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子百家 思想 槪論 金 國 會
Ⅰ. 春秋戰國時代와 諸子百家
1. 春秋戰國時代 諸 情況 春秋戰國時代1)는 정치적으로 혼란과 무질서가 난무하였던 격동의 시대였다. 宗法 封建制度2)를 지배근간으로 한 周왕실은 350여 년이 지난 뒤에는 國力의 약화로 인해 諸侯國에 대한 공제력(控制力)을 喪失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에 분봉된 제후국은 봉건적 지배의 구속과 한계를 박차고 표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3) 이 같은 현상은 봉건제도에 의탁한 주왕실과 제후간의 군신 관계가 필연적으로 붕괴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추세 속에서 新興의 列國은 主權․領土 우위경쟁을 통해 독립국가로 變貌․發展하면서 상호 竝立․抗爭하게 되었다.
政治的으로 春秋戰國時代는 西周時代의 封建制度가 해체되고, 秦․漢 황제 아래에서의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되어 가는 과도적 시대였다. 그래도 春秋時代는 西周 이래의 諸侯國이 100여 개나 존속하고 있어서 尊周攘夷의 전통적 기풍이 강하였으나, 戰國時代에 들어와서는 弱肉强食의 힘의 논리에 의해 秦․楚․燕․齊․韓․魏․趙의 이른바 戰國七雄이 성립하였다. 각국의 군주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광대한 영역을 통치할 관료기구를 정비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서방의 秦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하여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천하통일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정치변화의 원인으로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들 수 있는데, 춘추시대 말에는 이미 철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牛耕이 시작되었으며, 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되어 경지면적이 증대하였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의 소금․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소금이나 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布錢, 小刀의 형을 이룬 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은 사회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또한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기회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몰락한 귀족의 자손을 비롯하여 상공업자나 농민들도 입신출세하기 위하여 군주나 유력 인사에게 접근하여 법률․군사․외교 등 각자 재질에 따라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속출하였다. 군주나 유력 관료측에서도 부국강병을 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온 망명자도 등용하였다.
2. 諸子百家의 登場 諸子百家란, 중국 春秋戰國時代(B.C. 5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으로, 諸子는 제 선생이란 뜻이고, 百家란 수많은 학파를 의미한다.
諸子百家 또는 百家爭鳴이라는 말처럼,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思想史上 드물게 그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周王朝의 家族制가 崩壞되어, 혈연의 일족에게 수호되어오던 領主가, 농민과 경지를 확보하여 실력을 지니고 있는 新興 地主階層에게 권력을 빼앗겨 가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대는 도리어 實力 本位의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有能한 人才의 發興을 촉구하였다. 諸子百家의 대부분은 그러한 상황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수십 대의 수레를 이어놓고 諸侯에게 遊說한 孟子와 같은 대규모 집단으로부터, 형제가 농구를 메고 유랑하는 자까지 그 생태는 가지가지였다.
이러한 다양한 思想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 기반을 조성한 것이 稷下之學4)이었다. 戰國時代에는 각국의 유력한 王侯들이 많은 학자와 遊說家들을 고용하여 文運이 크게 일었으며, 이에 따라 諸子百家의 장관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전국 七雄의 하나인 제나라에서는 威王과 宣王 때부터 襄王 때에 걸쳐서(B.C. 4세기 중엽~B.C. 3세기 중엽), 때로는 수백 명에 이르는 諸子가 모여들어 서로 論陳을 폈기 때문에, 그 당시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들이 토론하던 곳이 직문 옆의 學宮이었으므로 稷下之學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곳에는 孟子를 비롯하여 騶衍․순우곤․愼到․전변․騶奭 등 각국의 선비들이 출입하였으며, 모두 上大夫의 녹을 받았다고 한다. 또 荀卿도 직하지학의 長老였다.
『漢書』의「藝文志」에는, 그 제자의 파별을 儒家․道家․陰陽家․法家․名家․墨家․縱橫家․雜家․農家․小說家로 나누어 10가로 분류하였다.
孔子․孟子․순자 등의 儒家는 孝悌․仁義․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商鞅․韓非子와 같은 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富國强兵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 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皆農主義를 주장하는 農家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老子․莊子 등의 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思想활동도 진․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내면적으로는 법치주의의 기초 확립과 표면적으로는 유가의 인의정치가 정통사상의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역사 이면에 諸子百家의 思想은 連綿히 이어져왔다.
Ⅱ. 儒家 儒家5)는 孔子를 開祖로 하여 발전해 온 중국의 대표적 철학사상이라 하겠다. ○思想的 淵源 孔 仁 -- 春秋時代 (周의 統一王權 失墜--> 復禮) 天命=周(道德) / 論敵 : 老莊 孟 義 -- 戰國時代 統一論理 (混亂의 深化--> 本善에 基礎한 德治 天命=行王道. 民本思想 -革命論(易位.易姓革命) / 論敵 : 楊墨 分業論--勞心者와 勞力者, 士:無恒産而有恒心者, 民:無恒産而無恒心者 荀 禮 -- 戰國時代 統治論理 (混亂의 深化--> 本善을 否定한 禮治) 天命道德 天觀 脫皮->機械.自然.科學的 天, 天人之分 / 論敵 : 老莊, 楊墨, 孟子, 名家 등 統治 執權者의 인정 후 統治 論理化: 禮治論-禮敎主義 法 法術勢 -- 法家思想引起의 傾向: 禮樂刑政-->刑名法術
孔子는 春秋時代를 거치면서 周의 宗法制度가 解體된 현실에서 復禮를 주장하였고, 孟子는 전국시대에서 주를 중심으로 한 종법제도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周가 아니더라도 어떤 나라든지 王道를 실현할 수 있는 主體가 곧 천하 종주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革命論을 주장하였고, 荀子는 실질적으로 힘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현실에 중점을 두고, 통일된 체제의 통치술로 禮制를 주장하였던 것은 아닌가? 孔․孟이 각각이 처한 시대의 가장 현실적인 고민에서 출발하였듯이, 荀子의 예치주의는 道德天命의 淵源이 아닌 後王의 禮法으로 실질적인 당시체제를 감당하기 위한 새 논리로 이해한다면? 法家는 다시 그러한 荀子의 理論을 진,한 통일 왕조 통치기반으로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드러낸 그의 주장이 法治를 주장하였다고 본다면, 荀子의 禮治는 곧 다음 시대의 요청에 따라 입각한 法家(漢代 統治道具로서의 儒家)의 基礎가 되었던 것이다.
