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속의 동성애
한국에서 역사적 기록에 언급된 최초의 동성애자는 신라 제36대왕 혜공왕으로..
그는 경덕왕의 적자로서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은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 마지막 임금이십니다.
그는 8세에에 왕위에 올라 여자같이 행동하고 옷입기를 즐겨하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원래 왕은 여자였는데 남자의 몸을 빌어 왕이 됐으니..
나라에 불길하다하여 죽였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혜공왕은 여자같이 행동해서 죽은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랜세월 짓눌려 지내던 귀족세력의 반격속에 희생된 것이죠.
혜공왕과 비슷한 말로를 보여준 임금은 고려 제31대왕 공민왕이 있습니다.
왕은 몽고 노국공주가 병사하자 큰 슬픔과 고통속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러다 '자제위' 라는 궁정청년 근위대를 만들고 그들과 동성애를 즐기다 죽임을 당하죠.
왕이 궁정에서 여러 귀족 미남 청년들과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기고..
평소에도 여자옷을 입고 치장하기를 즐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동성애를 했다고 해서 조정 안팎에서 비난 받은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고려왕조에서 제7대왕 목종도 남색을 즐겼다는 기록이 보여집니다.
그 외 공식적 기록에 남겨진 동성애자의 모습은..
신라 원성왕대에 묘정이라는 미소년 얘기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그는 용모가 출중하여 소문이 자자했으며 신라고관의 사랑과 총애도 받았다 합니다.
또 조선실록에 세자빈봉씨가 후궁들과 오랫동안 동성애를 즐기다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기록으로 남겨진 사건들은 대부분 왕실에서 행해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독수공방하는 궁녀들 사이에 동성애가 이루어질 가능성과..
백성들 사이에 암암리에 행해졌을 겁니다.
특히 사당패의 어리고 귀여운 남아나 여아들이..
동성애 거래가 행해졌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동성간의 사랑이 궁정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우선 화랑에 관한 이야기로..
"화랑도에서 동성애적 행위와 사랑은 꽤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라고..
일본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공식화하였으나..
우리나라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화랑에서 남색의 행위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문학작품에서 동성애의 감정을 기록한것은 고려시대 경기체가 한림별곡에서..
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외 현대 문학작품에서 동성애 묘사는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타나죠.
사람들은 유교적 관념이 동성애를 억압하는 주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교경전 어느곳에서도 동성애를 비난하는 내용은 없다고 합니다.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존재해 온 동성애자의 삶이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그 역사를 관통하면서 동성애자들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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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에 빠졌던 고려의 왕들
고려 7대 목종
목종은 19세라는 별로 어리지 않은 나이에 왕으로 즉위하였지만..
정치적 야심이 강한 모후의 섭정으로 정국운영에 주도권을 가지지 못하였다.
모후와 김치양의 권력독단은 조정의 기능을 상실시킬 정도로 심하자..
목종은 나름대로 김치양을 내쫓으려고 시도하였지만..
천추태후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는 김치양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정권에서 소외된 목종은 정사에 환멸을 느껴 소홀히 하고 남색을 즐기기 시작 하였다.
유행간이란 인물이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목종은 그의 용모를 사랑하여 그를 총애하였다.
목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게 된 유행간은 합문사인으로 오르게 되고..
목종의 측근으로서 정사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목종은 정사에 관해 항상 유행간에게 의논하였고, 항상 유행간의 뜻대로 정사가 이루어졌다.
왕을 조정하게 된 유행간도 점점 오만해졌고, 백관들에게 턱과 눈빛으로 지시를 하기도 하였다.
유행간은 유충정이라는 인물을 목종에게 소개해 주었다.
유충정은 발해출신으로 용모가 수려하여 목종의 눈에 들게 되었다.
유행간과 유충정은 이후 계속 정사를 좌지우지하였다.
목종12년(1009) 봄 숭교사를 다녀오던 목종은 폭풍을 만난 다음부터 심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며칠 뒤 연등회 도중에 기름창고에 불이 붙어 천추전에 화재가 나고..
궁궐 일부와 창고가 소실되는 일련의 악재가 겹치자 결국 병을 얻게 되었다.
병으로 누운 목종은 좀처럼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신하들도 만나지 않았다.
따라서 유행간과 유충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모두 왕명이 되었다.
