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한방편들로써 일단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수행체계라는 점에서 일단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과 도의 세계가 언어로써 논리로써 때로는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영역이기에, 문화와 생활 양식의 차이에 따른 집단무의식적 주관의 차이를 기본으로 함을 우선 전제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주관적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믿음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의 이후는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름이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어쨋든 다양한 수행법들이 각기 가지고 있는 방편들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비교해볼 필요가 있는데,
丹學이란 동북아시아권을 중심으로 발달한 수행법으로서 丹田呼吸法을 중시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단학에 있어 제일 중요한 개념은 역시 단전과 精氣神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가도 그러하지만 정신집중을 동반하는 호흡법을 위주로 하는 이러한 수행체계에서는 주로 보다 근원적인 생명에너지(중국에서의 氣, 인도에서의 프라나)의 각성을 추구한다. 단학의 도인술 및 호흡법이나 요가의 아사나와 프라나야마는 모두 이것을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단전은 바로 이 생명에너지의 가장 중요한 집결지라 할 수 있다. 단전에는 상중하의 세 가지가 있지만 흔히 우리가 말하는 단전은 하단전이다.
단학수련을 하면 수행 도중에 따뜻한 느낌, 뜨거운 느낌, 시원한 느낌, 짜릿한 전기의 느낌 등의 여러 형태로 氣感을 체험하게 된다.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기를 운용하여 병을 치료하고 건강과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일부는 기의 각성에 의한 몸의 진동이나 자발적 퓻작을 체험하기도 하고 환영이나 투시, 예시 등의 초현상들을 체험하기도 한다. 또한 극소수이지만 양신을 만들어 출신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는 무리한 수행과 잘못된 운용으로 인하여 도리어 건강이 악화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폐인이 되기도 한다.
수행법은 대략적으로 생명에너지의 각성을 보다 중시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의식의 각성을 보다 중시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단학과 요가(여기서는 하타요가 및 쿤다리니요가 부류를 말함)는 전자에 귀속된다. 우선 서로 비슷한 단학과 요가를 비교해보자. 일단 기와 프라나는 거의 같은 것을 지칭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단학에 있어서의 정과 신에 정확하게 대응시킬 수 있는 것은 요가에는 없다.
하단전 또한 요가의 스와디스타나 차크라에 대응시킬 수 있으나 엄밀하게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기를 임맥과 독맥을 따라 순환시키는 소주천에 대한 개념이 요가에는 없다. 요가는 척추를 중심으로 하여 일곱 챠크라 밖에 없기 때문에 돌릴 수가 없다. 사치다난다가 쓴 <Kundalini Tantra>에 보면 소주천과 비슷하게 프라나를 앞으로 뒤로 돌리는 수행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소주천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단학의 양신이니 출신이니 하는 것은 요가에는 없다. 대신 쿤다리니라고 하는 것은 요가에는 있으나 단학에는 그에 대응하는 것이 없다.
요가는 인도티벳권을 중심으로 발달한 수행법이다. 요가는 단학에 비해 수행방법이 다양하고 폭이 넓은 편인데,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냉철한 지혜의 힘으로 무지와 집착을 끊어 깨달음에 이르는 지나나 요가이고, 둘째는 신에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에고를 소멸시켜 깨달음에 이르는 박티 요가이고, 세째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어떠한 기대나 집착을 끊고 순수한 행위를 함으로써 행위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까르마 요가이고, 네째는 효율적으로 육체와 정신을 다스리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신체정화법 및 명상법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라자요가이다. 이 라자 요가에는 수행방법의 특징에 따라 진언을 위주로 하는 만트라 요가, 도형에 대한 집중을 위주로 하는 얀트라 요가, 자세와 호흡법을 위주로 하는 하타 요가, 쿤다리니의 각성을 전문으로 하는 쿤다리니 요가, 요가수련의 단계를 여덟단계로 나눈 아쉬탕가 요가 등의 다양한 이름의 요가가 있다. 이 중 단학과 가장 유사한 것은 쿤다리니 요가이므로 여기서는 이것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요가에 있어 중요한 개념은 단학의 氣에 해당하는 프라나, 프라나가 흐르는 통로인 나디, 프라나가 집중적으로 모이는 센터인 7개의 차크라, 그리고 우리몸 속에 내재해있는 우주창조의 원초적인 힘인 쿤다리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쿤다리니는 쿤다리니 요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요가 수행에서 중시되는 것으로서 척추 맨 아래에 있는 챠크라인 물라다라 차크라에 숨어있다고 한다.