1. 孔子와 儒家
孔子(魯 襄公 22年B.C. 551~哀公 16年B.C. 479)가 태어난 춘추시대는 周나라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제후들이 무력을 바탕으로 천자를 넘보는 정치적․사회적 혼란기이며 변혁기였다.6) 孔子는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禮와 樂의 조화로 잘 통치되었던 周代의 名實相符한 正名에 의한 문물제도를 되살리는 克己復禮의 仁에서 찾으려 하였다.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臣臣父父子子 ꡔ論語ꡕ 「顔淵」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ꡔ論語ꡕ 「顔淵」
2. 孟子(B.C. 372?~B.C. 289?) 戰國時代의 유교 사상가로, 孟軻이며, 자는 子輿 또는 子車라고 한다.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쪼우셴현[鄒縣]에 있었던 趨에서 출생하였고, 孔子의 손자인 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孟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富國强兵이나 외교적 策謀였으나, 孟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고 한다. 『孟子』 7편은 孟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孟子의 思想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孟子의 思想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문장은 문답을 위주로 한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孟子의 思想은 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性善說, 그리고 이에 입각한 王道政治論으로 나누어진다. 孔子의 인 思想에서 전승한 差別愛的 仁을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仁愛의 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仁愛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義의 덕을 주창하였다.
公都子曰 告子曰 性 無善無不善也 或曰性可以爲善 可以爲不善 是故 文武興則民 好善 幽厲興則民 好暴 或曰有性善 有性不善 是故以堯爲君而有象 以瞽瞍爲父而有舜 以紂爲兄之子 且以爲君而有微子啓王子比干 今曰性善 然則彼皆非與 孟子曰 乃若其情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也 若夫爲不善 非才之罪也 惻隱之心 人皆有之 羞惡之心 人皆有之 恭敬之心 人皆有之 是非之心 人皆有之 惻隱之心仁也 羞惡之心義也 恭敬之心禮也 是非之心智也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故曰求則得之 舍則失之 ꡔ孟子ꡕ「告子」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 何先 曰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 何先 曰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ꡔ論語ꡕ 「顔淵」
孟子曰 不信仁賢則國空虛 無禮義則上下亂 無政事則財用不足 孟子曰 不仁而得國者有之矣 不仁而得天下未之有也 ꡔ孟子ꡕ 「盡心」
今王發政施仁 使天下仕者 皆欲立於王之朝 耕者皆欲耕於王之野 商賈皆欲藏於王之市 行旅 皆欲出於王之塗 天下之欲疾其君者皆欲赴愬於王 其若是孰能禦之… 曰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 放辟邪侈 無不爲已 及陷於罪然後 從而刑之 是罔民也 焉有仁人在位 罔民而可爲也 是故明君制民之産 必使仰足以事父母 俯足以畜妻子 樂歲終身飽 凶年免於死亡然後 驅而之善 故民之從之也輕 今也制民之産 仰不足以事父母 俯不足以畜妻子 樂歲終身苦 凶年不免於死亡 此惟救死而恐不贍 奚暇治禮義哉 ꡔ孟子ꡕ 「梁惠王」
3. 荀子(B.C. 298?~B.C. 238?)와 그의 思想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로, 성은 荀이요, 이름은 況이며, 趙나라 사람이고, 荀卿․孫卿子 등으로 존칭된다. 『史記』에 전하는 그의 전기는 정확성이 없으나, 50세(일설에는 15세) 무렵에 齊나라에 遊學하고, 秦나라와 조나라에 遊說하였다. 제나라의 王建(재위 B.C. 264~B.C. 221) 때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稷下의 學士 중 最長老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훗날, 그곳을 떠나 楚나라의 재상 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山東省)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그 고장에서 문인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순자의 사상은 孔子․子弓을 스승으로 하고 儒家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보다 한층 합리적이며, 더욱이 戰國思想의 여러 유형을 지양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이었다.
종래 한동안 순자는ꡐ性은 惡이고, 善한 것은 僞ꡑ라는 性惡論者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孟子처럼 인간성의 직접 擴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生得的인 의욕을 악한 것이라 부정함으로써 선한 義의 활동이 있다는, 즉 인간의 정신은 주관적으로는 多面으로 작용하나 그것을 부정하여 객관적 규범에 歸一함으로써 후자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더구나 자주적인 자율과 타율, 개인과 공동체와의 일치된 합리적 실천이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예의의ꡐ學ꡑ적 수련과 정신의 深化에 의하여 규범목적의 터득과 人倫意義의 충족 정도에 따라 士와 君子의 인격의 진보가 있고, 실천 목적과 질서 이념의 완전 일치는 마침내 聖人, 왕자로서 인륜의 完全體를 영위한다고 한다.
그의 정치 사상은 강력한 禮治主義를 취한다. 순자의 사상은 하나의 儒家思想의 완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宋代 학자들의 비난은 순자의 孟子 비판과 性惡說의 오해에 의한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또 순자의 儒家經典을 전한 공적이 인정된다.
