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絕響:永遠的鄧麗君절향: 영원한 덩리쥔 作者:鄧麗君文教基金會/策劃,姜捷/著작자: 덩리쥔 문교기금회/기획, 강첩.저 出版日期:2013 年01 月 28 日출판일자: 2013년 1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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推薦序/他們心目中的鄧麗君
추천서/ 그들의 기억속의 덩리쥔 추천서/덩리쥔에 대한 인상 링칭샤 출판서/ 사랑의 예물, 예물속의 사랑, 덩리쥔 문교기금회 이사장 덩챵푸
후기/ 어떤 사랑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부록/ 덩리쥔 사진집 |
하마터면 세상에는 덩리쥔 이분이 없을 뻔 하였다.
職務上的調動使這個家不停東遷西搬。老三長富在宜蘭出生之後不久,鄧樞就調到虎尾大埤鄉受訓,
沒多久再調到雲林龍巖,流離搬遷的日子總算是暫時安定了下來。
한가족으로 함께 살게 되었고 다시 힘든 나날도 겪어 가게 되었다.
직무상 부대 전근이 이 가족을 끊임없이 동으로 서로 옮겨다니게 하였다.셋째 오빠 창푸가 宜蘭에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鄧樞는 虎尾 大埤鄉로
이동하여 훈련을 받게 되었으며, 오래되지 않아 다시
雲林龍巖으로 전근을 갔는데, 이곳 저곳을 떠돌며 이사하는
나날이 마침내 잠시 안정되게 되었다.
證明鄧家一九五二年一月從桃園縣楊梅鎮埔心里,遷入雲林縣大埤鄉南和村一鄰二十四戶南和路六號,
之後再遷往褒忠鄉田洋村,因而,鄧麗君實際上是在大埤鄉出生三個月後,才遷往褒忠鄉的。
덩리쥔을 대신하여 뿌리를 찾기위하여 大埤鄉의 호적 관리사무소의
서류에서 덩씨 집안의
초기 호구자료를 찾았는데,
덩씨 집안은 1952년 1월 桃園縣 楊梅鎮 埔心里에서
雲林縣 大埤鄉 南和村 一鄰 二十四戶 南和路 六號로 이사하였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이후에 다시 褒忠鄉 田洋村으로 옮겼는데 이리하여
덩리쥔은 실제로 大埤鄉에서 태어난지 3개월뒤에야
비로소 褒忠鄉으로 이사가 살았던 것이다.
鄧麗君選擇在這樣歡欣的日子來到世間,成為鄧家最受歡迎的新成員,即使是物質生活艱苦,
對小生命的誕生,大家都懷抱無限欣喜。
1953년 1월 29일 맑은 새벽, 또한 한해 음력으로 마침 12월 15일이기도 한데,
집집마다 음력 춘절(설날)을 맞이하는 준비로
바쁜 분위기가 넘쳤는데, 덩리쥔은 이런 기쁜이 넘치는 시기를 골라서
세상에 오셔서, 덩씨 집안에서 가장 환영을 받은
새로운 식구가 되었다. 설령 경제적으로 생활이 매우 가난하였지만,
어린 생명의 탄생에 대하여 모두들 한없는 기쁨을 품었다.
另一間就是三個兒子同睡的一張木板床。當時的眷村風氣的確是鄰里之間同甘共苦、守望相助。
分娩時刻一近,助產婆婆、房東太太和眷村媽媽們都從四鄰過來幫忙,大冬天裡,點煤油爐子燒水,
準備衛生用品和嬰兒衣物,不久,似乎是特別嘹喨的啼聲劃破了破曉的寧靜,鄰居們幾乎是興奮的歡呼著四處報喜:
「是個女兒!是個女兒!」三個當哥哥的從呆愣愣的看著大人忙進忙出,到直奔床前「觀賞」他們的「新玩具」,
知道多了一個妹妹而開心不已。
당시 붐비고 비좁은 농촌의 민가는 겨우 억지로 간신히 벽을 막아서 방을 2개로 하여서
한칸은 산모가 눕는 방으로 임시로 정하였고 다른 한칸은
바로 세 아들이 함께 자는 나무 침대 한개가 있었다.
당시의 권촌(역자 주:군인가족 집단 주거지)의 분위기는
확실히 이웃간에 함께 즐거워 하고 고생하며 서로 도우며 돌보는 것이었다.
분만할 때가 가까와지자 출산을 돕는 할머니,집주인 아주머니,
권촌의 동네 아주머니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어 돕기 시작하였다.
