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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아, 강문영씨. 파리에서 언제 돌아왔지?"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MBC-TV의 신승호PD선생님이었다. 당시 MBC-TV <쇼 2000>의 연출자였던 신선생님은 역대 MC가 총집합하는 특집프로를 기획중인데 출연해달라고 했다.
파리생활에서 온 피로를 풀고 기분전환도 할겸 출연하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연예계는 다시 발을 들여놔선 안된다"며 결사 반대였다. 아무리 졸라도 안돼 "이번 출연이 마지막"이라는 서약을 하고 겨우 승낙을 얻어냈다.
신승호PD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가수, 매니저인 이영달선생님을 소개받았다. 그분은 당시 가수 나미씨의 일을 보고 있었다. 그분이 나중에 나의 연예활동을 돌봐줄 매니저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신승호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이번에 MBC신인탤런트 시험이 있는데 한번 응시해보는게 어떠냐"고 했다. 이영달선생님도 "틀림없는 탤런트 감"이라면서 맞장구를 쳤다.
탤런트? 이미 3편의 영화출연 경험이 있는 나로선 그리 생소한 직업도 아니었다. 또 다시 연예인이 된다면 엄마, 오빠가 어떻게 나올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주저하다가 탤런트 응시원서를 내고 말았다. 엣다 모르겠다. 일단 시험이나 치러보고 결정하자.
실기시험장에 들어섰다. 표재순선생님(현 SBS 전무이사)을 비롯한 낯익은 PD선생님들이 심사위원으로 앉아 계셨다. 간단한 대본을 받아쥐고 심사위원들 앞에 서서 연기를 했다. 이때 내 모습은 마치 마네킨처럼 보였다는 후문이다. 커다란 눈망울에 훌쩍 큰 키 때문이었으리라.
자그마치 2백대1의 경쟁률을 뚫고 마침내 MBC 제 18기 탤런트 시험에 합격했다. 물론 6개월간의 <쇼2000> MC경력과 영화, CF출연으로 낯익은 점이 큰 덕을 봤으리라. 18기생 탤런트 중에서 TV출연경험이 있는 사람은 나와 채유미 단둘이었다.
1년간 연수생활이 진행되었다. 너무 지루해 견디기 힘들었다. 난 강의 듣는 일에는 소질이 부족한 것일까. 동기생 중에선 비교적 박상원오빠와 정혜승이와 잘 지내는 편이었다. 특히 상원오빠는 반장을 맡았는데 나와 짝이 되어 강의를 들었다.
하도 수업이 지루해서 우린 가끔 장난을 쳤다. 사다리 그리고 '점심 사주기' '커피 사주기' '영화 보여주기' '꽝이야'등의 장난을 자주했다.하루는 상원오빠와 사다리 그리기에 한창 열중인데 강의하시던 PD선생님이 "너 일어나, 내가 방금 설명한 것 무슨 얘기인지 자세히 말해봐"하며 노려 보시는게 아닌가. 난 아무말도 못하고 머리를 긁었고 강의실은 순간 웃음바다로 변했다.신인탤런트 수업태도가 불성실한 나에게 박상원오빠는 자주 충고도 하고 조언도 많이 해주었다. 단체생활의 화합을 위해 어떻게 하는게 옳은가에 대해 설득력있게 역설했다. 참으로 고마웠다.
지루한 연수생활을 벗어날 기회가 왔다. 코믹영화 <서울 손자병법>출연요청이 왔고 난 방송사에 떼를 써서 승낙을 얻어냈다. 요즘 신인탤런트들 같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지만 그때만 해도 다소 융통성이 있었다.
묘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난 간절히 기원하면 성취되는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신통력이 있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케이스가 많았다. 그리고 이상한건 나의 '꿈과 예감'은 거의 적중한다는 사실이다. 걸프전이 발발하기 며칠전에도 흉몽을 꾸었다. 넓은 도로에서 갑자기 흙탕물이 쏟아져 흘러내렸다. 하도 기이해서 해몽책을 뒤져보니 "온 세상이 시끄러운 일이 생길 꿈"이라 적혀 있었다. 그러더니 곧 걸프전이 터졌다.
사람이 죽는 꿈을 꾼 며칠뒤면 틀림없이 큰 돈을 손에 쥐는 일이 생긴다. 예를 들면 CF계약같은. 좋은 꿈을 꾸고 나면 얼마안가서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는데 입밖에 내지 않고 혼자 새기곤 한다. 반면 불안한 예감이 들면 꼭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곤 해서 미리 대처하려 애를 쓴다. 심지어 선배, 동료 연기자들의 꿈도 꾸는데 맞는 경우가 많았다. 선배 H언니의 쓸쓸한 모습을 꿈꾼후 곧 이혼기사가 실린 적도 있다. 그렇다고 난 결코 특이한 사람은 아니다. 이런 말을 늘어놓고 나니 독자들이 어떻게 볼까 괜히 걱정스럽다.