순자의 저술은 당시 이미 成文 부분이 있었으나, 현존의 『荀子』20권 32편은 한나라의 劉向이 다시 편집하여『孫卿新書』32편으로 편찬하고, 다시 唐나라의 楊倞이 編의 순서를 바꾸고 註를 붙여 『孫卿子』라 하였고, 후에 간단히 『순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 부분은 순자의 門人의 說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 原典 略考 > 人之性惡,其善者僞也. 今人之性,生而有好利焉,順是,故爭奪生而辭讓亡焉, 生而有疾惡焉,順是,故殘賊生而忠信亡焉, 生而有耳目之欲,有好聲色焉,順是,故淫亂生而禮義文理亡焉. 然則從人之性,順人之情,必出於爭奪,合於犯分亂理而歸於暴. 故必將有師法之化ㆍ禮義之道,然後出於辭讓,合於文理而歸於治. 用此觀之,然則人之性惡明矣,其善者僞也. ꡔ荀子ꡕ「性惡篇」
君子曰學不可以已.靑取之於藍,而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 木直中繩,輮以爲輪,其曲中規,雖有槁暴,不復挺者,輮使之然也. 故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知明而行無過矣. 故不登高山,不知天之高也,不臨深溪,不知地之厚也, 不聞先王之遺言,不知學問之大也. 「勸學篇」
○人性論
문)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답) 악하다. 本性 本然之性(孟子)- 性善 : 仁義禮智(四端) 擴而充之 氣質之性(荀子)- 性惡 : 生而有好利,疾惡,耳目之欲,好聲色 - 善者僞也 荀子의 성악설과 孟子의 성선설을 비교하여 본다면, 孟子는 마음의 본연적인 사고 능력을 특히 중시하여 仁義禮智와 관련되는 四端과 良知․良能 등을 인성의 내용으로 하는 性善을 주장하였다. 반대로 荀子는 기질상의 욕망에 따른 본능적인 욕구를 본래의 것으로 인정하여 性惡을 주장하였다. 문) 악한 본성을 가진 보편적 인간존재가 어떻게 스스로 가치자각을 할 수 있는가? 답) 인간 본성을 자각하게 도와주는 스승 聖人을 통해서이다. 今人之性惡 必將待師法然後正 得禮義然後治 聖人者 人之所積而致矣, 凡所貴堯禹君子者 能化性 能起僞 僞起而生禮義. -->能化性起僞者인 師(聖人君子)이 세운 禮義 遵守 ○心과 天 문) 聖人(또는 君子)의 化性起僞는 어떻게 가능한가? 답) 心慮而能爲之動 謂之僞, 情然而心爲之擇 謂之慮 心者 形之君也 而神明之主也 出令而無所受令 「正名篇」 故人心 譬如槃水 正錯而勿動 則湛濁在下 而淸明在上 則足以見鬢眉而察理矣 微風過之 湛濁動乎下 淸明亂乎上 則不可以得大形之正也 心亦如是矣 故導之以理 養之以淸 物莫之傾 則足以定是非 決嫌疑矣 「解蔽篇」 禮義를 제정한 聖人의 본성은 常人과 다른가? 성인도 본성이 악하다면 어떻게 禮義를 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이다. 어쨌든 性 자체는 聖人도 常人도 모두 惡하다고 荀子는 말한다. 荀子에 의하면 사람과 사람의 개인차는 人爲를 가하는 측의 정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다만 성인에 대하여는 ‘성인은 본성을 변화시켜 人爲를 일으키며 人爲가 일어난 禮義를 낳으며 禮義를 낳아 법도(법률․규칙 같은 것)를 제정한다(「性惡」편)’고 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에 대하여는 성인이 정한 禮義를 배워 그에 따름으로써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의 인위적 노력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 本性을 변화시켜 人爲를 일으켜서 禮義와 法度를 정할 수 있는 성인의 본성은 보통 사람의 본성과는 다른 면이 있을 터인 데 그 점에 대한 설명은 『荀子』라는 책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성인은 생각을 쌓아서 爲故를 익힘으로써(人爲를 거듭함), 그리하여 禮義를 낳고 法度를 일으킨다’(「性惡」편)는 표현도 있는데, 성인의 ‘性’과 ‘僞’의 관계는 해명되지 않고 있다.
보통 사람도 성인이 정한 예의를 배워 선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단순히 그것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전심하여 오랫동안 노력(心)을 기울인다면 성인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 성인이 된 사람이 없는 것은 사람이 그만큼 노력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인에까지 이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가능성은 누구나 갖고 있으며, 적어도 ‘善을 알고 행할 수 있는 소질, 할 수 있는 능력(心)’은 누구나 갖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점을 ‘인간의 본성이 善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모두 人爲의 소산이지 性은 아니라고 한다.
○君과 禮 문) 權威主義的 外在的 君과 荀子의 禮가 만나는 근거는? 답) 禮起於何也 曰人生而欲 欲而不得 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則亂 亂則窮 先王惡起亂也 故制禮義以分之 ... 是禮之所起也 「禮論」 禮者 人道之極 然而不法禮不足禮 謂之無方之民 法禮足禮 謂之有方之士 禮有三本 天地者 生之本也 先祖者 親之本也 君師者 治之本也 「禮論」 君者 民之原也 原淸則流淸 原濁則流濁 「君道」 문) 荀子는 이미 一君의 權威만을 내세우는 法家였는가? 답) 荀子의 권위는 역시 인간(君子,人才) 중심이었으며, 君은 상징적 權威體였고, 法은 統治의 端緖였다. 故人主 無便嬖左右足信者 謂之闇 無卿相輔佐足任者 謂之獨 所使於四隣諸侯者 非其人 謂之孤 孤獨而闇 謂之危 國雖若存 古之人曰 亡矣 「君道篇」 有亂君 無亂國 有治人 無治法 「君道篇」 法不能獨立 類不能自行 得其人則存 失其人則亡 「君道篇」 法者 統之端也 君子者 法之原也 -->人間 主體意識 뚜렷: 孔孟과 背馳되는 듯하지만, 역시 인간의 主體的 自覺을 바탕으로 한 化性起僞라는 점에서 같은 指向點을 갖게 된다.
○學의 槪念 學의目標: 學惡乎始惡乎終 曰其數則始乎誦經 終乎讀禮 其義則始乎爲士 終乎爲聖人 進學方法: 木受繩則直 金就礪則利 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 則知明而行無過矣 <勸學> 君子生非異也 善假於物也, 君子知夫不全不粹之不足以爲美也 故誦數以貫之 思索以通之 爲其人以虛之 除其害者以持養之 (讀書와 思索) 學의 主眼 : 學至乎禮而至矣 不道禮憲 以詩書爲之 譬之猶以指測河也 以戈舂黍也 以錐湌壺也 不可以得之矣 -->荀子의 입장에서 學問이란 뛰어난 聖賢의 文化業績(禮憲)으로 自身을 改造하는 것이며, 따라서 學問의 目的은 聖人이 되는 데 있으며, 그 方法은 글을 배우고 생각을 응용하여, 타고난 악한 本性을 聖賢의 禮敎를 통하여 人爲的으로 矯正하여 나가는 것이다.
4. 新儒學思想 先秦儒家思想을 대표하는 四書가 확정된 것은 宋代 新儒學에 이르러서였고, 이것은 新儒學이 유가사상을 학적 체계를 갖춘 일 철학으로써 확립시켰음을 말해준다. 사실 송 이전 한대의 유학은 政治的 이념으로서는 많은 발달이 있었으나, 哲學的으로는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고, 焚書坑儒 이후 經學의 今古文 論爭에 따른 정통성 문제만을 논하는 일종의 考證學(訓詁學)으로 머물러 있던 것이다. 이 사이에 道敎와 佛敎는 각각 氣論과 性論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룩하여 儒家는 새로운 각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新儒學 즉 理學과 心學이 대두하게 되었고, 傳統 儒家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였다.