요가 수행의 핵심은 물라다라 차크라에 있는 쿤다리니를 정수리에 있는 사하스라라 차크라에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있다. 물라다라 차크라에 숨어 있는 우주창조의 힘인 샥티, 즉 쿤다리니는 음에 해당하는데 이것이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숨어 있는 우주의 절대정신이자 양에 해당하는 시바와 만날 때 진정한 우주적인 음과 양의 합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때 사하스라라 차크라는 완전히 열리고 수행자는 우주적 삼매에 든다. 그리고 수행자는 개아의식을 여의고 우주의식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요가수행의 완성의 경지이다. 그런데 쿤다리니를 중심으로 하는 요가수행 또한 단학과 마찬가지로 수행방법이 복잡하고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스승의 지도없이 혼자서 행하는 경우 상당한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요가와 단학은 수행방법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수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도 서로 다른 점이 많다. 그러나 그보다는 요가와 단학에서 말하는 미세한 몸(subtle body, 즉 육체보다 섬세한 몸으로서 피와 살 뼈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프라나 내지는 氣, 나디 내지는 경락으로 이루어진 몸)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프라나는 단학의 기와 거의 비슷한 개념이지만 7개의 차크라는 단학의 3개의 단전이나 임맥 독맥의 52경혈과 대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가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쿤다리니라는 것은 단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서로 차이가 날까? 사실 단순한 수행 방법상의 차이라고 한다면 별 문제가 안되지만 아예 미세한 몸 자체가 다른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인도인이나 동북아시아인 중에서 어느 한 쪽이 잘못 보기 때문일까? 다만 현대과학이 아직까지도 이것들을 확실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원래 미세한 몸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각기 자기가 속해있는 문화권의 집단주관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서로 다르게 보고 있을 따름이다. 집단주관이란 이름 그대로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집단적인 주관이다.
요가나 단학의 수행을 통하여 우리는 평소 이 물질계만이 세계의 전부이고 육체만이 나라고 고집하는 좁은 시야를 깨고 더 깊은 세계와 나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분명 단순한 환각이나 주관적 착각이 아니라 한 차원 더 깊은곳에서 분명히 실재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하여 체험하는 세계, 예컨대 기감이라든지 초의식 등은 보다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 색안경의 지배를 더욱 많이 받는다. 이 경우 그러한 현상 가운데 순전히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쉽사리 그것이 개인적인 착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것이 주관적 착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 체험의 세계는 대부분 객관적 실재에 집단주관적 착각이 겹쳐있는 것이다. 프라나 내지는 기와 그것이 흐르는 통로인 나디 내지는 경락, 그리고 그것이 모이는 센터인 차크라 내지는 경혈 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여러 형태의 집단주관의 색안경을 통하여 그 모습들을 보기 때문에 그 실재적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다양한 수행방법이 생기고 한 지역이나 문화권 내에서도 또 여러 파로 다양하게 나뉘어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의식의 구조는 자기중심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가 속한 집단의 것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따라서 서로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비파사나는 석가모니가 가르쳤던 행법으로서 흔히 사마타와 한 짝으로 거론된다. 사마타는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漢譯으로는 止 혹은 寂靜 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정신 집중법을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면의 빛이나 眞言 등의 어느 특정한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여 내적 황홀경이나 지고의 평화와 고요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석가모니 이전의 인도의 수행법들은 전반적으로 이 사마타 위주의 수행법이었다. 석가모니는 이 사마타로는 최후의 궁극적인 경지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겨 비파사나라고 하는 새로운 양식의 수행법을 개발하였다. 비파사나라는 말은 여러 가지 현상들을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漢譯으로는 觀 혹은 種種觀察 이라고 한다.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고요를 얻기 보다는 여러 현상들을 관조함으로써 통찰력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사마타와 비파사나는 둘 다 마음을 각성시키는 것을 위주로 하는 수행법이다. 물론 앞에서 거론한 丹學이나 쿤다리니 요가도 모두 마음을 중시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마타와 비파사나는 보다 본격적으로 마음을 각성시키는 것을 강조한다.
남방불교의 비파사나는 四念處觀을 위주로 한다. 四念處觀이란 몸, 감각, 마음, 法을 대상으로 하여 거기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그 속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의 세가지 진리를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四念處觀은 먼저 몸에 대한 관찰로부처 시작되고, 이것은 보통 呼吸觀으로 시작된다. 호흡관은 코끝에 의식을 집중하여 숨이 들어오고 나감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서 숨을 들이마실 때 자신이 숨을 들이마신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을 내쉴 때 자신이 숨을 내쉬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법이다.