한겨울에 석유난로 켜서 물을 끓이고,
위생용품과 갓난 아이 옷가지를 준비하였는데 오래되지 않아
마치 특별하게 낭랑한 울음 소리가 새벽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이웃들의 거의 다 흥분된 환호성으로 사방으로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이얘는 여자아이네! 」,이얘는 여자아이야!」 멍하게 있던
오빠가 된 세명의 아이들이 어른들이 바삐 들락날락 거리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침대로 달려가 그들의 「새로운 장난감」을 「감상」하였고,
이 여동생이 생겨서 기쁨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鄧樞得到喜訊不久後,氣喘吁吁的跑回家來,連聲的說:「女兒好!女兒好!」
抱在懷裡端詳半天,喜形於色。天沒大亮,左鄰右舍的媽媽們早已圍過來看鄧家的女兒,
兩位鄰家媽媽在一旁壓低了聲音爭執著,其中一位一直磨到過了中午還不肯回家。
鄧樞가 기쁜 소식을 듣고서 얼마되지 않아,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돌아 왔다.
연거퍼 말을 하였다:「여자 아이가 좋아!여자 아이가 좋아 !」하면서 품에
한동안 안고서 자세히 살펴보는데, 얼굴에 기쁜 빛이 넘쳤다. 날이 아직 밝아 오지 않았는데,
여러 이웃 아주머니들이 벌써 덩씨 집안의 여자 아이를 보려고 에워싸기 시작하였다.
두명의 이웃 아주머니가 한켠에서 낮춘 목소리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고
그중 한명은 내내 정오가 넘도록 보채면서
여전히 집으로 돌아 가려하지 않았다.
原來,當時的臺灣眷村生活相當清苦,鄧媽媽懷孕時曾對鄰人說,三個兒子都快養不起了,
如果孩子生下來就送給這位結婚多年膝下猶虛的鄰家媽媽,姊妹倆早就私下口頭上說好的預定,
這位媽媽想要抱走趙素桂這胎剛剛生下來的孩子,當作自己親生的孩子,這一早又看到剛出生的女娃兒這麼可愛,
說什麼也不願走,抱持著一絲絲希望,巴望著鄧家太太記得曾經允諾過的話,
把嬰兒送給她,但是,怎麼可能呢?
본래 그때의 대만 권촌의 생활은 매우 힘들고 가난하여서,덩리쥔 엄마는 임신을 하였을 때
이웃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3명의 아이를 모두 다 잘 키우기가 여려워우니, 만일 아이를 낳게 되면
결혼한지 몇년이 지났으나 슬하가 비어있는 이웃 아주머니에게 주겠다고 하였다.
아주머니 두 사람이 이미 비공식적으로 말로만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아주머니는 趙素桂가 막 낳은 아이를 안고서 가려고 생각하였고,
자기가 직접 낳은 아이로 여겼다.
이 새벽에 또한 막 낳은 여자 아이를 보고는 어쩌면 사랑스러운지,
무어라 말을 하여도 가기를 바라지 않고, 실날 같은 희망을 가지고
덩리쥔 부인이 이전에 허락한 말을 기억하면서
갓난아이를 그녀에게 달라고 몹씨 졸랐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懷胎十月的辛苦,抱在手中的滿足,日子再窮、再苦也要咬牙撐下去,何況是盼了許久的女兒,
無論如何也捨不得「送人」,鄧媽媽一時難為,不禁放聲大哭,哭得想要來抱小孩的鄰家媽媽六神無主,
口頭承諾是相知好姊妹的悄悄話,眼見鄧媽媽的又疼又喜,誰也不忍心「硬要」,
只好奉上了本來是要來「換孩子」的老母雞、雞蛋、麵線等禮物,黯然的回去。
열달의 임신의 괴로움, 품안에 있는 만족감,나날이 다시 궁핍하고
다시 괴로워도 이를 악물고 지탱하여 갈것이다. 더군다나 그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던 여자 아이 인가. 어찌되었던가에 「남에게 준다는 것」은 할 수가 없었다,
덩리쥔 엄마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방성통곡을 그치지 못하였다.
어린아이를 안고 가려고 온 이웃집 아주머니는 정신이
혼란하도록 통곡을 하였다.
말로 약속한것은 서로 잘 아는 아주머니끼리의 귓속말이지만,
덩리쥔 엄마의 아프고 또 기뻐하는 것을 직접보고는
어느 누구도 차마「강요」할 수 없어서,
부득이 본래는 아이와 바꾸려고 가지고 온 어미 닭,계란,면 다발등의
예물을 들고서 쓸쓸히 돌아 갔다.
鄧媽媽回想這段往事,不禁感謝蒼天,冥冥中給她這個可愛的小天使,也感謝鄰居姊妹的貼心體己,
如果當時那位媽媽堅持要她履行諾言,將孩子抱走,整個中國近代流行歌壇的歷史,
可能就不會有「國際巨星鄧麗君」的出現,而鄧麗君如果沒有走上唱歌這條路子,
也許她的一生就會完完全全改觀了。
덩리쥔 엄마는 이때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푸른 하늘에 .