周敦頤로부터 程明道․程伊川에 이르기까지, 宋代의 儒學 곧 宋學은 우주의 생성방식과 원리를 논하고, 도덕적 인간 존재를 이 형이상학적 체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는 길을 달리하여, 명도는 인간 도덕성의 초월적 근거를 우주론에서도 확립하고자, 仁과 誠을 우주생성의 주체로 보게 되었고, 이천은 우주생성의 객관적 원리를 추구하여 그것으로부터 인성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규정하였다. 그후 陸象山과 朱熹(朱子)는 각각 마음이 곧 우주요 理라는 心論과, 마음은 氣이고 마음이 갖춘 性은 理라고 하는 理氣論이 대립하게 되었다. 주희는 존재원리로서의 이와 원리실현의 기체로서의 기는 결코 같지 않은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둘은 가를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고 하였다. 또한 이 원리체득의 방법과 도덕성 발현의 방법을 각각 窮盡法과 居敬法이라 칭하고, 이 둘은 사람의 두 다리와 같아 相補的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육상산은 궁진법을 비판하고 이 둘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여 형이상학적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孔子 이후 제2의 문화정리가로 일컬어진 주희는 이를 事實법칙과 當爲법칙, 그리고 所以然理로 나누고 생생하는 太極一理인 이 所以然理가 앞의 두 원리에 관통할 뿐만 아니라 우주에 관통하는 근거원리라 하였다. 인간도 이 원리로 생겨난 존재이며 인간에게도 관통하고 있어 이것이 인간의 本然之性이라 하였다. 한편 육상산의 心學은 明代의 王陽明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그는 주자의 궁진법으로서의 格物致知와 그 근거이론으로서의 性卽理說에 반대하고 이른바 전통유학의 근본문제를 心論이라고 단정하였다. 이에 따라 『大學』의 格物을 일을 바르게[正]하는 방법이라고 재해석하고, 바르게 하는 주체는 마음에 타고난 良知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良知를 이루어(致良知), 마음의 뜻[意]이 발하면 일체의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 뿐이라 단정한다.
< 原典 略考 > 此謂知本, 程子曰: 「衍文也. 」 此謂知之至也. 此句之上別有闕文, 此特其結語耳. 右傳之五章, 蓋釋格物̖ 致知之義, 而今亡矣. … 嘗竊取程子之意以補之曰: “所謂致知在格物者, 言欲致吾之知, 在卽物而窮其理也. 蓋人心之靈莫不有知, 而天下之物莫不有理, 惟於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也. 是以大學始敎, 必使學者卽凡天下之物,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至於用力之久, 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 無不明矣. 此謂物格, 此謂知之至也.” ꡔ大學ꡕ 「傳5章」
學者須是務實 不要近名 方是. 有意近名 則是僞也. 大本已失 更學何事. 爲名與爲利. 淸濁雖不同. 然其利心則一也. 『近思錄』「爲學類」
凡一物上有一理, 須是窮致其理. 窮理亦多端, 或讀書講明義理, 或論古今人物別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其當, 皆窮理也. 『近思錄』「爲學類」
若鄙人所謂致知格物者, 致吾心之良知於事事物物也. 吾心之良知,卽所謂天理也. 致吾心良知之天理於事事物物,則事事物物 皆得其理矣. 致吾心之良知者,致知也. 事事物物,皆得其理者, 格物也. 是合心與理,爲一者也. 『傳習錄』 「中卷」
愛問 在親民,朱子謂當作新民 後章作新民之文似亦有據. 先生以爲宜從舊本作親民,亦有所據否. 先生曰,作新民之新,是自新之民,與在新民之新不同. 此豈足爲據. 作字卻與親字相對. 然非親字義. 下面治國平天下處,皆於新字無發明. 如云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如保赤子.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之. 此之謂民之父母之類. 皆是親字意. 親民 猶孟子親親仁民之謂. 親之卽仁之也. 堯典克明峻德 便是明明德. 以親九族,至平章協和,便是親民,便是明明德於天下. 又如孔子言修己以安百姓。修己便是明明德。安百姓便是親民。 說親民便 是兼敎養意。說新民 便覺偏了」。ꡔ傳習錄ꡕ 卷上 「徐愛引言」
Ⅲ. 墨家 중국 戰國時代 초기의 사상가 墨子를 계승하는 학파. 그 사상과 학설은 『묵자』 53編에서 찾아볼 수 있다. 尙賢․尙同․兼愛․非攻․節用․節葬․天志․非樂․明鬼․非命 등 10論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매우 이색적이고, 전국시대의 세상에서 중앙집권적 체제지향과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하여 儒家와 대립한 유력 학파였다. 이 집단은 巨子를 지도자로 하여 강력한 단결을 자랑하였으며, 그 기반은 지연공동체적인 농촌에 있었다. 묵가의 事績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역대의 거자로서 禽滑釐․孟勝․田襄子 등의 이름이 전한다.
墨家學派의 創始者 墨子(기원전 468~376)는 魯나라 사람으로 스스로 자신을 하층계급(「農與工肆之人」)이라고 칭했다. 따라서 儒家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히 평민계급이자 이른바 ‘小人’에 속하는 부류이다. 墨子가 창립한 墨家는 출발점부터 孔子의 儒家와 대립하기 시작하여 당시의 兩大 “顯學”을 이루었으며, 墨家와 儒家가 서로 상대방을 痛駁하면서 소위 “百家爭鳴”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墨子는 倫理的인 親疏, 身分地位상의 貴賤, 經濟的인 貧富, 智力상의 賢愚, 軍事的인 强弱을 불문하고 모두가 平等하다고 주장하며 「兼相愛」와 「非天命」을 제창했다. 墨家는 先天的으로 결정된 모든 것을 타파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血統觀念을 打破하기 위한 兼相愛와 宿命觀念을 打破하기 위한 非天命이 바로 그것이다. 오로지 血統觀念과 宿命觀念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是非曲直과 賢愚勤惰만을 가지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게 墨子의 생각이다. 이 兼相愛와 非天命은 墨子思想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墨子는 단지 입으로만 자신의 이론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고 實踐에 앞장섰다. 墨子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摩頂放踵, 利天下爲之.」(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를 모두 갈아서라도 천하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하리라)는 말이 이점을 웅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墨子의 제자들 역시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한결같이 고행을 사양하지 않고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墨家는 오로지 남을 위해 산다는 宗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가능한 한 삼갔다. 그러므로 非樂과 節葬을 주장하게 되었다.