비파사나 수행을 계속 하다보면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많은 현상들이 나타난다. 눈 앞에 강한 빛이나 여러 가지 환상이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악기나 사람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황홀감과 환희심이 터져나오기도하고, 지고의 평화와 고요를 체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특별히 氣를 각성시키는 도인술이나 호흡법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氣의 각성을 체험할 수 있다. 비파사나 수행에서는 어떠한 현상을 체험하더라도 그 현상에 얽메이지 않고 단지 그 현상들을 알아차림으로써 자신의 마음 전체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는 것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본질을 깨달아 궁극적인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화두선은 선종의 수행법 가운데 하나이다. 선종의 수행법은 크게 묵조선과 화두선으로 나누어진다. 묵조란 말은 고요히 비추어본다는 뜻으로 묵조선은 내 마음을 고요히 비추어보아 내 마음의 당체를 확연히 깨우치는 것을 강조한다. 화두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말의 실마리 내지는 화제 등의 의미이지만 선종에서는 수행의 주제 거리를 가리킨다. 화두선에서는 하나의 주제를 집중적으로 의심하여 그것을 풀어냄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묵조선 수행법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존의 불교의 수행법과 상통하는점이 많다. 이에 비해 화두선 수행법은 이전의 불교적 전통에는 전혀 없던 새로운 수행법으로서 중국의 선사들이 새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두선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은 信心, 疑心, 憤心이다. 화두를 통하여 깨치려면 반드시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 먼저 화두선의 전제조건은 신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신심이 없으면 처음부터 화두선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심이 없이 화두를 보면 그것은 단순한 언어의 유희나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 된다. 화두선의 두번째 관건은 의심이다. 예로부터 선사들은 화두선의 가장 큰 관건을 의심이라고 보았다. 의심 덩어리가 커야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분심이란 발분하는 마음이다.
한가지 의심이 가슴에 사무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냥 이런 저런 잡생각 다 하고 남는 시간에 간간이 의심해서는 몇십 년을 해도 깨칠 수가 없다. 반드시 이 의심을 풀고야 말겠다는 사생결단의 분심이 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제치고 오로지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사무칠 수 있고 이렇게 화두에 대한 의심이 사무쳐야 밥을 먹으나 길을 걸으나 항상 화두를 잡을 수가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잠을 자나 깨어 있으나 항상 화두만 잡고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신심, 의심, 분심이 서로 조화가 되어 行走坐臥 寤寐之間에 오직 화두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때 어느 순간 화두가 풀리면서 깨치게 된다.
그러나 비파사나의 깨달음이 그러하듯이 화두선의 깨달음 또한 집단주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요가의 깨달음이나 수피즘의 깨달음이나 기독교의 영성체험 또한 마찬가지이다. 각기 집단주관의 엷은 베일을 지니고 있다.
요가, 단학,비파사나, 참선, 수피즘, 묵상 관상 등의 수행법을 통하여 얻은 깨달음이 밖으로 표현될 때는 제각기 자신의 문화권의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그 속의 내용은 한결같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밖으로 표현될 때에만 집단주관의 틀이 작용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체험 자체가 집단주관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어떠한 궁극적인 체험을 하여도 주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절대 객관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이것은 결코 기존의 깨달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 차원 높은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한 전제일 따름이다.
하나의 종교에는 그 종교의 성격을 규정짓는 경전, 교리, 의식 등의 외적 틀과 아울러 그 종교의 힘을 유지시켜 주는 내적 수행법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아무리 좋은 경전, 완벽한 교리, 장엄한 의식이 있어도 내면적 힘이 없는 종교는 오래 갈 수 없다. 수행은 의식을 고양시키고 믿음을 더욱 심화시켜 주기 때문에 그 종교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도 매우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묵상관상은 기독교의 신비주의 수행법이고, 수피즘은 이슬람 신비주의 수행법이다. 묵상은 관상에 나아가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묵상에도 두 단계가 있는데 하나는 추리 묵상이고 하나는 감성 묵상이다. 초기에는 주로 추리 묵상을 많이 하다가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감성 묵상으로 넘어간다. 추리 묵상은 주로 우리의 이성과 상상력을 사용하여 성경에 나와 있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의 이성이나 상상력을 동원하여 묵상을 하지만 이것이 점점 깊어지면 이성이나 상상력은 점점 사라지고 묵상의 주제가 마음속에서 저절로 감성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 단계가 바로 감성 묵상의 단계이다. 추리 묵상에서 감성 묵상으로 나아가면 이성적인 사유나 추리 활동은 점점 정화되어 감성적인 느낌이 주로 활동한다.