목종은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자 대량원군(왕순)을 후계자로 결정하였으나,
유행간이 이를 반대하였다.
결국 목종은 채충순과 최항을 몰래 불러 자신의 뜻을 전함으로써..
왕의 총애를 받던 유행간과 유충정은 후계자문제결정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고..
강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고려 31대 공민왕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으로 충혜왕의 동생이었다.
그가 열두살이었을 때 고국을 떠나 원에 가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어릴적부터 문장이 뛰어날 뿐 아니라
글씨와 그림에 조예가 깊어서 후대인들도 격찬을 하였고..
당대 원 순제도 그의 재주를 상당히 아꼈다.
그래서 원 순제의 동생 패라첩목리의 딸 노국대장공주 보탑실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민왕은 이런 정략적인 결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노국공주를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공주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혜로우며 성품도 고와 공민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달콤한 신혼생활을 하였다.
공주는 항상 공민왕의 곁에서 그의 예술활동을 독려하여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고려 왕족이며 고려를 잊지말라고 환기시켜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공민왕이 어린 충정왕의 뒤를 이어 고려국왕으로 책봉되나..
원 연경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려 개경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고려로 와서도 곧 홍건적이 고려로 침입해와서 왕과 공주는 몽진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을때에도..
공민왕과 공주는 서로 의지하며 힘든 위기를 잘 헤쳐나갔다.
그리고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추진하며 친원세력들을 제거할때도..
원나라 공주였던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정책을 지지하여 주었다.
그러나 8년이 지났는데도 공주에게는 태기가 있지 않았다.
조정대신들은 종묘사직의 안위를 들며 새 왕비를 들일 것을 왕에게 간곡히 청하엿다.
공민왕은 이를 듣지 않았으나, 대신들의 압력이 점점 거세어졌고..
공주까지도 이를 청하여 결국 이제현의 딸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공주에게 이상한 징후가 나타났다.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헛구역질을 할뿐 영 구미가 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임신한 것이 분명했다.
공민왕은 뛸 듯이 기뻐했고, 자신이 새 비를 맞아들인 것을 후회하였다.
공민왕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공주의 곁에서 떠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중년의 나이로 어렵게 임신한 공주는 출산할 때가 되었을 때..
이슬이 보이고 크나큰 진통을 겪으며 앉지도 눕지도 못하엿다.
이렇게 난산의 고통에 시달린 산모를 지켜보는 공민왕은 안절부절 못하며 불안해 했고..
내원전 불당에서 아들도 딸도 필요없으니 공주의 목숨만 살려달라고 간곡히 기도드렸다.
결국 공주는 며칠을 진통하다가 공민왕14년 숨을 거두었다.
공민왕은 공주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슬픔에 잠겼다.
요승 신돈이 반혼법을 스면 죽은 공주를 다시 볼 수 있다고 하자..
공민왕은 기뻐하며 그렇게 해달라고 하였다.
몇번 반혼법으로 공주의 영혼을 만나게 해준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이후 정사도 뒤로 하고 남색에 빠져 사는 공민왕을..
모후 공원왕후 홍씨가 불러 궁궐안에 좋은 왕비들과 후궁이 많으니 마음을 잡으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눈물을 글썽이며 '공주만한 여자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은..
노국공주가 죽어서도 공민왕이 잊지못하고 방황할 정도였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고려시대의 정사나 야사 모두에서 너무나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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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 동성애 ‘보일 듯 말 듯’ |
| 고려 공민왕, 신라 사다함 등 사료에 모호하게 묘사 … 세종대왕 며느리들도 동성애 의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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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적 엄숙주의가 지배한 조선에서 동성애에 대한 서술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나 동성애가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신윤복의 ‘유곽쟁웅’은 질탕한 성풍속도이며, 김홍도는 ‘춘화’(상자 안)에서 매우 노골적으로 동성애 행위를 그렸다.
연산군의 남색을 다룬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여장 남자로 나오는 공길(孔吉)은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공길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운운했다가 불경하다는 이유로 귀양 간 ‘배우’다. 정사에서는 연산군과 동성애 사이라는 암시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 이는 원작자의 창작인 것이다.