墨子의 中心思想은 兼愛思想이다. 兼愛는 한 마디로 말해서 남을 사랑하고 위하는 他愛였는데, 이 他愛는 自愛, 自利만을 추구하고, 自와 他를 구별하는 差別愛 즉 別愛 때문에 개인간에는 시기와 도둑질이 횡행하고, 서로 싸우며 살인이 일어나고, 국제간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묵자는 이 別愛를 천하의 가장 큰 화근으로 보았으며, 이 화근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兼愛를 주장하였다. 사람이 兼愛를 하면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自他의 구별이 없어지고 한결같이 서로 사랑하므로 사회의 모순과 병폐가 제거되고, 궁극적으로 전쟁이 종식되며, 세계 평화가 이룩된다고 하였다. 묵자의 이러한 사상은 궁극적으로는 自他와 階級에 차별을 두지 않는 兼相愛 곧 無差別의 平等思想이었다.
墨子思想은 제후 귀족들의 노골적인 권력정치의 자행과 더불어 안으로는 사치와 낭비가 극도에 달하고, 밖으로는 침략전쟁이 부단히 계속되어 백성들의 고통이 극도에 달하자 이에 반발 자극을 받아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즉, 평민의 입장에서 귀족계급의 특권과 혈연적 신분사회의 폐쇄성에 집착된 당시 사회의 모순과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고 兼愛와 交利를 통해 尙同一義의 평등세계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사상이었다. 묵자 死後에 그의 제자들은 사방으로 산재하여 활동하였는데 相理氏 무리는 동방의 齊에서 활동하였고, 苦獲, 鄧陵, 子巳齒 등은 모두 楚人이었기 때문에 南方에서 활동하였으며, 相夫氏 무리는 서방의 秦에서 활동하였다. 그 중 別墨으로 불리는 惠施와 公孫龍이었는데 이들은 변론의 방법을 개발하여 묵가의 겸애사상과 철학적 입장을 밝히고 변호하는 데 치중하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諸家에 대한 비평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전국 말기 七國의 대립 항쟁 과정에서 쇠약하기 시작하였고, 秦漢時代에는 그 學統이 거의 끊어졌다가 淸末에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原典 略考 >
聖人,以治天下爲事者也. 不可不察亂之所自起. 嘗察亂何自起, 起不相愛. 臣子之不孝君父 所謂亂也. 子自愛不愛父 故虧父而自利. 弟自愛不愛兄 故虧兄而自利. 臣自愛不愛君 故虧君而自利. 此所謂亂也. 父自愛也 不愛子 故虧子而自利. 兄自愛也 不愛弟 故虧弟而自利. 君自愛也 不愛臣 故虧臣而自利. 是何也. 皆起不相愛, 若使天下兼相愛, 人若愛其身, 惡施不孝,猶有不慈乎. 若使天下兼相愛,國與國不相攻,則天下治. 故天下兼愛則治, 相惡則亂 『墨子』 兼愛篇」
順天意者義政也 反天意者 力政也 然義政將奈何哉 子墨子言曰 處大國不攻小國 處大家不簒小家 强者不刦弱 貴者不傲賤 多詐者不欺愚 此必相利於天 中利於鬼 下利於人 三利無所不利 故擧天下美名加之謂之聖王 力政者則如此異『墨子』 「非攻篇」
◦楊朱(B.C. 440 ?~B.C. 360 ?)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 자가 子居라는 설이 있으며, 그 전기는 명확하지 않고 겨우 『장자』 『열자』에 그 언행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孟子가 ꡒ양주․墨翟의 말이 천하에 충만하였다ꡓ고 그 異端性을 지적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이 학파는 대단히 융성한 것 같다. 중심사상은 자기 혼자만이 쾌락하면 좋다는 爲我說, 즉 이기적인 쾌락설인데, 지나침을 거부하고 자연주의를 옹호하였다. 이것은 老子思想의 일단을 발전시킨 주장이었다. 墨家는 철저한 利他主義이고, 楊朱 학파는 철저한 利己主義이다. 孟子는 이들의 대표적인 인물인 墨子와 楊子를 들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孟子曰: 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墨子兼愛, 摩頂放踵, 利天下爲之. ꡔ孟子ꡕ 「盡心章句上」
Ⅳ. 道家 中國思想의 여명기인 先秦時代 이래 儒家와 함께 중국 철학의 두 주류를 이루었던 학파이다. 道家라는 일컬음은 이 사상의 開祖라 할 수 있는 老子가 우주 본체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道와 德의 개념에서 비롯되어, 도덕을 논하는 일련의 학자들을 道德家라고 호칭하다가 뒤에 이를 약하여 道家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호칭도 선진시대부터 나타난 것은 아니며, 前漢代 劉歆과 司馬談부자가 중국사상의 來源을 설명하는 가운데 九家 또는 六家로 분류한 데서 일반화되었다.
1. 道家의 淵源과 老子
道家라고 할 때, 넓은 뜻으로는 노자를 敎祖로 하여 뒤에 성립하는 종교형태인 도교(道敎:Taoism)도 포함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도교와 구별하여 노자․莊子․列子․關尹 등이 중심이 되는 철학파를 가리키며, 좁은 뜻으로는 老莊哲學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대적으로 보면 노자와 장자, 楊朱․열자를 중심으로 한 先秦道家뿐만 아니라 魏晉時代의 王弼과 向秀․郭象 등을 주로 하는 玄學派와 名理學派도 道家에 속한다. 道家의 창시자로 老子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성이 李요, 자가 聃, 이름은 耳이며, 老聃이라고도 한다. 楚나라 苦縣(河南省鹿邑縣) 출생으로 春秋時代 말기 周나라의 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그는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孔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도가사상은 노자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에 그 연원도 노자사상을 이해하면 될 것이다. 班固의 『漢書』 「藝文志」에 보면 ꡒ道家者流는 史官에서 나왔다ꡓ고 한 것 또는 『史記』에서 ꡒ老聃은 周나라의 守藏室之吏였다ꡓ고 한 것처럼 노자는 사관 출신이었고, 사관은 역사와 전통적인 학술사상과 지혜를 이어받은 해박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므로 노자는 한편으로는 西周의 禮樂制度와 그 문화에 대하여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戰禍와 도덕의 崩頹, 사상의 분란 및 정치적인 암흑상황을 가장 심각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永逸의 방법을 구하되 눈앞의 고통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져온 근원으로서 서주문화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서, 본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ꡐ反樸歸眞ꡑ의 사상을 이루게 된 것이 道家이다.
