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아무런 설명도 없는 상태에서 감상을 하고, 설명을 들으며 감상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감상했다.
1전시장의 박기원-북극. 휑했다. 아. 정말 휑해서 북극이구나.
차갑고 날카로운 공간 배치물의 느낌만을 생각하고 돌아나왔다.
설명을 들으니, 귀여운 작가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이가 어린 작가분일 줄 알았다.(작가분의 연령대를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 벽 그 자체를 작품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와 합일화를 시켜버리는 작업이었는데,
얼음을 상징하는 에어볼과 투명한 창문을 결합시키는 것은 즉석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고.
공간활용을 효율적으로 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겁많은 작가라는 해석을 하게도 하는 것 같다. 마치 교과서의 타이틀에 낙서를 그려넣어 전혀 엉뚱한 의미로 바꿔버리는 아이같은 천진난만한 위트가 보였달까. 세상을 자신의 작품으로 끌어들이는 포용력이 있고, 그것에 순응하는 부드럽고 넓은 세계를 가졌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세상을 내 식대로 바꿔버리는 이기심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름답고 순수할 수는 있지만, 그만큼 작품 속에 힘이 담기지 않았다는 점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다.
2전시장의 김승영&오윤석-벽. 네 개의 벽이 만들어낸 구조와 상징만을 생각하느라 나머지를 볼 여력이 없었다.
말 그대로 벽을 쌓아놓은 그곳이, 처음엔 거대한 단절로 느껴졌었는데.
설명을 들으며 가장 새로운 시점으로 접근하게 된 작품이었다.
2전시장은 다른 전시장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통로적인 전시장이란다.
그것을 들은 작가는, 벽을 세워 통로를 만든다, 는 중의적인 의미를 작품에 담았다.
세 개의 사운드를 섞어 울림으로서 공간을 장식한 그 작품은 누구나 지나가지만,
뒤돌아보면 하나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숨바꼭질같은 매력 또한 가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설명을 너무 잘해줘서 오오 오오 오오오. 하고 느끼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재료인 벽돌과 시멘트를 재료로 사용한 점,
통로인 2전시장에서만 의미가 있는 작품이고, 그 밖의 장소에서는 그저 사물에 불과한 작품이라며, 전시 후에는 그냥 부숴버릴 예정이라고 작가의 뜻도 전해들었다.
하. 멋있잖아.ㅋ
정말로 공간 하나를 통째로, 그 벽, 그 위치, 그 공기까지 작품으로 활용하고 있는 거다.
2전시장 안의 공기를 울리지 않으면 사운드이펙트는 그저 소리가 되어버린다.
찰나의 무대. 유한성을 가진 작품이기에 더욱 의미를 가지게 된 케이스였다.
(소마 미술관 자체에 가장 의미를 부여한 작가는 이 분인 듯 하다)
3전시장의 지하루&그라함-인공생태계:이중의 시간.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멍하니 구석에 배치된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지켜보았다. 제목 그대로, 생태계-
어떠한 우주를 바라보는듯한 먼 풍경의 기하학적인 모습과 빛을 표현한 스크린이 참 아름다웠다.
암막커튼 안으로 들어선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그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생물의 움직임과 분열과 소멸은 생과 사를 조영하는 거대한 작품이었다.
나중에 설명을 들으니, 센서로 사람을 감지해 사람에게서 나오는 에너지를 노랗게 형상화시키고, 그걸 먹는 미생물, 미생물을 먹고 사는 뱀, 뱀의 허물에서 생성되는 세상의 모형. 이것이 모두 연계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끊임없이. 이것은 관람객을 작품의 일부로 만들어버리고, 이 세계와 가상세계의 구분을 허물어버리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어디까지나 한 발짝 뒤에서 감상하게끔 하는 것이 보통의 작품이 가진 이미지인데, 이 작품은 작품이 먼저 손을 내밀어 관람객을 이끌었다. 와. 그리고 나는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작품 속에 있었다. 작품이 되었다. 생태계의 하나가 되었다. 현실의 나 역시 생태계의 한 존재이며, 내가 딛고 선 전시장의 바닥은 현실이다. 그러나 작품 속의 생태계에도 내가 있었고, 그 유동성을 가진 세계는 현실의 바닥과 이어져 있다. 벽이 존재하되, 벽이 사라진 형태였다. 벽의 의미를 실종시켜버린, 반항아적인 작품이었다. 유쾌하면서도 거대한 상상력은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참, 좋았다.
4전시장의 이승애-원더월. 솔직히 집에 올때까지도 별 생각 없고, 머리에도 남지 않는 작품이었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냥 무의미해 보이는 가변적 형상들의 연속일 뿐이었고, 설명을 들은 후에도 그냥 그렇구나...였다.
