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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결사 (白蓮結社)
1216년(고종 3) 천태종의 승려인 요세(了世)가 중심이 되어 무인란 이후 변화한 사회와 불교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신앙결사를 말한다.
고려초의 불교계는 신라말부터 성장세를 보였던 선종이 계속 발전했으며 아울러 화엄종도 다시 등장했다. 이당시 불교계의 목표는 통치체제정비와 불교계의 통합작업이었다.
특히 화엄종의 균여나 의천은 천태종을 중심으로 교종·선종의 통합을 시도했는데 실패했다. 그뒤 화엄종·법상종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교종세력이 불교계를 주도하면서 문벌귀족체제와 결탁했다. 무인정권은 문벌귀족이나 문벌귀족과 결합한 불교에 대한 탄압을 시도했으므로 불교계는 대무인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대무인투쟁은 교종·선종을 망라한 것으로, 농민·천민의 난과는 달리 왕실 중심의 옛 지배체제를 복구하려는 것이었다.
최씨 집권기에 들어서 기존의 문벌체계와 결탁된 불교계에 대한 자각·반성의 성격을 띤 신앙결사가 전개되었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지눌(1158~1210)이 개창한 것으로 뒤에 수선사(修禪寺)로 사액(賜額)된 정혜결사와 요세(1163~1245)의 백련결사이다.
천태종의 승려인 요세는 처음에는 지눌과 같이 수선을 통해 불교계를 비판하는 견지에서 신앙결사에 뜻을 두었지만, 그뒤 천태의 묘해(妙解)의 참뜻을 깨닫게 됨으로써 입장이 달라지게 되었다. 요세는 참회행과 미타정토신앙을 실천방향으로 강조하고, 지눌의 선사상과 달리 농민·천민층을 포함한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했다.
그결과 정토신앙이 민중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요세는 1216년 전라남도 강진 토호세력의 도움을 받아 강진 만덕산(萬德山)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백련결사는 초기에 요세와 교유를 맺은 친우나 지방관을 통해 유지되다가 1230~40년대에는 최우와 그에게 밀착된 중앙관료, 문인관료의 지원과 관심 속에 유지되었다. 백련결사의 지지세력이 변화한 것은 당시의 역사 상황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는 백련결사가 몽골의 침입에 대해 항전을 표방하게 되고 이에 따라 최우를 중심으로 한 강화도 정부가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에 연유한다.
요세 이후 백련사는 천인(天因)·천책(天頙)이 계승했으나, 원 간섭기인 1284년(충렬왕 10) 개경에 묘련사(妙蓮寺)가 등장함으로써 2부류로 나누어졌다. 즉 묘련사는 백련사 출신의 승려가 참여했으나,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원찰(願刹)로 등장하고 본래의 성격을 잃어 기층민과 떨어져갔다. 이에 비해 백련사는 묘련사의 등장으로 성격이 변했지만 천책의 법손인 무기(無寄)가 그 정신을 계승했다. 그러나 무기 이후 백련사의 계승 여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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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전개된 신앙결사운동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고려시대의 불교계의 전반적 흐름을 살펴보자. 고려시대는 무신집권기를 기준으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방방이 많이 쓰이나, 고려시대의 성격을 보다 잘 보여주는 시기구분은 다음의 표와 같이 5개의 시기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나는 초기를 왕건의 건국에서부터 성종의 즉위로 고려의 기본적 질서가 완성되는 시기로, 중기를 성종이후부터 문벌귀족의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는 무신의 난까지로, 무신집권기는 1170년의 무신정변에서부터 1270년(원종 11)의 개경환도까지로, 원 간섭기는 원과 권문세족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공민왕의 등장까지로, 말기는 공민왕에서 시작하여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이르는 시기로 규정하겠다.
이 시기 중 신앙결사운동이 일어나는 시기는 무신집권기로 무신정권과 선종의 부흥과 깊이 관련된다.
신앙결사(社)운동의 시발점은 수선사를 결성한 지눌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리송송하게 여기는 '수선사'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는게 좋겠다. 흔히들 수선사 하면 "절 이름 아닌가?", "아니, 지눌이 만든 동지회 같은거지."라고 하는데, 둘다 맞는 말이다. 즉, 수선사는 "지눌(知訥)에 의해 이루어진 혁신불교적인 신앙결사(信仰結社)의 단체명인 동시에 사찰의 명칭"이다. 이 절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송광사(松廣寺)다. 송광사의 위치는이곳 이다.(구글어스 필요)
유명한 송광사 사진은 orangekae님.