가슴속 깊이 그녀에게 이런 작은 천사를 보내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그치지 못했다.
또한 이웃집의 친근하고 허물없던 아주머니에게도 감사를 하였다.
만일 그때 그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약속 지키라고
고집을 부려서 아이를 안고서 가버렸다면 중국근대화
전체적인 유행가 가요계의 역사에서 아마도 국제적 수퍼스타 덩리쥔의
출현은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덩리쥔이 만일 노래 하는 이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녀의 삶도 완전히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人緣超好取名麗筠期許如竹般高潔
인복이 아주 훌륭하고 , 대나무처럼 고결하다는 麗筠 의 이름을 얻다
鄧媽媽還記得在坐月子期間,軍營中的鄧爸不能常回家,才不過十歲大的大哥就得負責清洗尿布,
每天晚上把功課做完,就得抱著一盆尿布到水井邊,打起冰冷的井水,把泡過水的尿布一條條拖在洗衣板上,
閉著眼睛猛搓一陣,也不管洗乾淨沒有,就往竹竿上隨便披一披,尿布上連便跡都還在,
害得小丫頭得了尿布疹。鄧媽媽只好在月子裡起身,指點大哥怎樣才能把尿布洗乾淨,
她安慰的稱讚大兒子真聽話,教了一兩次就懂了,從此以後,小娃兒才免去了紅屁股的折磨。
덩리쥔 엄마는 여전히 산후 조리하는 기간을 기억하고 있는데,군복무 시절의 덩리쥔 아버지는
늘 집에 올수가 없어서,겨우 열살에 지나지 않는 큰 아들이 기저귀를 빠는 일을 하여야 하였다.
날마다 밤에 숙제를 다 끝내고, 기저귀가 든 대야를 가지고 우물 가로 가서는 차가운 우물물을
길어서 오줌을 누었던 기저귀를 빨래판에 척척 끌어다 놓고
눈을 감은 채 힘차게 한바탕 비벼댔다. 그리고
또한 깨끗하게 씻어졌는지 아닌지 관계없이 대나무 장대에다 마음대로 널었다.
기저귀에는 똥 흔적 조차 모두 다 여전히 있어서,
작은 계집아이는 기저귀 발진에 걸리게 되었다. 덩리쥔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산후 조리하는 동안에 몸을 일으키어 큰 아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기저귀를
깨끗하게 빠는 지를 가르쳤다.그녀는 큰 아들이 말을 잘 듣게 달래기도 하고 얼르기도 하면서,
한두차례 가르쳤더니 잘 이해하였다. 이후로 작은 아이는
비로소 엉덩이의 붉은 발진의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這樣的情景,在家家戶戶有洗衣機、烘乾機等電氣化生活的現代社會怎麼能想像呢?
在天天拿著搖桿玩電動的九○年代男孩,誰肯為妹妹打井水洗尿布呢?
也許用慣了紙尿褲的這一代人連尿布長什麼樣子都不知道吧!
이런 모습은 집집마다 세탁기,건조기 등 전기를 이용하여 생활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으리요?
날마다 전동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90년대의 남자아이는
어느 누가 누이동생을 위하여 우물물을 길어다가 기저귀를
빨고 싶어하겠나? 아마도 종이 기저귀에 익숙한 이 시대의 사람은
기저귀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 지도 모를 것이다 !
鄧媽媽欣慰的是女兒涓滴不忘的孝心。日後,鄧麗君才剛有了一點錢,
第一件事就是想到把家中全部改為電氣化,特別是洗衣機,雖然家中的孩子都長大了,
再也沒有尿布要洗,但是她心疼媽媽在月子裡碰冰冷的井水影響到日後造成的指關節痠痛,
她不只一次向媽媽提過,很感謝媽媽和哥哥為她冬天打冰冷的井水洗換尿布的辛勞,
這不過是她人生中最初的幾個月,可是,這一輩子她都從沒有忘記過家人對她的愛。
덩리쥔 엄마가 기뻤던 것은 딸아이가 조금도 잊지 않는 효심이었다.
나중에 덩리쥔이 비로소 막 얼마간의 돈을 벌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한 일이 바로 집안 전부를 전기를 쓸 수 있게 바꾸려고 생각한 것이다.
특히 세탁기이었는데, 비록 집안의 아이들이
다 성장하여서 다시는 기저귀를 빨 필요가 없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엄마가 산후 조리를 하던 때 찬 우물물를 길어서
나중에 손가락 마디가 시리게 된것에 마음 아파하였다.