그런데 집에 와서 가만히 되짚어보니, 와. 맙소사. 이 작가도 벽의 한계에 대해 굉장히 많이 고민했구나, 뒤늦게야 깨닫고 허탈하게 웃었다. 스스로 굉장히 섬세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이런 둔탱이.
작가는 자칫 건드리면 찢어져버릴만큼 아슬아슬한 천으로 만든 벽을 쳐놓고, 자신이 여행중에 모은 장식품, 아끼는 소장품 등을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자로 표현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 결국 벽 바깥쪽에 진짜 작품이 있으며, 당신들은 벽 안에서 그 실루엣 정도밖에 보지 못한다는 상징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뭘까. 결국 벽과 현실이 가진 한계점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모놀로그일수도, 사실 벽이란 건 아무렇지도 않게 걷어버리고 작품의 세계로 뛰어들 수 있는 별거아닌 것이라는 주장일수도 있겠다. 어느쪽이든간에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품과의 거리, 작품세계의 실체를 고민하게 만든 작품이다. 진짜 별거아닌 작품으로 생각하고 지나치려 했던 나를 반성한다.
5전시장의 박기진&임승천-숨. 아....아아. 아. 이 작품은 유일하게 설명을 듣지 않았다.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작품은 보이는 순간 이미 완벽하게 관람객에게 와닿았다. 혹시 내가 발견하지 못한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작품과 조우한 순간 온몸을 사로잡았던 감동의 변색이 두려워 설명을 피했다.
참 역동적이며 생동하는 작품이었다. 단순히 숨쉬고 있는 것은 중앙 구조물뿐만이 아니었다. 심장-또는 숨소리를 연상시키는 육중한 소리가 닿는 구석구석, 조명효과가 비추는 모든 공간이 다 작품이었다. 이제까지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공간이 밀도있게 채워진 작품이기도 했다. 전시장과 똑같은 하얀색으로 만들어진 설치물은 연결된 하나의 물체처럼 보이게 했고, 그 결과 하얀 심장이 뛰는 하나의 몸이 되었다. 무언가를 차단해 나누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의미로서 벽을 변모시켰다. 단순히 소리, 빛, 움직임 하나로.
참 직설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성격으로 치자면 북극과 정반대되는, 사고깨나 칠 것 같은, 철부지의 자신감으로 세상에 맨몸으로 부딪치는 느낌. 나는 아직 어리고, 내 심장은 약동하며, 내 피는 뜨겁다. 그러므로 이 벽의 고동에 공명과 안도와 간지럼같은 흥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전시에서 작가들은 제각기 벽을 고민한다.
벽을 허무는 작가, 벽을 변형시키는 작가, 벽과 어우러지는 작가.......
제각기의 해석대로 벽을 다루었지만, 미술관이 제시한, 벽과 소통에 대한 과제는 모두가 훌륭한 해답지를 찾아 제출했다고 생각한다.
좋았다, 온몸으로 표현하는 의미들이.
낙서처럼 끄적인 단상들입니다.
전 이제부터 부끄러움이 가실때까지 잠수하겠습니다. 안녕히 안녕히ㅠㅠ
첫댓글 우야님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셨다니... ^^ 글솜씨도 좋으시고 멋져요. 저는 별생각없이 본 것 같아 부끄럽네요.. ^^;;우야님 글 보고 다시 한번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 감솨~
앗 옆동네사는 마틸다님! 감사합니다. 그냥 떠오르는걸 두서없이 적은것 뿐이에요~
귀요미 우야 왔었구나~ 17일에 시간되면 다다님 벙개서 얼굴봐요
앗. 박하님!! 왜 박하님 이번에 안오셨어요...17일 시간되면 꼭 갈게요.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될 듯~!
감사합니다. ㅎㅎ
길다...........ㅡ.ㅡ;;;
언제 다 읽을수 있으려나..............ㅎㅎㅎ
안읽어도 됩니다!!!!!
아니 안읽으시길 빕니다.ㅠㅠ
ㅋㅋ
참 역동적이시면서 생동감 있으신 우야님이시군요................ㅋㅋㅋ
아직 안 읽었는데 잠시 눈에 띄는 문장이 있어서..........ㅎㅎ
아스킬님,,빨리 읽어보셔.
좋은글이야~~
살아있는 생물같은 후기..고맙습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ㅠㅠ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5 전시장에 대한 해석과 느낌이 너무나 귀엽구 재밌어요. ^^ 잠수 멈추시고 ~ 하늘을 날아다니셔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