아무튼 영화 <서울 손자병법>덕분에 왔다갔다 하면서 연수기간을 잘 마쳤다. 이 영화에선 당찬 여기자역이었다. 이때부터 맡은 여기자역이 인연이 돼 여기자역만 여러번 했다. 연수가 끝난 우리들은 두팀으로 나눠 드라마 2편을 만들었고 경포대 등지에서 야유회도 즐겼다.
엄마는 무사히 연수를 마친 것을 축하한다며 18기생 동료들을 초청했다. 그때 집은 압구정동 세광빌라로 엄마는 지하실에 각종 술. 음료수를 진열한 홈바를 만들어 생일파티나 귀한 손님 접대때 이용했다. 이 홈바에서 18기생들은 신나게 술을 마시며 즐겼다.
근데 웬일일까.
한참후에 '강문영 엄마가 빌라 지하에 비밀요정을 차려 운영한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이럴수가. 이 때문에 엄마는 한동안 혈압이 높아져 병원을 들락거리는 등 고생이 많았다. 게다가 난 그때 햇병아리 탤런트로선 감히 엄두도 못낼 흰색 그랜저 2.0을 몰고 다녔으니 그런 헛소문이 날 수 밖에. 당시 엄마가 미용실과 D빌딩의 커피숍을 경영해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고 특히 나를 위해선 아끼지 않고 돈을 썼다. 이런 구설수가 사라진뒤 나에겐 또 행운이 찾아왔다.
MBC 18기 신인탤런트중 가장 먼저 드라마에 캐스팅되는 행운을 잡았다. 곽영범 선생님(현 SBS TV 부국장)이 연출하신 단막극 <갯마을>에 여주인공인 해녀역이었다.
내가 발탁된 이유는 스킨스쿠버 실력때문. 미지의 바다속을 동경하던 나는 여고 1학년때 교내 스킨스쿠버 클럽에 가입했다. 평일엔 타워호텔 수영장에서 훈련했고 방학때는 청평호나 강릉, 속초 등 동해바다에 뛰어들었다. 최저 수심 30m까지 내려가 봤는데 겁은 났지만 너무나 황홀했다.
지금도 라이프재킷, 에어통, 벨트 등 각종장비가 마련돼 있는데 좀체 기회를 내기 어렵다.
<갯마을>에서 해녀역은 바닷물속에서 해초를 따는 연기를 해야하므로 당연히 내 차지가 된셈이다. 이 드라마에서 난 스킨스쿠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바닷물속 연기를 보여주었다. TV드라마 데뷔작인 이 <갯마을>촬영은 그래서 무척 신바람이 났다.
예쁘게 봐주셨던지 이어 <한지붕 세가족>의 고정배역이 떨어졌다. 이승열PD선생님의 데뷔작으로 처음 출발한 <한지붕 세가족>에서 석이 고모로 나오는 발랄한 여대생역을 맡았다. 당시 멤버는 심양홍, 김애경, 현석, 박원숙, 임현식, 오미연 선배님들이었다. 쟁쟁한 대선배님들과 함께 출연한 나는 탤런트론 참으로 순탄한 스타트를 한 셈이다.
TV드라마에 차츰 재미를 붙여가던 나는 앞서 얘기했던 엄마가 경영하시던 일식집 사기사건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연기생활에 염증이 왔다.
연기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한지붕 세가족>에 출연한지 3개월이 된 87년 봄 난 극중에서 아웃되고 쉬었다. 만사가 귀찮아진 나는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때부터 가깝게 지내게된 사람이 농구스타 허재다. 연기 공백기간에 나의 갈등과 공허함을 달래준 좋은 친구다. 국민학교 동기동창인 그는 외모완 달리 어린애같은 성격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우린 동심으로 돌아가 자주 놀러다녔는데 반드시 여러 친구들과 어울렸다.