道家는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부정적 思辨法을 사용하여 儒家의 가치도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론적 本體觀念으로서 ꡐ道ꡑ와 ꡐ德ꡑ의 이론을 제시하였다. 道家의 도덕은 人僞造作하지 않으면서도 어김없이 전개되는 無爲自然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에 따라 인생론에서도 무욕과 허무의 방법 등 부정적 방법을 통하여 自然大道에 순응하는 삶을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하였고, 지식과 가치의 문제에서는 是非가 兩行하는 相對主義와 反知主義를 주창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莊子의 個體의 절대자유․절대평등의 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2. 老子의 思想
노자는 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自然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有가 있으면 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柔를 지키면 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貴柔思想이라고 한다.
< 原典 略考 >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제1장]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제3장]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제8장]
大道廢有仁義, 慧智出有大僞, 六親不和有孝慈, 國家昏亂有忠臣.[제18장]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此三者以爲文不足,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제19장]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제80장]
3. 老子思想의 展開 노자사상은 列子와 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黃老思想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漢 高祖는 오랜 戰亂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老子의 無爲自然思想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한편 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張道陵은 노자를 敎祖로 追尊하고 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도교의 교리에도 원용하였다. 魏晉時代에 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王弼이 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魏晋 玄學의 기본 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佛經을 해석하는 데, 老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格義佛敎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4. 莊子(B.C. 369~B.C. 289?)와 그의 思想 성은 莊이요, 이름은 周. 宋의 몽읍(蒙邑:河南省商邱縣 근처)에서 출생했으며, 정확한 生沒年代는 미상이나 孟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官營인 漆園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楚나라의 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인『장자』는 원래 52篇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晉代의 郭象이 刪修한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으로,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인간의 마음은 일정한 시대․지역․교육에 의하여 형성되고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이 마음이 외부 사물들과 접촉하여 지식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은 시대․지역,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 장자는 이러한 지식에 입각한 행위를 人爲라고 한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이어주거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주면 그들을 해치게 되듯이 인위는 자연을 훼손할 수 있다. 莊子는 老子와 마찬가지로 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본다. 道는 一이며 大全이므로 그의 대상이 없다. 道는 어떤 대상에게 要求하거나 私有하지 않으므로 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自然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미․가라지․기왓장․똥․오줌 속에도 있다. 이는 일종의 汎神論이다. 도가 개별적 사물들에 전개된 것을 德이라고 한다. 도가 천지만물의 공통된 본성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도 덕이다. 이러한 덕을 회복하려면 습성에 의하여 물들은 心性을 닦아야 한다. 이를 性脩反德이라고 한다. 장자는 그 방법으로 心齋와 坐忘을 들었다. 덕을 회복하게 되면 도와 간격 없이 만날 수 있다. 도와 일체가 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다. 이를 以道觀之라고 한다. 莊子의 思想은 대부분 寓言으로 풀이되었으며, 그 근본은 老子의 無爲思想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現世와의 妥協을 排除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여,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장자의 분방한 세계가 펼쳐진다.
< 原典 略考 >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逍遙遊」
惠子謂莊子曰.“吾有大樹,人謂之樗. 其大本擁腫而不中繩墨, 其小枝卷曲而不中規矩, 立之塗,匠者不顧. 今子之言, 大而無用,衆所同去也.” 莊子曰..“今子有大樹,患其无用, 何不樹之於无何有之鄕,廣莫之野,彷徨乎无爲其側,逍遙乎寢臥其下. 不夭斤斧,物无害者,无所可用, 安所困苦哉!” 「逍遙遊」
罔兩問景曰 曩子行 今子止. 曩子坐 今子起. 何其無特(持)操與. 景曰 吾有待而然者邪. 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 吾待蛇蚹蜩翼邪. 惡識所以然. 惡識所以不然. 昔者 莊周夢爲胡蝶,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齊物論」
顔回曰回益矣. 仲尼曰何謂也 曰回忘禮樂矣. 曰可矣,猶未也. 他日, 復見,曰回益矣. 曰何謂也. 曰回忘仁義矣. 曰可矣, 猶未也. 他日,復見, 曰回益矣. 曰何謂也. 曰回坐忘矣. 仲尼蹴然曰 何謂坐忘. 顔回曰 墮肢體,黜聰明,離形去知,同於大通,此謂坐忘. 仲尼曰 同則無好也,化則無常也.而果其賢乎. 丘也請從而後也.「大宗師」
5. 莊子 思想의 展開 이러한 장자사상은 魏晉玄學의 思想的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에 성행한 般若學과 당나라 때 융성한 禪宗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玄宗은 그에게 南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므로, 『莊子』는 『南華眞經』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읽혔다. 宋․明 理學은 유학을 위주로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장자철학을 수용하였다. 장자의 이러한 超脫思想은 자연주의 경향이 있는 문학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전기에 異端으로 배척받기도 하였으나, 山林의 선비들과 문인들이 그 문장을 애독하였다.
Ⅴ. 法家 법치주의를 제창한 중국의 정치 사상가. 전국시대 諸子百家의 한 유파로 그 계통을 이은 一群의 정치 사상가에 대한 총칭이다. 특히 儒家 사상과의 대립․항쟁 과정에서 발달하였으며, 전국시대의 전제적 지배를 지향한 군주에게 채용되어, 秦․漢나라의 통일제국 성립을 뒷받침한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漢書』「藝文志」에 의하면, 信賞必罰의 질서 있는 정치를 주장한 장점이 있고, 오로지 刑法에 의거하여 때로는 肉親의 情까지도 저버린 것이 短點이라는 평도 있다. 魏나라의 文侯를 받들어 부국강병의 실적을 올린 이리(李悝B.C. 455?~B.C. 395?), 秦나라의 재상으로 국내개혁을 달성한 상앙(商鞅:?~B.C. 338), 저서를 통하여 秦始皇을 감탄시킨 한비자(韓非子:?~B.C. 233), 秦 통일제국의 기초를 구축한 이사(李斯:?~B.C. 210), 前漢의 중앙집권화에 힘쓴 조조(?~B.C. 154), 武帝 때의 유능한 경제관료 상홍양(桑弘羊:?~ B.C. 80) 등이 법가의 대표자들이다. 현대에 와서 중국은 유가들이 노예주인 귀족층의 세습적 권리를 옹호한 것에 대하여, 법가들은 새로운 봉건 지주계급을 대표하여 국내 통일에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한다.
