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현장, 서울의
경승지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렸던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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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웃대) 한복판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한양도성(漢陽都城)에
오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의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기린교와 공원 일대)을 예로부터
수성동이
라 불렀는데, 이는 계곡에 걸린 기린교 밑의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물소
리가 좋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仁王山)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제법 있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운동), 청계동천(淸溪洞天, 부암동) 등이 명소로 꼽혔으나 개발의 칼질로 죄다
쓰러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히 살아남은 것을 2012년에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그 외에 환희사계곡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죄다
볼품은 없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8)이 그린 장
동팔경첩(壯洞八景帖)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인왕산
자락인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淸雲洞) 일대를 말하며, 북촌(北村)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집과 별장을 짓고 살던
금싸라기 땅이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
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만 살아남았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사람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문무(文
武)를 겸비하고 풍류의 1인자였던 안평대군은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으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을 지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그림을 보면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
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
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 속의 골짜기가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서 접근성도 아주 착
하다. 하여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
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
활동)의 성지(聖地)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으며 장안의 경승지로 큰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과 장동8
경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이 개발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오로지 개발 밖에 모르던 천
박한
개발의 칼질은 장동8경의 태반을 가루로 만든 것이다. 대은암 같은 경우는 그 칼질에 희
생되지는 않았으나 엉뚱하게 군사작전지역에 묶이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수성
동도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계곡 중류 일대에 들어서면서 참으로 아름답던 그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인근 청풍계나 청계동천처럼 계곡이 대부분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
트로
인해 계곡의 폭도 줄어들었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
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또한 옥인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
하를 거쳐 역시나 생매장 신세가 되버린 청계천(淸溪川)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가는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을 정도로 명성은 크게 하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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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동계곡 사모정 |
▲ 기린교 돌다리 |
개발의 난도질로 태어난 옥인시범아파트가 계곡을 건방지게 깔고 앉으면서 수성동계곡은 40년
가까이 어둠에 묻혀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원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은 오는가? 수성동에게는 그야말로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이, 수성동에게도 끝내 좋은 소식이 날라왔
다.
계곡을 깔고 앉던 옥인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
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발일변도(一邊倒)로 일관하던 세상도 조금은 변하면서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가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되살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여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으면서 뒤
늦게나마 문화유산의 대우를 받게 된다. (서울의 계곡 중 최초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됨)
이후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모두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두 철거되었다. 그
리고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여 그해 여름부터 복원 공사에 착수, 1년 동안 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완성을 보면서 시민공원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개발의 칼질에 날라간 계곡을 살리고자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으며, 옛 경
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와 참나무, 산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다.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그 외에 돌단풍, 띠,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
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인 사모정을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게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
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늙은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
성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비록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
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이 계곡은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기분 같아서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좋겠지
만
이미 회색빛 시가지가 가득 들어차 지금으로써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계곡이 생매장
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로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으며,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
하다.
그래도 수성동의 혜성(彗星)과 같은 재등장으로 서울 도심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하나 늘었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
니 어설프게 재현된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이다.
수성동계곡의 범위는 보통 공원 일대 계곡과 기린교를 일컫지만 인왕산길에서 공원으로 내려
가는 계곡도 수성동 범위에 들어간다. 그 계곡이 있기에 수성동계곡도 있는 것이다. 비록 재
현된 폼이 낯설기는 하나 그것은 장차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옛날의 경치도
슬슬
피어오를 것이요. 도심 속의 상큼한 피서의 성지(聖地)로 잃어버린 왕년의 명성도 되찾
을 것이다.
* 수성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85-3 |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 - 기린교(麒麟橋)
칼로 싹둑 손질을 했는지 바위들이 90도 절벽을 이루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다. |
넉넉한 폭으로 흐르던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이전에서 급격히 좁아지고 하얀 피부의 반석들도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계곡 쪽에 빚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낭떠러지 바위
사이에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짧은 돌다리가 고색의 때를 간직하며 놓여져 있는데, 이
다리가
바로 수성동의 오랜 명물인 기린교이다.
기린교는 길쭉한 통돌 2개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리 남쪽에 다리를
보조하는 커다란 돌 여럿을 둔 것이 전부이다. 다리 폭은 1m 남짓, 길이는 3m로 언제 조성되
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다리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적
어도
17세기 이전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계곡을 찾은 귀족과 사대부들의 편의를 위해 닦은 것으로 보이는데, 벼랑으로 이루어진 이 부
분이 계곡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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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는 광통교(廣
通橋)이다. 그리고 수표교(水標橋)와 창경궁(
昌慶宮) 옥천교(玉川橋)가 2위, 3위에 들어간
다.
(중랑천 살곶이다리는 도심이 아니므로 제외)
수표교는 청계천 생매장 때 제자리를 떠나 장
충단공원에 둥지를 틀었고, 광통교는 비록 자
리는
지켰지만 생매장의 치욕을 겪다가 청계천
복원
때 약간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에 반해 기린교는 그들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제자리를 지키며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통돌로 만든 다리
가
운데 가장 긴 편이다.
◀ 높은 벼랑 위에 걸쳐진 기린교 |
▲ 정면에서 본 기린교의 위엄
▲ 바로 앞에서 본 기린교
다리 너머로 수성동계곡의 생매장 현장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