지난 89년 코리안리그가 끝난 봄 8명이 제주도에 3박4일간 여행을 갔는데 난데없이 '허재, 강문영 제주도 밀월 3박4일'이란 잡지 기사가 나왔다. 대단한 농구스타인 만큼 나도 함께 유명세를 문셈인데 무척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친구들과 신라호텔 포인트 디스코테크를 가끔 찾았는데 갔다오면 이상한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마치 단둘이 만난 것처럼. '우정인가 애정인가'라는 타이틀로 가끔 매스컴에 오르내리던 허재와 난 지난 봄 다시 구설수를 맞았다. 허재가 부상을 입고 한동안 출전을 못해 화이트데이인 3월14일 위로차 만나 과천 서울랜드로 갔다. 허재는 내게 쵸콜릿을 선물했는데 그때 드라마 촬영때 사용했던 꽃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강문영이 허재에게 꽃을 선물하더라"고 소문을 냈다. "허재와 강문영은 연인이 아닌 친구다"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색안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인인 만큼 오해 안받게 행동하자며 우린 서로 다짐했다. 허재는 R와 나사이를 누구보다도 잘안다. 그런데도 연인사이가 될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우리들은 그후부터 만나는 일을 삼갔고 주로 전화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다시 방송 얘기로 돌아가야겠다. <한지붕 세가족>출연이후 6개월간 피어리스화장품 CF를 찍는 일외엔 일체 연예활동을 안했다.
과천에 있던 그때 내 집안은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방안, 거실, 가구, 천장까지 모조리 검은색으로 칠해 문안에 들어서면 "어머!"하고 놀랄 지경이었다. 이 검은 집은 내가 고집한건데 당시 나의 착잡한 심정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케이스이다. 그땐 책도 많이 읽었다. 닥치는 데로 읽고 또 읽었다.
"연기는 잊어버리자. 미술공부를 다시하자." 이렇게 맘먹고 방안에만 박혀 지내던 내게 예기치 않던 전화가 걸려왔다.
탤런트 시험을 권유하던 이영달 선생님이었다. "문영이, MBC 김종학PD가 널 찾고 있어. 아주 좋은 드라마고 멋진 역이야. 틀림없이 마음에 들거야." 다소 흥분된 목소리였다.
내가 다시 브라운관으로 돌아간다? 미술공부는 어떡하고. 아무래도 자신이 안섰다. 곰곰이 생각끝에 일단 한번 만나보기로 했다.
MBC-TV 미니시리즈 <아름다운 밀회>였다. 김성종씨 원작소설을 이미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흥미가 당겼다. 김종학 PD선생님은 여주인공 '오묘화'역이 내게 적역이라고 했다. '오묘화'역엔 신선한 얼굴이 알맞아 나를 찾았다고 덧붙였다. 이 역은 나를 반하게 했다.
그래 해보자 이런 역이라면 더구나 스타메이커로 불리는 김종학선생님의 연출작품이면 기대할 수 있겠지. 난 미술공부를 뒤로 미루고 '오묘화'에 매달렸다. 혼자서 의상 챙기고, 운전하고, 밥 해먹고, 밤잠을 설쳐가며 열심히 뛰었다.
재벌회장의 외동딸인데 남편역인 박영규선배가 음모를 꾸며 벌어지는 아주 드라마틱한 드라마였다. 마침내 <아름다운 밀회>가 방영되자 엄청난 반응이 왔다.
"쟤가 누구냐? 저런 탤런트도 있었냐" "야, 너무 매혹적인 새 얼굴이다" "신비스런 매력이 끝내주는 구나" 농담반 진담반의 찬사가 쏟아졌다. 갑자기 팬레터가 쇄도해왔고 CF와 매스컴 인터뷰요청이 꼬리를 물었다. 순식간에 세상이 뒤바뀐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즐거운 세상도 있다니. 그땐 동기생중 박순애, 신혜수는 이미 스타덤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밀회>로 스타의 기분을 막 느끼고 있을때 끔찍한 불행이 날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아름다운 밀회>는 주로 워커힐의 빌라 사무실을 빌려 촬영했다. 그날도 야간 신을 찍고 새벽에 흰 그랜저를 몰고 과천 집으로 돌아갔다. 집 앞 주차장에서 카폰을 누르며 오빠를 불렀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어둠속에서 7명의 괴한이 불쑥 나타나 다짜고짜로 몽둥이로 차를 때려 부쉈다. 차안에 있던 난 "악"하는 비명을 지르며 문을 잠근채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이때 오빠는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며 "누구야"하는 말을 한후 무서워서 감히 내려오지 못했다. 난 키를 뺏기지 않으려 그 순간에도 꽂혀있는 키를 꽉 잡고 있었다. "야, 키 안놔."이들은 나를 윽박지르며 겁을 주었다.
그때 방범 아저씨가 플레시를 비추며 가까이 다가섰다. "이 쌍놈 안가? 못가겠어? 죽고 싶어." 괴한들의 무서운 기세에 방범 아저씨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요것 봐라. 꽤나 부자구먼." 괴한들은 목걸이, 시계, 반지 등을 뺏은후 "너 다음에 봐"하는 말을 남긴채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이튿날 아침 신문에 '탤런트 강문영 심야 차속에서 떼강도에게 봉변'하는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다.