1. 韓非子 중국 戰國시대 말기 韓나라의 公子로 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280?~B.C. 233)와 그 일파의 論著. 55편 20책에 이르는 大著로, 원래 『韓子』라 불리던 것을 후에 唐나라의 韓愈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前漢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群으로 나눌 수 있다. ① 한비의 自著로 추정되는 「五蠹」「顯學」「孤憤」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無力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儒家나 墨家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空論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時世에 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 군주는 측근․중신․遊說家․학자․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② 한비 일파의 講學․토론으로 추정되는 編으로, 「難」 「難一~難四」 「難勢」 「問辨」 「問田」 「定法」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난세」와 「정법」으로, 유가의 德治論은 물론 法家에 속하는 愼子․申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③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說林」 「內外儲說」 「十過」 등의 諸編. 上古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笑話의 類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④ 전국시대 말기부터 漢代까지의 한비 後學들의 政論으로 추정되는 諸編. 編數는 가장 많으며 그 중 「有度」 「二柄」 「八姦」 등은 오래된 것이고, 「心度」 「制分」 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刑名參同)나 법의 운용(運用:法術)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君權强化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⑤ 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主道」「揚」「解老」「喩老」등의 4편. 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정하는 道家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六反」 「충효」 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本旨로 하여 臣下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心術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道家의 虛靜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前편은 政論이고, 후 2편은 편명 그대로 『老子』의 注釋 또는 해설편이다. ⑥ 한비학파 이외의 논저인 「初見秦」 「存韓」 등 2편 모두 한비의 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適評이라 하겠으나, 그들이 儒家․法家․名家․道家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한의 法刑制度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感傷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浙江書局의 22子本이 좋은 刊本이라고 한다.
2. 李斯(?~B.C. 208) 중국 秦나라의 정치가. 楚나라 상채(上蔡:河南省 上蔡縣) 출생. 荀子에게 배운 法家流의 정치가로서, 秦나라로 가 丞相 呂不韋에게 발탁되어 客卿이 되었다. 鄭國渠라는 운하를 완성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始皇帝가 6국을 통일한 후에는 봉건제에 반대하고 郡縣制를 진언하여 廷尉에서 丞相으로 진급하였고, 焚書坑儒를 단행시켰다. 통일시대 진나라의 정국을 담당한 실력자로, 획기적인 정치를 추진하였다. 시황제가 죽은 후 환관 趙高와 공모, 막내아들 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고 시황제의 장자 扶蘇와 장군 蒙恬을 자살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趙高의 讒訴로 투옥되어 咸陽의 시장터에서 처형되었다.
3. 商鞅(/?~B.C. 338) 중국 戰國時代 秦나라의 정치가. 衛鞅 또는 公孫鞅이라고도 한다. 衛나라 公族 출신으로 일찍부터 刑名學을 좋아하여 조예가 깊었다. 魏나라에 仕官하려 하였으나 받아주지 않아, 秦나라로 가서 孝公에게 채용되었다. 부국강병의 계책을 세워 보수파(保守派:儒家)와 투쟁하면서 刑法․가족법․토지법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후일 秦帝國 성립의 기반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列侯에 봉해지고 상(商:陜西省 商縣)을 봉토로 받으면서 商鞅이라 불렀다. 10년간 진나라의 宰相으로 있으면서 엄격한 법치주의 정치를 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샀으며, 孝公이 죽자 반대파들에게서 車裂刑에 처해졌다. 통일국가 형성기에 관한 귀중한 사료인 그의 저서 『商君書』는 각 편마다 성립연대가 달라 전국시대 말기 여러 法家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귀중한 역사적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商鞅 - 法治 : 成文法에 기준하여 이를 백성들에게 주지시키고, 이의 준수를 강요하는 것-子産, 李悝, 吳起, 商駚 등 ◦申不害- 術治 : 군주가 관리들을 다루는 군술로서, 정허,무위속에서 신하의 실정과 동태를 살피고, 시비의 시작과 공과를 펼쳐 상과 벌을 주되, 반드시 그 관직의 본분과 이름에 맞게 實名의 원칙을 지키도록 한다는 것 ◦愼到- 勢治 : 힘과 지위 곧 강력한 세위가 있기 때문에 군주가 신하에게 군림할 수 있으므로, 군주는 세를 결코 남에게 넘겨서는 안된다는 것 -->韓非子는 法․術․勢의 학설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하고, 秦의 중국통일과 통일된 秦帝國의 통치 이념 확립에 영향을 줌.