고려시대의 신앙결사 운동은 불교통합 운동의 연장선이다. 고려 중기 이미 교종와 선종의 통합을 꾀하는 시도가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광종때도 교선통합운동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통합 운동은 의천의 통합운동에서 비롯된다. (아래의 사진은 의천 : 워낙 유명한 의천사진이긴 한데, 정확한 출처는 모르겠다)
천태학을 통해서 교종과 선종을 융합하려던 의천의 통합은 왠지 수상하다. 순수하게 신앙적으로 교리를 통합했다고 보기에는 그의 사회적 위치에 관한 몇가지 사항이 걸린다. 그의 신분이 왕자(아버지는 문종)였다는 점, 어린 나이인 12세에 이미 교종 최고의 법계인 승통(僧統)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고려 왕실에서 의도적으로 의천의 통합운동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여튼 의천은 이미 어린나이에 송나라에 유학을 다녀왔고, 유학가서 모은 책들로 새로운 교장(불교 경전)을 발행하기 위해 교장도감을 설치한다. 유학을 다녀오고, 교장을 간행하고, 이런저런 이론들을 연구를 하던 중에 어느덧 그는 42세가 되어 국청사의 주지가 된다. 그 곳에서 그는 선진 불교인 천태학을 가르치며 제자들을 기른다.
애초에 그는 왕실과 연결된 화엄종의 승려였다. 그래서 1차적으로는 화엄종의 교리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천태학의 아이디어 회삼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를 변형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세운다. 이 과정에서 그가 강조했던 사람이 원효의 원융회통(圓融會通)사상이다. 다음으로는 법상종을 압도하기 위해 성상겸학(性相兼學)의 논리를 제시하여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우위를 보인다. 그러나 애초부터 신앙보다 정치색이 강했던 의천의 이 통합은 의천 사후 선종은 독립하고, 화엄종은 균여파와 의천파로 분리된다.
다시 이 글의 본론으로 돌아오자. 하여튼 신앙결사운동은 지눌의 선종과 교종의 교리통합을 통합 이후에 나타난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교리 통합은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手)로 요약된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고(선 돈오)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하며(후 점수), 그 수행에 있어서는 定과 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해 깨달음 실천으로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흔히들 의천의 교선통합을 피상적인 통합으로 평가하고, 지눌의 통합을 보다 완성된 통합으로 부른다. 교관겸수나 돈오점수나 우리같은 청맹과니의 눈에는 그게 그거 같다. 그런데 왜 그런 평가를 받을까? 아리송송하다. 이 문제는 차후에 두 승려를 비교하는 기회를 가져보기로 하고, 신앙결사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해보자.
이미 아실지 모르겠지만, 신앙결사는 동진(東秦)의 혜원(慧遠)(334~416)이 중심이 되어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한 것이 시초로서 동아시아 불교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운동이다. 고려사회에서는 지눌(知訥)(1158~1210)의 '정혜결사(修禪社)'와 요세(了世)(1163~1245)의 '백련결사'가 대표적이다. 결사는 명종 12년(1182) 정월 개경의 보제사에서 개최한 담선법회(談禪法會)를 시작으로 급격기 성행한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문화사 단원에서 '결사 운동과 조계종'이라는 별도의 챕터를 두었다. 그래서 왠지 거창한 내용이 있을 듯 하지만 교과서의 설명으로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결사 운동에 대한 서술을 보면 "지눌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송광사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요새는 백성들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에 백련결사를 제창하였다.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결사 역시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수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라고 나온다.
