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양본당 이야기
춘양은 1907년 조선순종1년에 군청이 들어서서 1914년 봉화읍 내성리로 옮겨 갈 때까지 군청 소재지가 될 만큼 경제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지역이었다.1)
이곳에 천주교 공소가 들어서게 된 것은 1950년대 중후반이었는데 이 때는 경북지방이 대구대목구와 왜관감목대리구(1956년설정) 관할로 되어 있었다. 인근 봉화읍내에는 이미 1954년부터 애육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한 정태중이 고아원 건물에서 매주일 미사예절을 바침으로써 공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춘양공소는1950년중반에 강원도 삼척사람 김현묵베드로가 부인과 딸 세식구가 함께 춘양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신앙생활과 선교를 계속하기 위하여 지역 토착민이던 강희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강희면(후에 초대춘양공소회장이 됨)이 함께 노력해보자고 하여 같이 공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는 6.25전쟁이 종식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로 주민의 삶이 굉장히 어려웠는데 미국의 가톨릭복지협의회 등에서 밀가루, 옥수수가루, 분유 등과 의복을 보내주어 각 읍.면에서 추천하는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 또한 주민들이 천주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으며 팍팍하던 삶 중에 천주교공소에 가면 성가도 부르고 율동도 가르쳐 주어 마음의 위로와 활기를 찾을 수 있어 더욱더 공소에 모이게 되었다.2)
1958년 프랑스파리외방선교회 르메르 주교가 한국에 다녀가면서 안동감목대리구를 설정하였고 같은해 5월10일 봉화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 봉화본당의 공소로는 영주공소가 있었다.
이 때 춘양공소는 사실상 봉화 초대이성춘신부가 돌보고 있었는데 마땅한 공소건물이 없던 때라 가정집을 전전하고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던중 영천본당 출신 철도공무원 김성근필립보가 영동선 개통에 따라 춘양역으로 발령을 받아와서 철도관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관사를 매주 공소예절장소로 제공하여 얼마간 철도관사에서 공소를 운영하였다.
그즈음 봉화본당 초대주임 이성춘요왕마리아 신부는 부족한 한국말로 사목에 어려움을 겪자 본당일을 봐줄 행정사무원으로 춘양공소일을 주도하던 김현묵베드로를 차출해갔다. 때문에 공소를 운영할 전교회장이 필요하게 되니 김현묵을 도와서 공소를 운영해가던 강희면을 급히 불러 교리도 가르치지 않고 그날 바로 사제관에서 세례성사를 베풀며 당시 민주당 장면 박사가 번역한 교부들의 신앙이란 책을 건내며 몇 번이라도 알게 될 때까지 읽으라고 했다. 강희면은 그 책으로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고자 모인 10여명의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는데 강희면공소회장은 교리를 약 3년여동안 가르쳤다. 1958년 12월 춘양공소가 정식으로 설립될 때에 약 70여명이 공소에서 교리를 배우고 공소예절을 바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자유당 정권시절이라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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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봉화군연혁참조 2)강희면미카엘초대공소회장 증언 참조
주당대선후보 조병옥박사의 런닝 메이트가 장면박사였는데 장면박사가 천주교인이라 주민들이 천주교에 모이면 경찰의 감시가 붙는 등 상당한 압력이 들어와서 교리교육과 공소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계속>
#제목을 이야기춘양본당에서 게재글이 논픽션적이라 춘양본당이야기로 수정하였습니다. 또한 춘양에 공소가 들어서던 시기인 1950년대 중반을 <확인된 사항이 있어>중후반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차 후도 새로운 것이 확인되면 수정 후 게재하도록하겠습니다.
<전편에서 계속>50년대 말에는 이승만 정권의 민주당 탄압이 심하기로 정보과형사을 동원한 민간인 사찰이 극에 달할 때여서 정권에 대한 비방이라도 하면 바로 경찰서로 불려가곤 했다. 춘양도 예외는 아니어서 저녁 때 공소에 모여 모임을 하면 정보과 형사들이 창문너머에 와서 무슨 사상이야기나 하지 않는지 기웃기웃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에 교리반 숫자가 삼 사십명정도였다고 한다.1) 그러던 것이 60년 3월15 부정선거로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고 4월 혁명을 거쳐 제2공화국의 나약함으로 제3공화국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3년간의 군정통치를 발표하게 된다. 그 여파로 병역대상 젊은이들은 모두 빠짐없이 군에 가게 되었는데 교리를 가르치던 강희면회장도 군에 입대할 수 밨에 없었다. 그러나 공소의 교리교사 후임을 지정하지 못하고 입대하는 바람에 그 후에는 공소에서의 교리 공부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