이 괴한들은 아직도 잡지 못했지만 자동차를 노리는 떼강도들이 자주 범행을 저질러 심심찮게 신문사회면을 장식하던 시기였다.그런데 하필 내가 당하다니. 그것도 모처럼 맘 단단히 먹고 열심히 일을 하던 참인데.
병원에선 큰 쇼크를 받아 심장이 매우 나빠졌으므로 조심하라고 했다. 그 사건 이후로 난 충격을 받으면 가슴이 세차게 뛰어 고통을 받는다.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남아 있어 생명보험가입도 거부당했다. 심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괴한들의 습격에도 <아름다운 밀회>촬영은 중단할 수 없어 충격을 딛고 계속 촬영장에 나가야 했다. <아름다운 밀회>의 폭발적인 인기가 이런 수난도 잊게 해주었다. 김종학 PD선생님의 뛰어난 역량이 날 용기와 자신있는 연기자로 변하게 만든 것이다. <아름다운 밀회>가 종영된 후 벅찬 환희가 채 가시기전 김종학선생님은 한번더 같이 일해보자고 했다.
역시 미니시리즈인 <퇴역전선>이었다. '천희진'이란 여기자역이었고 상대역은 정동환씨. '오묘화'에 이어 '천희진'도 대성공이었다. 단 두편의 미니시리즈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것이다.
KBS에서 일일극<꼬치미> 여주인공 '간난이'역을 맡아달라는 섭외가 왔다. 그때만해도 탤런트의 프리선언이 있은지 얼마 안돼서라 간판급 유명스타 몇명외엔 자리를 옮기는게 눈치가 보여 어려웠다. 그런 분위기인데도 난 <꼬치미>출연을 승낙했다. 정말 당돌했다. "햇 병아리 신인탤런트가 겁없이... 쯧쯧"하는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난 '당돌한 햇병아리'로 참새떼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탤런트가 되었다. "간판급 연기자도 아닌 주제에 타방송에 나가다니"하는 비난과 "나이는 어리지만 용기있다"는 찬사를 동시에 받으면서.
내가 그때 KBS 1TV일일극 <꼬치미>에 출연한건 친정인 MBC에 불만이 있다던가 하는 점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배역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사극이라는데 이끌렸을 뿐이다. 다양한 연기로 내친김에 큰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에서였다.
<꼬치미>에서 내가 맡았던 '간난이'역은 최민수 오빠의 첫사랑으로 다부진 아가씨였다. 연출을 맡은 김재순 PD선생님의 자상한 지도로 <꼬치미>출연은 무척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마음이 변해갔다. 내가 사극에 썩 어울리지 않는 연기자라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고 10개월이란 긴 시간을 한 드라마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염증을 일으켰다.
나중에는 대본을 받아쥐면 의욕보다는 싫증이 앞서 연기하는게 고역처럼 느껴졌다.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에서 다시 맘을 가다듬었을때 난데없이 이상한 스캔들이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앞서 상세히 고백했던 R와의 관계를 각색해서 나온 것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으나 정말 입에도 담기 싫은 엉뚱한 '모재벌 회장과의 운운'하는 얘기는 나를 극도로 분노케 했다.
요즘도 가끔 이 얘기를 잘 아는척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러나 이 얘기는 하늘에 맹세코 근거없는 소문이다. 구체적인 해명을 할 수 없는 속사정때문에 더이상 거론할 수 없어 무척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든 <꼬치미>는 잘 나가다 이같은 여러 상황이 나를 방황케하는 바람에 '회의'와 '염증'속에 막을 내려 개운찮은 뒷맛을 남겼다.
당시의 내 심정은 한마디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하기 짝이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곧 영화 <뽕2> 출연에 앞서 긴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시대극이어서 머리를 길러야 할 판인데 자르다니. 여자가 머리를 자를 때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헤아릴 수 있으리라.
이미숙 언니가 출연해 히트했던 <뽕>의 후편인 <뽕2>선 미숙언니완 정반대로 좀체 몸을 허락치 않는 여자로 분했다. 짧은 머리덕분에 가발을 쓰고 한달만에 일사천리로 영화를 다 찍어버렸다.
그러고나니 연기생활이 싫어지면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발음이 이상하다" "연기나 대사가 제대로 전달이 안된다"는 등 나의 단점을 집어내는 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내가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아니면 포기?" 매일 고민에 빠졌다. 심한 갈등에 싸여있는데 MBC에서 <베스트셀러극장> 출연교섭이 왔다. 난 자신없다고 정중히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