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회의 보편주의
노 선생은 1990년대에 가끔 대전에 와서 하루씩 주무시고 가시곤 했다. 집에 개인 장서가 구비돼있는 걸 아시고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아침 일찍 시외전화를 주셨다. 잡지 원고 교정을 하시면서 인명, 지명, 연대 등 역사적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90년대 말 『노평구전집』 출간을 준비하실 무렵에도 아침 전화를 주셨다. 전집 제목을 『노평구 신앙문집』으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내 의견을 물으셨다. 외람되게도 나는 이때 단호히 반대했다. “선생님은 평생 기독교라는 울타리가 아니라 한국 사회와 민족 전체를 상대로 일하셨습니다. 『신앙문집』 아닌 『노평구전집』으로 해야 책의 의미를 온전히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묵묵히 들으시더니 “알았소” 하고 전화를 끊으셨는데, 나중에 보니 『노평구전집』으로 출간하셨다. 다행이었다. 내가 선생께 배운 무교회주의는 보편주의다. 전공이든 기독교든 울타리 안에 갇힌다면 무교회주의가 아니다. 심지어 무교회의 울타리도 벗어나야 한다. 노 선생의 삶은 보편주의를 지향했다. 김교신 선생도 『성서조선』 창간사에서 “기성 신자에게는 가지 말라”고 했다. 무교회의 희망은 울타리 밖에 있다고 본다.
책으로 인생이 바뀐 사람인지라 책에 대한 애정이 컸다.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7)와 『번역청을 설립하라』(유유, 2018), 그리고 2018년 초의 ‘번역청 국민청원’은 책에 대한 내 진심의 표출이다. 한국 사회의 지식 인프라가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독서를 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의식이다. 노 선생은 김교신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고 흠모해서, 보스웰의 『새뮤얼 존슨 전기』에 필적하는 『김교신평전』이 우리에게 있어야겠다고 누차 강조하셨다. 『새뮤얼 존슨 전기』는 선생이 젊은 날 일본에서 탐독한 책이다. 전기문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어 번역본이 없다.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의 지식 인프라가 100년 전 일본보다 못하다는 게 믿어지는가? 전공 울타리 안에 갇혀 논문 자료 읽는 게 독서의 전부인 사람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이다.
민족주의자를 자처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민족’은 혈연 공동체가 아니라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한국어 공동체’다. 노 선생은 평소 ‘사회를 향상하지 못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역설했다. 번역은 ‘한국어 공동체’의 콘텐츠를 업그레이드한다는 점에서 무교회 정신과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번역은 반역인가』에서도 이 책이 무교회적 문제의식에서 집필되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사실 무교회 학문은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선생이 1960년대에 출간했던 잡지 『진리와 독립』은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키르케고르,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등 기독교 고전에 관한 수준 높은 연구를 대중적으로 풀어 소개했다. 홍순명 선생도 필진 중 한 분이었다. 하지만 이 전통은 지금 완전히 단절되었다. 제대로 계승 발전된다면 무교회주의적 문제의식은 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무교회 학문, 무교회 사상, 무교회 자연과학, 무교회 인문학 등으로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김교신 선생이 「조선지리소고」에서 강조했듯이 ‘백성의 소질과 담력이 중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