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룡 / 목사
용정에서 축구대회를 중앙일보주취로 열었다가 극장에서 강연을 했는데 세상에... 그렇게 웅변 잘하는 사람도 있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또 그러구 남자가 생김 생김이 보면... 그렇게 위대한 사람을 본 일이 없어서 야... 저런분이 앞으로 독립되고 나라를 맡아 줬으면 참 좋겠다.

여운혁 / 여운형의 육촌동생
그양반 연설하시는걸 보면은 그냥 청중을 사로잡습니다.
그냥 압도되고 끌려들어 갑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뭐... 어찌 연습해서 돼는것도 아니구
천성적으로 그런 기질을 타고 나신 분이죠.
‘돈 가지고 뿌리는향수는 역겹지만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땀 냄새는 참으로 구수하고’ 그러면서 이양반이 연설하는데...


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마지막발악을 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43년부터 23만명의 조선청년이 일제의 총알받이가 됐고 200만에 이르는 강제징용으로 조선인들의 희생이 극에달한 시기였다.


* ‘고려신사’ / 일본 히다키시

41년 이곳을 방문한 여운형의 흔적이 남아있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전향이 이어진 이시기
일제는 또다시 여운형을 초청했다.
중국과 화해를 위해 힘써달라는 요청이었다.
여운형은 이 요청을 거부했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의 참전등으로 악화일로를 겪는 일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다.


*고려신사 방명록 (1941년 6월)
그리고 그가 일본땅에 남기고 온 것은 힘있게 써내려간 4자의 한자.
‘혈농어수(血濃於水)’ - 피는 물도다 진하다.
그것은 조선독립에 대한 확신이자 의지였다.


*일제에 다녀온 뒤 일제패망에 대한 확신을 얻은 여운형은 요양을 핑계로 거처를 옮긴다.
여전히 일제의 보호관찰 1호였던 그에겐 일제의 감시가 뒤따랐지만 수많은 청년들이 그를 찾았다.


44년 10월
인근 용문산에서 13명의 청년이 여운형과 만났다.
경기북부지역을 대표한 청년들이 모여 ‘비밀결사단체 - 농민동맹’을 결성한 것이다.

여운혁(85) / 1944년 10월 농민동맹참여
몽양선생이 농촌청년들의 무쳐있는 그 힘을 결속시켜 가지고 일본전쟁에 항거하는 조직을 만들고자 하셨던 거죠.
그래가지구 인제... 고 세사람은 핵심적인 존재들이고 그 이외에는 전부 묻어둔 존재로써 조직을 해 나가구 해서 그 양반의 말씀에 의해 가지구 그렇게 시작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