이 서술만을 놓고 본다면 지눌이나 요세 같은 사람이 등장해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자 이에 대해 여러사람들이 호응해서 제대로된 불교신앙을 하기 위해 모인 단체가 결사(社)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지눌이 누군지, 지눌이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알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지방민의 호응이 좋았다는 평가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정제규(鄭濟奎)는 그의 글에서 신앙결사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앙결사는 가장 적극적인 재가 신앙이다. 결사는 특정한 목적과 규율 아래에 구성되는 공동체로서 일상적인 생활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출가의 소망망큼이나 신앙결사에 대한 참여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출가(出家)였으나, 그 방법은 현실 세계와의 단절을 뜻하는 것으로 쉽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결사에 들어가 수행을 통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은 여러 자료를 통해서 확인된다. 재가불교 신자들은 밤마다 꿈속에서도 신앙결사를 찾았고, 만약 결사에의 참여를 막는다면 벼슬을 그만두고라도 찾아가겠다는 강한 의리를 표현했다." 라고 하면서 동문선(東文選)의 글들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한편 향도(香徒)관련 자료와 묘지명 등을 기초로 신앙결사와 정토왕생(淨土往生)도 신앙 결사 성행의 한 요소였음을 밝힌다.
그럼 정제규가 인용한 <동문선>의 내용을 두 개만 살펴보자.
먼저 신앙결사에 대한 인식에 관한 부분을 보여주는 '임계일'의 글이다. 밑줄친 부분은 그가 결사에 오랫동안 참여하기를 바랬던 심정을 잘 보여준다.
2만 연경(蓮經)을 30년간 설법(說法)하여
암자의 여러 제자들이 모두 감화되었다.
역로(驛路) 반생(半生)에 행객(行客)이 되었던 이몸,
향사(香社) 여러 해동안 주인을 그리워 했네.
유(劉), 뢰(雷)들과 함께 이미 道에 들었으니,
장저(長沮) 걸닉(桀溺)한테 나무를 물을 것 없네,
멀리 하늘가에서 날 부르며 손젓는 곳.
천태 산 구름 걷힌 봉에 푸른 빛이 새로우리
다음으로 신앙결사에 참가한 사람들의 바램을 보여주는 '권적(權適, 1094~1147)'의 글을 보자. 밑줄친 부분에서 정토에 대한 바램, 참선과 경전 공부의 자유, 현세적 구복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사(社)에 모인 모든 사람은 온화롭고 엄숙해 잘못이 있으면 충고하고 잘한 일은 칭찬하여, 서로 자극을 받아 밤낮으로 노력하며 함께 서방(西方)에 이르기를 목표로 하였다. 우수한 사람이나 덕망이 높은 이로서 사원(寺院)에 거처하는 이에게는 일정한 법규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읽던가 염불(念佛)을 하든가, 참선(參禪)을 하든가, 공부를 하든가간에 마음대로 자유롭게 지내도록 하였다. 모든 사(社)에 참가한 사람에게는 그가 생존했거나 사망하였음을 불문하고 나무쪽에다 이름을 새겨둔다. 15일마다 점찰업보경(占察業報經)에서 말한 바에 의하여 나무쪽을 꺼내어 바퀴에 던져서 선악의 응보(應報)를 점친다. 점쳐서 나온대로 선과 악을 두 개의 상자에 나누어 놓고 그 악보(惡報)에 빠진 사람은 회원들이 그를 위하여 대신 참회하고 다시 바퀴에 던져서 선보(善報)를 얻게한 후 그만둔다.
결국 이러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마주하다 보면, '고려는 역시 불교 국가였구나'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된다. 그러나 동문선에 실린 글들은 주로 문인의 글이었으므로 일반인들도 이런 생각을 했다라고 생각하기는 좀 무리다. 하여튼 신앙결사 운동이 적어도 식자 계층에게는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애초에 나는 신앙결사운동에 참여한 계층이 평민들도 포함한 광범위한 계층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또 신앙결사 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회적 역할을 했을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지식과 자료의 한계상 그 부분에 대한 충분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바로 위의 사료에도 보이듯이 적어도 식자층은 적극적으로 참여의사를 밝혔으며, 실제로 결사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은 확인했다. 신앙결사운동에 평민들의 참여 형태 이 문제는 앞으로 더 공부해 봐야 될 문제 같다.
<참고>
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과서(2003), pp 270~271
변태섭, 한국사통론(2003), 의천과 지눌 부분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의천, 지눌, 송광사'항목
정재규,<고려시대 불교신앙결사에 대한 인식과 그 성격>,<<문화사학(21)>> 전반적으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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