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살리는 비타민C
목숨을 살리는 비타민C.. 하루 여섯 알은 먹자 1955년 경기 평택 출생.
경기高·서울大 의학과 졸업. 同 대학원 의학 석·박사.
美 시카고大 의대 교환교수,
대한의사협회지 편집위원 등 역임. 現 서울大 의대 교수. 영국 국제인명센터(IBC) 세계 100대 의학자 선정(2005).
저서 「비타민-C가 보이면 건강이 보인다」,
「비타민 C 박사의 생명이야기」 등. 「비타민C 전도사」인 해부학과 교수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大 의과대학 기초 연구동 213호에 있는 李旺載(이왕재) 교수의 연구실 한쪽에는 비타민C 박스가 어린 아이 키만큼 쌓여 있었다. 그는 나의 시선이
비타민 박스로 향하자
『인터뷰 마치고 갈 때 드릴 테니, 나를 보세요』라고 농을 던졌다.
李旺載 교수의 전공은 해부학이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돼 피살된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 의 부검에 참여했다.
원래 병원에서 임상을 담당했는데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싫어서 해부학과로 왔다고 한다.
자신의 전공과 달리 그는 한국에서 「비타민C 전도사」 로 알려져 있다.
「비타민C가 보이면 건강이 보인다」 「비타민C 박사의 생명 이야기」 등 비타민C에 관한 著書(저서)를 多數(다수) 발간 했다.
비타민C 연구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영국 국제 인명센터 세계100大 의학자(2005년)에 선정됐다. 국내에서 李旺載 교수가 비타민C 전도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2000년
그는 모 방송국 아침 프로그램에서 비타민C로 당뇨병과 동맥경화를 완치한 자신의 부친과
장인·장모 이야기를 했다.
방송이 나가고 나서, 전국의 약국에 사람들이 몰렸다. 비축용으로 많이 사기 위해서였다 서울 종로4~5가 약국들은 비타민C를 사기 위한 사람들로 한 달 내내 홍역을 치러야 했다.
李교수 역시 갑작스러운 비타민 C 열풍에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서울대병원 등 종합병원 에서 저에게 엄청난 항의를 했어요.
동맥경화·당뇨병 환자들이
병원에 와서는 다짜고짜로 다 필요 없고, 비타민 C를 내놓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의사들이 아무리 「그래서는 안 된다」 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친구, 선·후배들이 전화해서 「의사가 방송에 나가서 말도 안되는 소리했다」고 비난을 하더군요.
저는 치료를 받으면서 비타민 C를 먹으라는 얘기였는데… 참 내』 그는 당시 그렇게 비난은 받았지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비타민C 효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타민C로 살아난 부친과 장인
병행 치료를 한 지 3개월이 지나자
당뇨로인한 피부 괴사가 없어지고 동맥 경화 증세가 완화 되더군요.
6개월 후에는 당뇨병이 거의 완치됐습니다.
서울대병원에서 3개월밖에 못산다고 했는데, 저희 아버님은 11년을 더 사시고 1999년 82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의사들이「비타민C가 병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정확한 데이터를 내놓으라」 고 다그치더군요.
하지만 당시에 임상 실험을 어떻게 합니까. 저희 부친과 장인 어른 같은 사례가 데이터죠 李旺載 교수의 부친은 1988년 심한 당뇨를 앓아 발가락을 절단했다.
서울대 병원에서는
『당뇨성 동맥경화로 3개월 이상 살지 못한다』고 했다.
李교수는 부친에게 비타민C를 1만 mg씩 복용 하도록 했다.
물론 서울대병원의 당뇨 치료와 竝行(병행)했다. 李旺載 교수의 장인은 자신의 부친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였다.
그의 장인은 마른 체질이었는데,
혈압이 높았다.
혈압이 높은 상태로 오랜 시간 지속되면 혈관이 약해 지면서 동맥경화가 오게 된다.
『동맥경화가 뇌에 오면 뇌졸중, 심장에 오면 심근경색으로 생명이 위험해집니다.
저의 장인은 눈에 와서 한쪽 눈이 거의 실명 이 됐어요.
또 肝(간) 경변으로 복수가 차서 서울대병원에 실려 오기까지 했습니다.
서울대병원 의사 들은 길어야 5년 이상 살지 못한다고 진단했습니다.
약물치료, 식이요법 등과 함께 비타민C를 꾸준히 드시게 했어요.
3년 지나자 시력이 회복되시더군요.
현재는 완벽하게 회복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얼마 전에 저희 병원에서 간 肝 MRI 촬영을 해보니 肝도 문제가 없어요.