< 原典 略考 > 昔者韓昭侯醉而寢. 典冠者見君之寒也, 故加衣於君之上. 覺寢而說, 問左右曰..「誰加衣者?」左右答曰..「典衣!」君因兼罪典衣, 殺典冠. 其罪典衣, 以爲失其事也; 其罪典冠, 以爲越其職也. ꡔ韓非子ꡕ 「內儲說上」
昔者 鄭武公 欲伐胡. 故先以其女 妻胡君 以娛其意. 因問於群臣. 吾欲用兵 誰可伐者. 大夫關其思 對曰胡可伐. 武公努而戮之曰 胡兄弟之國也 子言伐之 何也. 胡君聞之 以鄭爲親己 遂不備鄭. 鄭人襲胡取之. 宋有富人, 天雨牆壞. 其子曰不築必將有盜, 其隣人之父 亦云. 此二人說者皆當矣 厚者爲戮 薄者見疑 則非知之難也 處知則難也 ꡔ韓非子ꡕ 「說難」
今有美堯舜湯武禹之道於當今之世者 必爲新聖笑矣. 是以聖人不期修古 不法常可, 論世之士 因爲之備. 宋人有耕田者. 田中有株, 兎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而守株, 冀復得兎. 兎不可復得而身爲宋國笑. 今欲以先王之政治當世之民, 皆守株之類也. ꡔ韓非子ꡕ 「五蠹」
楚人有鬻楯與矛者. 譽之曰..「吾楯之堅, 物莫能陷也.」 又譽其矛曰..「吾矛之利, 於物無不陷也.」或曰..「以子之矛, 陷子之楯, 何如?」 其人不能應也. 夫不可陷之楯與無不陷之矛, 不可同世而立. [韓非子·難一]
Ⅵ. 其他
1. 名家 中國 諸子百家 중 詭辯學派. 戰國時代에는 辯者察士로 불렸고, 前漢時代에 司馬談이 모든 학파를 분류할 때 6家 중의 하나로 명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名家라는 명칭은, 이 학파가 명(名:槪念․表現․名目)과 실(實:內容․實體)의 일치․불일치 관계를 중시하여, 세상이 혼란한 것은 명과 실의 불일치에 그 원인이 있으므로 名實合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연유하였다. 이 학파의 대표적 인물은 公孫龍․鄧析․尹文․惠施 등으로, 특히 공손룡의 白馬非馬論과 堅白論은 서양의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처럼 교묘한 詭辯論으로 유명하다. 명가의 논리는 지나친 점도 있으나 논리학 발달에 공헌한 논리학파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2. 縱橫家 중국 전국시대의 諸子百家 중 정치적 책략으로써 당시 국제외교상에서 활약한 遊說客들. 특히 蘇秦이나 張儀로 대표되는 合縱連衡의 책략이 그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 소진 등이 주장한 合從策이란 당시 동쪽에 있던 燕․楚․韓․魏․趙․齊의 6국이 연합하여 서방의 秦나라에 대항하려고 한 정책이며, 장의가 내세운 連衡策이란 진나라와 6국이 각각 손을 잡게 함으로써 진나라의 발전을 꾀한 책략이다. 그들의 언동을 많이 수록한 서책이 『戰國策』이다.
3. 陰陽家 고대 중국에서 陰陽說을 신봉하던 학파. 전국시대 諸子百家 중의 한 파로 齊나라의 鄒衍․鄒奭 등이 그 대표적 사상가이다. 『漢書』 「藝文志」에 의하면 그들의 설은 고대에 曆象을 관장하는 관직에 있던 羲氏․和氏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天體의 운행이나 四季의 推移 등 자연현상의 법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나, 반면 이 법칙을 人事에 관련시켜 인간생활도 이에 따르지 않으면 災害를 입게 된다는 등 미신적 요소가 강하다. 이 같은 중국의 음양설은 일찍이 우리 나라에 전래되어 天文과 曆學을 연구하는 많은 음양가[曆官]와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陰陽師가 속출하였는데, 주로 음양가라 하면 후자를 지칭하는 대명사처럼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土亭 이지함을 들 수 있으며 地官 또는 日官이 묘지와 집터의 선정에서부터 年事의 길흉까지 점쳤다.
4. 雜家 중국 漢代에 행하여진 학문 분류의 한 流派. 한대의 史書 『漢書』 「藝文志」는 ꡐ諸子百家ꡑ라고 일컬어지는 고대 여러 학파의 학문을 10개파로 분류하였다. 그 중 9개유파는 각기 독자적인 주장과 체계를 갖는 학파이지만, 잡가는 문자 그대로 다른 학파의 학설을 자유롭게 채택하여 하나의 思想을 구성한 것으로, 이 유파를 한 유파로 간주하여 10개학파라 하였다. 이 잡가에는『尸子』『呂氏春秋』『淮南子』『東方朔』등이 포함되며, 또한 唐代의 역사서인『唐書』에는『論衡』『風俗通』『包朴子』 『玉燭寶典』 등도 잡가에 포함시킨다.
5. 農家 농업을 중시하고 농경에 힘써서 衣食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고대 중국의 학파. 농업경제와 농업기술에 대하여 연구한, 諸子百家 중의 일파이기도 하다. 본래 농업이 인류사회에 있어 기본적인 산업이라는 점에서 오랜 옛날부터 농업기술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고대 중국의 문헌을 처음으로 정리하여 기록한 『漢書』 「藝文志」의 「諸子略」에는 농가에 대해서, 『神農』(20편) 『野老』(17편) 등 농가 9사람의 書 114편을 들고 있는데, 오늘날에는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단편적인 것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밖에 陰陽家․卜筮家의 書인 「數術」 중에 『神農敎田相土耕種』(14권)『昭明子釣種生魚鼈』(8권)『種樹臧果相蠶』(13권) 등과 같은 농업기술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 따라서 ꡐ農家ꡑ란 단순한 농업기술을 해설한 것이 아니라 어떤 思想的인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문지」에 의하면, 그것은 君臣이 함께 경작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孟子』에ꡒ神農의 말을 이룬 자에 許行이 있다ꡓ라고 쓰인 허행의 주장도 똑같은 설이지만, 이 사상은 秦․漢의 제국 통일 후로는 쇠퇴하였다. 후세 농가의 書로 지목되는 것은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史書의『經籍地』등에는 농사에 관련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잡다하고도 짜임새가 없이 허술해졌다. 이에 따라『四庫全書』의 「總目」에서는『齊民要術』『農書』『農桑輯要』등 농가에 관계된 것을 9부 68권으로 한정하여 게재하였다.
6. 兵家 諸子百家 중의 일파로 춘추전국시대와 漢代에 많이 출현한 兵法家․兵學者의 一群. 周나라의 孫子․吳子․위료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고대의 司馬職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用兵방법을 설명하였다. ꡔ漢書ꡕ 「藝文志」 兵書略에서는 이것을 兵權謀․兵形勢․兵陰陽․兵伎巧의 4종류로 분류하여, 병가의 書, 53家 790編, 圖 43권으로 정리하여 설명하였다. 후세에는 武經七書라 하여 ꡔ孫子ꡕ ꡔ吳子ꡕ ꡔ司馬法ꡕ ꡔ위료자ꡕ ꡔ三略ꡕ ꡔ六韜ꡕ ꡔ李衛公問對ꡕ가 대표적 병서로 불리었다. 이들이 해설한 바는 儒家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단순히 전략․전술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외교 등 처세 전반에 걸친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어, 병술만을 해설한 서유럽의 병서와는 그 내용이 크게 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