이 단계에서는 감사, 기쁨, 경탄, 봉헌, 사랑 등의 감성적인 활동이 수행자의 가슴에 넘쳐흐르게 된다. 여기까지는 보통의 신앙인들도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성 묵상의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감성마저도 점차 정화되면서 묵상보다 한 차원 높이 올라간 관상의 단계에 이른다. 관상이란 성령의 작용 아래 하나님과 보다 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관상은 크게 수득관상(修得觀想)과 주부관상(注賦觀想)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수득관상이란 닦아서 얻는 관상이란 뜻으로 수사가 개인적인 의지로 수도를 함으로써 얻는 관상의 경지를 말하고, 주부관상이란 물을 붓듯이 주는 관상이라는 뜻으로서 수사의 노력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관상을 말한다. 전자가 능동적인 관상이라면 후자는 수동적인 관상이다. 카톨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를 동등하게 보지 않고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깊고 본질적인 관상으로 본다.
관상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떠한 이성이나 감성의 작용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영혼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합일에 이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둘은 사실 하나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성이나 감성의 작용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외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와 완전히 하나임을 알게 될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피의 수행법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지크르(Zikr)라고 하는 명상법이다. 지크르란 기억하다 는 뜻이다. 즉 항상 신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는 매순간 알라 외에는 없다 라고 소리친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입으로 하는 소리이지만 나중에는 마음의 소리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알라를 기억함으로써 수행자는 일상의 마음으로부터 점점 더 깊은 내면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 지크르는 수피춤이라고 하는 춤을 추면서 행하면 더욱 강렬한 효과를 볼 수도 있다. 이슬람의 수피들은 매순간 지크르를 행함으로써 산만하고 외부의 쾌감에 젖어 있는 마음을 일깨우고 그 깊은 곳에 있는 신을 자각하려고 한다. 끊임없이 신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에 신이 자신과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온다. 이것을 큐브르(Qubr)라고 한다.
이것은 오로지 신을 향한사랑으로 세속의 모든 욕망과 쾌락을 버린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지에만 이르러도 상당한 경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야한다. 꾸준히 수행을 계속하면 큐르브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되다가 신을 찾는 행위와 신을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인 신이 하나가 되는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을 마합바(Mahabba)라고 한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객체가 하나가 되는 것은 세계의 여러 수행법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마합바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식의 주체가 사라지는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이 상태를 화나(Fana)라고 부른다. 화나 상태는 신 속에서 에고가 완전히 죽어버렸다는뜻이다. 이 화나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자신이 항상 신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상태를 바카(Baqa)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수피들이 추구하였던 최고의 상태였다.
묵상관상과 수피즘에서 얻어지는 최고의 경지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의 현존을 인식하거나 또는 그 신 속에서 자신의 에고가 사라지는 경지이다. 이것은 결국 그 신과의 합일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체험을 하여도 주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절대 객관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지고하고도 초월적인 체험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식 주체가 있는 한, 즉 살아있는 한 그 속에는 주관성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궁극적인 본체를 체험하는 순간에도 주관적 틀을 완전히 벗지는 못한다. 이것은 마치 현대 물리학에서 아무리 완벽한 실험기구와 측정방법을 갖추어도 관찰자의 입장을 100 퍼센트 배제한 객관적인 관찰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요기들의 사마디, 선사들의 깨달음, 남방선사들의 닙빠나, 수피나 카톨릭 수사들의 신성의 체험들은 그것이 아무리 굉장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깨달음에도 그가 속한 문화권의 집단주관적 틀과 개인 주관의 틀의 흔적이 약간씩은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깨달음이라 불러왔던 그 체험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주관적 착각에 그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원래 모든 유한한 개체는 본질적으로 무한한 전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 무한한 전체성을 종교에 따라 佛性이 라고도 하고 神性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하나의 개체인 동시에 거대한 전체인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전체성을 알지 못하고 유한한 개체성이 자신의 전부이자 원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수행의 세계에 입문하면 여러 가지 초상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나아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무한한 전체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경지에서 자신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종점에 가까운 것은 틀림없지만 결코 종점은 아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완전한 깨달음인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 인식의 주체가 소멸할 때 완전한 깨달음이 이루어진다. 아무리 초월적인 깨달음을 얻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인식의 주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육체는 죽어도 인식의 주체는 소멸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완전한 깨달음이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굉장한 체험을 하였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향하여 다시 묵묵히 그리고 겸손하게 나아가야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지금 이 순간 완전한 깨달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찾아 끝없는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목적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이미 길을 가던 그 자는 바로 지금 현재의 이 순간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다만 최선을 다하여 나아갈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과 수행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