잠시 시간을 되돌려보면 철도관사에서 모임을 하던 춘양공소는 이성춘요왕마리아신부의 주선으로 춘양면 의양리 97-7번지에 18평정도 하는 목조 스레트 기와 지붕을 샀다. 이집의 칸막이를 헐고 경당을 만들어 거기서 공소예절을 보았는데 방을 한칸 남겨두어 강희면 회장이 기거하며 공소를 관리 하였다. 그러다가 후임교리전도사도 없이 군대를 가니 교리반이 유야무야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 공소회장은 장학순베드로였는데 1965년 부터 1968년의 기간동안 공소를 맡아서 유지하였으나 당시의 사회상은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인 중화학공업 입국의 정책으로 인하여 노동력중심의 공장이 서울 등 대도시에 많이 생기게 되어 일손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당시의 표현대로 보따리하나 이고 무작정상경을 하는 지방민들이 많은 때라 춘양에서도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등의 이유와 해외원조 등이 줄어들게 되어 주민들의 관심도 줄어 공소는 겨우 7~10명이 모여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1969년도 부터1977년도까지는 춘양공소의 침체기로 보아도 무리가 없는것이 이 기간동안에는 공소회장이 공석이었다.사두었던 공소주택은 1965년에 매각하고 1972년 대구대교구천주교유지재단에서 의양리 378-6번지에 193평을 구입하여 두었는데 1978년 2월 15일 천주교안동교구유지재단으로 이전되어 이곳에 봉화성당 주임으로 있던 박로제 로제리오 신부에 의해 공소건물 건축이 추진되게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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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희면다니엘회장 증언
<앞에서 이어받아>
1980년 2월11일 기원미사를 시작으로 같은해 5월22일 착공하고 9월21일 준공하였으며 마침내 12월7일 봉화본당 춘양공소건물봉헌미사를 두봉주교께서 집전하였는데 실로 공소예절을 시작한지25년만의 일이었다. 공소관할로는 봉화군 법전면,춘양면,소천면, 석포면의 4개면이었다. 공소건축과정에서 건축비가 모자라게되자 박로제본당신부는 프랑스의 개인재산을 처분하여와서 건축비에 충당하였다. 공소건물은 맞배기와지붕 시멘벽돌조로 연건평31.8평이었다. 공소성전은 이렇게 갖춰 놓았으나 80년대 군사정권의 농촌 홀대정책((예)안동교구 오원춘사건 등) 으로 이농자가 증가하는 등 교세확장에 어려움을 겪자 공소에 상주하면서 예비자들을 교육하고 돌볼 수도자가 절실하게되어 전교수녀 파견을 요청하였다. 전교수녀가 생활할 곳이 필요하게되니 수녀원을 건축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박석희주교의 승인을 얻어 수녀원 건축을 하게되었는데 수많은 은인들의 도움을 얻고 자체적으로 모금한 자금으로 1998년6월21일 수녀원을 봉헌하고 예수성심시녀회 수녀 두분이 부임하게 되었다. 그 후 2001년도에 2층을 증축하여 나눔의집과 교육관으로 사용하였다. 2000년이 후 춘양공소의 교세는 꾸준히 확장하였는데 새로 세례를 받는 영세자가 늘은 까닭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론 공소관할로 전입오는 귀농 또는 귀촌인구의 꾸준한 증가세에 힘입은 바도 크다고 할 것이다. 2007년말 현재로는 172명이었는데 이에 좀더 넓은 성전터를 물색하여 오다가 2008년2월과 3월 춘양면 의양리 258-2번지와 258-5번지의 두필지 합하여 659평을 매입하였으며 부지에 있던 창고건물을 신자들이 힘을 합하여 임시성전으로 개조하여 2009년9월6일 본당의 조종률신부가 첫미사를 집전하였다. 그 후 한상덕신부의 주례로 미사를 집전해 오다가 본당자체적으로 살림을 꾸려나갈 만큼의 재정자립도가 갖춰졌다고 본 교구장께서는 2010년 9월10일자로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초대신부로 영국에서 교포사목을 하던 황영화신부를 파견하였다. 황영화신부의 부임 당시에는 성전도 창고건물을 개조하여 사용하던 형편이라 사제관이 갖춰져있을 수가 없던 형편이라 면소재지의 가정집을 임시로 얻어서 지내며 사목을 하였다. 본당신부의 부임으로 봉사단체와 신심단체도 비로소 조직적인 면모를 갖추고 그 규모를 확대하게되었다. 이어서 본당의 성전건축을 기획하고 추진하였는데 각지방의 성전모습을 검토하고 연구하여 2012년9월13일 설계를 마무리하고 2013년3월9일 군단위 내빈과 북부지구사제단을 초청하여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공사기간동안 온통 건축과정에 감독을 소홀히 하지않고 건축기금모금으로 동분서주한 결과 2013년 12월24일 성탄전야미사를 임시로 성전에서 집전할 수 있었다. 성전은 성당 및 사제관1.2층 합하여141평과 교육관 73.2평으로 구성되었다. 건축비는 그동안 신자들이 각종 농산물 판매기금과 건축헌금에 본당신부가 안동교구, 서울대교구, 중국소주한인교구, 인천교구, 의정부교구, 수원교구 등으로 다니면서 모금한 헌금을 합하여 충당하였으며 본당신부가 모금을 위하여 타본당으로 다닐 때면 주로 한상덕신부가 미사를 집전하여주었다. 이 글을 통하여 어려운 형편에서도 헌금해주신 타본당 교우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이렇게 주님의 성전을 세우고자 온마음과 성을 바쳐 노력한 결과 2014년 4월 6일에 마침내 교구장이신 권혁주 요한크리스토모 주교의 집전으로 성직자, 수도자 및 내.외빈 약500여명의 축하속에 성전을 봉헌하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