이처럼 동성애에 관한 사료를 찾기는 쉽지 않다. 시대의 금기를 거스르며 나누는 사랑이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했고, 그 결과 관련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리학적 엄숙주의가 지배했던 조선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뜻밖에 세종대왕 시대에 동성애라고 의심받았던 사건들이 있다.
세종은 재위 동안 두 세자빈, 즉 며느리들을 폐출시켰는데 동성애 때문이라는 야사가 있었다. 첫 번째 세자빈은 판돈녕부사 김구덕(金九德)의 손녀이자 상호군 김오문(金五文)의 딸로 세종 9년(1427) 휘빈에 봉해졌는데, 2년 만에 폐출되어 사가로 쫓겨간다. 그러나 야사와 달리 ‘세종실록’ 11년 7월조에 드러나는 휘빈의 폐출 이유는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주술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평양 출신의 기생 하봉래에게 세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을 불에 태워 가루를 낸 뒤 술에 타서 마시게 하면 세자가 휘빈만 찾게 된다는 주술을 하다 쫓겨났다는 것이다.
세종은 휘빈을 폐출한 지 석 달 만에 종부소윤 봉여(奉礪)의 딸을 새 세자빈으로 간택하고 순빈으로 봉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세종 18년(1436) 11월 폐출된다. 이에 대한 세종의 설명은 학습 태만과 투기, 그리고 상중 음주였다. 여사(女師)로 하여금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는데, 잘 배우지 않고 투기했으며 부친의 상중인데도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폐출 이유를 설명하는 세종의 말에 세자빈 봉씨가 “혹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업고 뜰 가운데로 다니게 했다”라는 말이 있다. 즉 여종이 순빈을 업고 나다녔던 모습이 야사에 동성애자로 전하게 된 원인인지도 모른다.
사방지와 연산군
조선 세조 때는 사방지(舍方知)가 동성애인가 통간인가로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행상호군 이순지(李純之)의 딸이자 김귀석(金龜石)의 아내인 과부 이씨가 여러 해 동안 동침한 사방지가 여성이 아니라 여장 남자라는 혐의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세조실록’ 11년 6월조는 “(이씨가 사방지에게) 항상 여복을 입혀 여러 비녀(婢女) 속에 나란히 있게 하였다가 함께 동침하여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세조는 국문을 청하는 신하들의 요청에 “남자 같으나 실은 성년이 되지 않은 사람이다”라며 거부했다고 나온다. 양성에 가까운 인물로서 남성 구실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둘의 동침은 동성애가 될 텐데, 이에 대해 실록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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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 사다함과 공민왕
우리 역사 속에서 최초의 동성애자로 여겨진 인물은 화랑 사다함(斯多含)이었다.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조는 “사다함은 처음에 무관랑(武官郞)과 사우(死友)가 되기로 약속했는데 무관랑이 죽자 7일간 통곡하다가 그 또한 죽었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따라 죽은 것은 우정을 넘어서는 사랑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사다함이 죽은 것은 무관랑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지만 그보다는 빼앗긴 미녀 미실(美室)에 대한 상사병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고려사’ 세가(世家) ‘공민왕’조는 공민왕이 ‘꽃미남’ 경호부대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고 홍륜(洪倫) 등과 동성애를 나눴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왕이 “항상 스스로 여장을 하고, 한번 동하면 수십 명을 갈아치웠으며, 홍륜에게 여러 왕비를 강간케 했다”고까지 전한다. 익비(益妃)가 거절하자 공민왕이 칼을 뽑아 치려고 하니 왕비가 겁나 복종했다는 것이다. ‘고려사’ 열전 ‘조준(趙浚)’조는 “인간의 도가 말살되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는 한탄도 곁들인다.
그러나 정조 때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 ‘고이(考異)’편에서 “조준은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었으니 그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궁중의 비밀과 방 안에서 희롱한 일을 사관이 어떻게 알고 기록하였겠는가?”라며 조선 개국공신들이 지어낸 말을 사신(史臣)이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고 부정했다.
‘고려사’가 우왕(禑王), 창왕(昌王)을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며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처럼 조선 개창을 합리화하기 위한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역사 사료상으로 살펴본 동성애는 대부분 모호하게 묘사된다. 다양성과 개인주의가 정당화되는 현재도 동성애는 사실상 사회적 금기로 인식되지 않는가. 다수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특수성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인정할 때 동성애는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