본 무교회 2세대 지도자들의 문하에서 성경 공부와 독서를 병행했다. 고향의 부친이 의대에 진학하면 학비 일체를 다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특유의 고집과 신념으로 주경야독하면서 오직 성경 공부와 독서에 매진했다. 형식적 학위만 없었다 뿐이지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일생 독자적으로 정신운동을 전개했다. 폭넓은 독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월간지 《성서연구》를 무려 500호까지 간행했고, 《노평구전집》 17권을 간행했다. 석학으로 불리는 인문학자 가운데도 이런 업적을 낸 인물은 흔치 않다.
그의 독서는 대단히 폭넓었다. 유심히 봐야 할 대목은, 그의 독서 취향이 ‘19세기적 교양’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는 호메로스, 플라톤, 단테, 밀턴 등 고대와 중세의 다양한 고전을 섭렵했고 또 그 고전들을 중심으로 청년들과 함께 고전 독서회를 진행한 바도 있다. 하지만 그의 정신세계에서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비중을 점했던 것은, 역시 칸트, 피히테, 헤겔, 칼라일, 에머슨, 휘트먼, 롱펠로, 키르케고르, 괴테 등 19세기적인 교양이었다.
《김교신전집》을 읽은 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러한 독서 취향은 노평구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김교신에게서도 분명히 나타나며, 그 근원을 소급해 올라가면 결국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 이르고 만다. 우치무라에 의해 발견된 ‘19세기적 교양’은 무교회주의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우치무라 간조-김교신-노평구’에게는 각별한 지적·사상적 전통과 독서 취향이 관류하고 있다. 노평구가 평소 교회 사람들이 선호하는 ‘신학’을 기피하고 ‘기독교 고전’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신학에 함몰된 교회 사람들이 무교회 신앙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노평구가 즐겨 읽은 19세기 사상가들은 계몽사상의 반(反)종교적, 반(反)기독교적인 물질주의의 패러다임을 공격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서양 사상사에서는 계몽주의에 대한 이런 반격을 ‘18세기에 대한 반란’(Revolt against the Eighteenth Century)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