장모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왼쪽 다리를 못 쓰게 됐었지만 지금은 완벽하게 회복 됐습니다 그는 부친과 장인·장모
얘기를 하면서『꼭 교회에서 간증 하는것 같죠』라며 크게 웃었다 장인·장모 MRI를 찍은 저희 동료 의사가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치료가 됐죠」 하기에 비타민C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에 그 친구 방에 갔더니 비타민C를 산더미처럼 쌓아 놨더군요.
그래서 제가 「역시 서울대병원 의사라서 머리가 좋구먼」하고 웃었어요』
드라마틱하게 변한 몸 상태 李旺載 교수는
어떤 계기로 비타민C의 효능을 알게 됐을까.
1986년 경남도청 방역과에서 군의관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진주에 경상大 의대가 신설 됐어요.
교수와 의사가 부족 했던 터라 경상大에서 교수를 하게 됐습니다.
경남도청에서 지역 의대를 키우기 위해 의사 들을 차출한 것이죠.
이곳에서 저의 비타민C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의 대학(서울大 의대) 선배인 이광호 경상大 의대 교수가 그의 비타민C 스승이었다. 이광호 교수는 이미 비타민C의 효험을 알고 獨學(독학) 으로 비타민C를 공부해 왔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비타민C의 효험을 알리며 복용을 권하고 다녔다.
전도에 가장 확실하게 걸려 든 사람이 李旺載 교수였다.
지금은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 가 있지만 당시는 대전에서 진주까지 5시간이 걸렸어요.
당시 주말부부로 매주 서울과 진주를 오가는 생활을 하다 보니 몸이 피곤해서「약 먹은 병아리」
같았어요.
이광호 선배가 항상 피곤에 절어 있는 저를 보더니 「야, 너 비타민C 먹어라」
하더군요.
비타민C가 몸에 좋다는 것은 알았어요.
「그래 안 먹는 것보다 좋겠지」 하면서 먹기 시작했어요』
그는 이광호 교수가 먹으라는 대로 먹었다.
하루 비타민정 10알(1만mg). 뭐든지 한 번 시작하면 꾸준하게 하는 성격이라,
6개월 동안 식사와 간식 때 꼬박 꼬박 챙겨 먹었다.
6개월 후에 제 몸이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저는「드라마틱」하게 변했다는 말을 씁니다.
정말 드라마틱하게 변하더군요.
원래 비쩍 마르고 약한 체질이었는데 피곤하지 않더군요.
고속버스를 7~8시간 타고 다녀도 버스안에서 잠이 안 와요.
하루에 12시간 환자 진료하고 밤에 공부해도 다음날에 몸이 찌뿌둥하지 않게 됐어요.
그때 아, 비타민C가 대단한 거구나 생각했죠.
비타민C의 진가를 확인한 그는 이광호 교수와 함께 비타민C 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외국 논문과 각종 임상 결과를 뒤졌다.
주위에 비타민C 복용을 권유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건강하게 해준다고 꼬셨지만 사실 주위 분들이 전부 내 임상실험 대상들 이었다며 웃었다.
혈관 보호에 탁월한 비타민C 비타민C 섭취 부족으로 사람이 사망한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 영국 군의관「제임스 린드 ―비타민C와 다른 비타민은 어떻게 다릅니까.
비타민B가 부족하면 각기병에 걸리고,
비타민C가 부족하면 괴혈병에 걸립니다.
흥미로운 건 비타민B가 부족해서 사람이 죽지는 않습니다.
비타민B가 부족해서 각기병으로 죽기 전에 굶어 죽거든요.
비타민B 등 나머지 비타민은 제대로 음식만 먹으면 죽는 지경까지 가지 않아요.
음식에서 섭취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비타민C가 부족하면 죽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8세기 영국 해군 역사책을 보면 흥미로운 얘기가 나옵니다.
영국 해군이 아프리카를 항해하던 중, 젊은 병사들이 항해를
시작한 지 수 개월 만에 죽어 나갔어요.
분명 식사는 제대로 하는데 죽는 겁니다.
제임스 린드라는 군의관이 아프리카 인근의 섬에서 원주민들이 죽어 가는 병사들에게 레몬즙을 먹게 하는 것을 봤어요.
그랬더니 1주일 만에 틀림없이 죽어야 할 병사들이
살아나 거든요.
이걸 보고 린드는 병사들이 죽어간 이유가 「싱싱한 과일이나 채소를 먹지 못해서」라는 것을 알았어요.
나중에 비타민C가 부족해서 죽는다는 것이 학문 적으로 밝혀졌죠. < 옮 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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