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현대사의 예언자
김교신·노평구 선생의 중요한 공통점은 ‘역사 앞에서’ 살았다는 점이다. 김교신 선생이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지사적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듯이, 노 선생도 광복 후 20세기 후반 현대사를 ‘역사 앞에서’ 살았다. 선생은 복음 신앙에 투철한 독립전도자였을 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예언자이기도 했다. 복음과 예언을 겸비했다. 나도 선생의 권유로 소예언서를 공부했고, 그 열매로 『성서를 읽다』(유유, 2016)를 출간했다.
선생은 평소 ‘무교회의 야당성’을 강조했다. 『성서연구』 ‘권두문’을 보면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베트남전쟁, 박정희 유신독재, 전두환 5공 정권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음을 볼 수 있다. 『성서연구』 1948년 11월호 「재화(災禍)의 원인」에서 선생은 예언자 아모스를 인용하면서 ‘여수·순천 사건’에서 자행된 이승만 정부의 학살 만행을 질타했다.
공의와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말에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3:6)라는 말이 있습니다. … 그들의 죽음은 우리를 대신함이며, 그들의 부르짖음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함이며, 여수·순천의 넘어짐은 민족의 패망을 경고함이라. 왜 국회는 국회대로 통회함이 없는가! 국회는 책임이 없던가! 왜 정부는 정부대로 눈물로써 사과함이 없는가!
‘여수·순천의 넘어짐’이란 ‘여수·순천 10·19사건’을 말한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수시에 주둔 중이던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 출동 명령을 동족상잔이라 간주하고 거부했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 뒤 여순 지역 탈환에 성공했으나 진압 과정 중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이 자행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극우 반공 국가가 구축되었고, 이 맹목적 반공주의의 핵심에는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극우 기독교 세력이 있었다. 『성서연구』 1949년 1월호 「잡감록」에는 여순사건의 주역인 극우 반공 기독교에 대한 질타가 등장한다.
조선의 기독교는 그 경망한 태도를 돌이켜 세례 요한의 설교부터 다시 듣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진실한 인간수업이다. 복음의 진주는 개, 돼지에게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여수 사건’의 주동적인 인물들이 대개가 기독교인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보면 이 사건도 과거 복음의 싸구려를 부른 기독교에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서운 일이다. 즉 조선 기독교에는 구약의 뿌리가 없다. 도덕적 심판에 절체절명 두려워 떠는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문은 열리는 것이다.
‘복음의 싸구려’라고 했다. 영화 『밀양』의 ‘싸구려 복음’, ‘싸구려 은혜’다. 하나님 앞에 사는 체하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망각한 ‘개독교’의 현주소다. 선생은 인간을 경시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체하는 그들을 ‘개, 돼지’로 경멸했다. 선생은 한국기독교에 ‘구약의 뿌리’와 ‘예언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1949년부터 『성서연구』에 구약의 예언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1949년 8월호부터 연재한 「예언자 아모스」다. 우치무라 간조가 1898년 창간한 『도쿄독립잡지(東京獨立雜誌)』 ‘창간사’에서 아모스 3장 8절(“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을 인용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우치무라는 37살에, 노 선생은 36살에 각각 조국을 위한 예언자가 되었다. 선생은 아모스를 시작으로, 구약의 예언자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을 다룬 글을 잇달아 기고했다.
그러나 집필은 벽에 부닥쳤다. 선생께 직접 들은 말이다. 해방 정국에서 한국 사회를 위해 구약 예언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화재 때문에 어려웠다고 했다. 1948년 4월 20일 선생 가족은 간장 공장 2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아래층 간장 공장에서 작업 중 기름을 끓이다가 일꾼의 부주의로 발화’한 것이다. 선생은 한밤중에 발생한 화재를 피해 2층에서 뛰어내리다 다리가 골절되었고, 일본에서 10년 동안 공부하면서 모았던 성경 참고서와 강의 노트 등은 모두 불타버렸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신앙 동지들이 자료를 모아 전달했으나 완전 복구는 어림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 뒤에도 일관해서 한국 사회의 모순과 비리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5·16쿠데타 이후 등장한 군사정권, 박정희 정권에서 이루어진 월남파병 등에 대해 신랄하기 그지없는 독설을 퍼부었다. 한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노 선생의 예언 정신을 이렇게 말한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월남파병을 이렇게 격렬하게 비판한 글이 당시에 있었는지 어떤지를 알지 못하겠다. 독자가 겨우 4, 5백 정도의 개인잡지에 게재된 것이니 망정이지, 일반교양 잡지에 이 같은 글이 실렸더라면 그대로 넘어갔을 성싶지 않다. 외국에 파병하는 것을 반대한 주장은 레바논 파병의 경우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기백, 「종교와 도덕과 국가」 『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97호), 342쪽.
발행 부수가 적어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평소 노 선생은 ‘정치적 목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게 가장 사악한 짓’이라며 독재 권력에 분노했다. ‘핍박받는 백성에 대한 동정심이 있어야 사람’이라고 했다. 1990년대 민주 정부 수립 이후 이북 출신 기독교 지식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유신독재 시절 그 많은 고초를 당했으면서도, 갑자기 변절했다. 여순 학살자 이승만의 극우 반공 기독교로 퇴행했다. 평생 예언자 정신으로 초지일관했던 노평구 선생과 대조적이다. 일생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범을 보여준 선생의 일관된 모습에 감사한 마음이다.
글을 쓰다 보니 선생께 입은 은혜가 크다. 선생과의 만남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 하늘에서 허락하신다면 『밀턴평전』, 『김교신평전』에 이어 선생께도 책 한 권을 지어 바치고 싶다. 그날이 온다면 이 글은 그 책의 서문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