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회주의적 문제의식
내가 무교회의 고전 몇 권을 번역하고 몇 권의 저서를 낸 건 전적으로 우치무라·노평구·김교신 선생 덕분이다. 이분들 영향으로 무교회주의적 문제의식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공부의 방향성이 분명해졌고, 학부 시절부터 무교회 학문을 하기로 결심했다. 종교·문학·역사를 아우르면서 저술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평생 교수는 부업이고 저술과 번역이 나의 본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나의 직업 정체성은 ‘저술가(writer)’다.
저술에 전념하기로 한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책으로 팔자를 고쳤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우치무라·노평구·김교신 선생을 만났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밀턴과 칼라일을 만났기 때문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은 내게 미사여구(美辭麗句)가 아니라 ‘인생의 사실’이다. 남이야 뭐라건 책은 내게 ‘영혼의 별’이다. 김교신 선생은 칼라일을 인용해 ‘서책의 집합이 현대의 진정한 대학’이라고 했다. 칼라일은 『의상철학』에서 교회는 ‘옷’이고 신앙은 ‘몸’이라고 비유했다. 칼라일과 김교신 선생에게 제도로서의 대학은 ‘옷’이고, 책은 대학의 ‘몸’이었다. 옷보다 몸이 귀하고 교회보다 신앙이 귀하듯이, 대학보다 책이 귀하다. 따라서 독서하지 않는 대졸자는 고졸 독서가보다 못하다.
밀턴의 책 사랑도 대단하다. 서양의 대학 도서관 담벼락에서 그의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신의 형상인 이성적 창조물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책을 파괴하는 자는 이성 그 자체를 죽이는 것이며, 말하자면 눈앞에 있는 신의 형상을 죽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땅에 짐이 되어 삽니다. 그러나 좋은 책은 위대한 영혼의 고귀한 생혈입니다. 책은 한 생명이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을 불멸의 보물로 고이 간직합니다.” --『아레오파기티카』
책에는 저자의 영혼이 간직되어 있다는 말이다. 학생 시절 서울역 뒤 인쇄 골목에서 선생의 잡지와 책을 교정하다가 출판에 눈을 떴다. 임세영, 장문강 선생과 함께 다방 구석에 앉아 하루 종일 몇 잔씩 차를 마시며 교정을 봤다. 요즘 유행하는 ‘카공족’의 선구였다. 조판·인쇄·교정 등 출판 실무의 전 과정을 선생 곁에서 익혔다. 선생은 한국 사회에 계몽이 필요하다며 기회 닿는 대로 신문·잡지에 적극 글을 쓰라고 내게 권하셨다. 그리고 “자네는 사상성이 있어”라고 격려하시며, “글을 쓴다면 『사상계』나 『신동아』에 기고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다. 무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보편의 세계’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네 축구’ 말고 ‘프로 축구’를 뛰라는 뜻이다. 선생 자신도 『사상계』에 기고하시곤 했다. 영어 ‘education(교육)’은 학생의 개성과 가능성을 끌어낸다는 뜻이다. 선생은 방황하던 청춘을 잡아주고 내면의 가능성을 끌어내 준 위대한 교사였다. 적어도 내겐 그런 분이었다.
부키 판 『김교신전집』(2001) 복간도 선생 곁에서 출판에 눈을 뜬 덕분에 가능했다. 내 책 『구약성서읽기』(개정판 『성서를 읽다』)를 출간한 부키출판사 박윤우 사장이 대전까지 찾아와 출판기획 아이디어를 구하기에 『김교신전집』 복간을 추천했다. 주문 제작한 1970년대의 『김교신전집』은 절판되어 돈 주고도 사볼 수 없었다. 주문 제작방식은 밀턴이 말한 ‘사상의 자유시장’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누구나 서점에서 돈 주고 살 수 있어야 ‘진정한 책’이다. 부키 판 『김교신전집』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복간을 기획할 땐 전혀 생각조차 못 했는데, 2001년 출간하고 보니 ‘김교신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게 뭐지?’하고 무척 신기했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작용하는 것만 같았다. 『전집』 출간 이후에는 부키 박 사장에게 홍순명 선생 글을 많이 받아내 책으로 출간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그 결과 몇 권의 책이 나왔다. 홍 선생은 무교회 진영에서 드물게 ‘프로 축구’ 수준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분이다. 노 선생은 홍 선생을 두고 ‘보석이 진흙 속에 처박혀있다’라며 늘 안타까워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