그녀는 엄마에게 단지 한번이 아니고 이야기를 하였는데 엄마와
오빠에게 겨울철 찬 우물물로 기저귀를 빨던 수고를 한 것에 대해 매우 고마워 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최초의 몇개월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평생 그녀에 대한 가족의 사랑을 이제껏 잊지 않았다.
「丫頭」是鄧麗君滿月前的諢名兒,在中國人的習俗裡,諢名兒叫得越通俗、越平凡,
孩子會越好養,而鄧爸、鄧媽卻覺得老是叫「丫頭」,對這個漂漂亮亮的小女兒實在不夠雅,
鄧爸特地請來了部隊裡最有學問的一位楊姓長官,為她起個漂亮的學名,在他的一番用心斟酌之下,
為她命名「麗筠」,麗有清麗、秀美的意涵,而筠則是竹的青皮,泛稱為竹的代表,
期望她長大之後志向高潔、虛懷若谷,節節高升,並且能出人頭地。
「丫頭: 계집아이」는 덩리쥔이 한달이 되기전의 아명인데,
중국인의 습속에 아명이 통속적이고 평범할 수록 아이는 더 잘
큰다고 하였다. 그래서 덩리쥔 아버지 엄마는 언제나 「丫頭: 계집아이」라고 불렀지만,
이 예쁘기 그지 없는 딸을 실제로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덩리쥔 아버지는 특별히 부대에서 학식이 가장 많은
楊씨 상관에게 ,딸을 위하여 아름다운
진짜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그의 한동안 고심끝에
그녀에게「麗筠」이란 이름을 지었는데,
麗는 맑고 아름답고,빼어나게 예쁘다는 의미가 있고
筠은 바로 대나무의 푸른 껍질로 대나무를 널리 일컫는 말이다.
그녀가 다 자란 뒤에 고결하고 ,겸손하기가 골짜기처럼 깊고,
차차 높이 오르고, 아울러 두각을 나타내길 바란 것이다.
可喜的是這位楊長官的眼光果然準確,日後在她成長的過程中真的都在她身上看到了這些特質,
一點兒也不負這「筠」字的美意。也許是「有邊讀邊,無邊讀中間」的慣性使然,
當時,一般人都把筠字發「君」字音,麗君、麗君的就這麼被叫慣了,就連鄧媽媽都喊她「麗君」,
人人叫得如此順口,之後,鄧麗筠開始唱歌需要一個藝名的時候,
就直接把「鄧麗君」當作藝名,彷彿是順理成章,再自然不過的事。
기뻐할 만 한 것은 이 楊씨 상관의 눈빛이 과연 정확하여서,
나중에 그녀가 자라는 과정에서 정말로 모두 다 그녀에게서
이런 특질을 볼 수 있었다.조금도 이 「筠」의 아름다운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아마도 「有邊讀邊,無邊讀中間: 변이 있으면 변을 일고, 변이 없으면 그 중간을 읽는다 」의 습관이
그렇게 하여서 당시의 일반 사람들이 모두 다 筠(균:yun)의 발음,麗君(려군;
li jun),麗君(려군;li jun),으로 하여서 이렇게 불리우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덩리쥔 엄마도 늘 그녀를 麗君(려군;li jun)
이라고 불렀고 사람들이 이처럼 불러서 입에 익고 난뒤에
鄧麗筠(덩리윈: deng li yun)이 노래를 시작하면서 예명이 필요할 때
곧바로 「鄧麗君:덩리쥔」을 예명으로 삼아서 마치 모든 일이 순조로와 보이는 듯하였지만.
더욱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鄧麗君四個月大時,鄧爸又調往臺東縣池上鄉,天才濛濛亮,全家便坐上敞篷的大貨車,
經過一整天的搖晃車程,舉家遷移。鄧媽媽回憶這段往事感慨的聯想,
也許老天是注定鄧麗君要一生奔波的,從在襁褓中睡在媽媽懷裡就四處顛簸,
而乖巧的嬰兒彷彿知道體恤媽媽,一路上都不吵不鬧,對一個毫不解事的新生兒而言,真的非常難得。
덩리쥔이 넉달정도 자랐을 때,덩리쥔 아버지는 또 臺東縣 池上鄉으로 전속을 갔다.
하늘이 비로소 희끄므레하였을때 온 식구는 무개차 화차칸에 타고서 하루 내내 흔들리는
여정을 거쳐서 온 가족이 이사를 갔다. 덩리쥔 어머니는 이때의 지난 일을 감격스럽게 연상되는 것을
회고하였는데,아마도 하늘이 덩리쥔이 한평생 바쁘게 돌아 다니라는 운명을 정하여 둔것이 아닐까 하였다.
애기 포대기에 싸여서 엄마 품에 안겨 사방이 흔들렸으나
똘똘한 갓난 아이는 마치 엄마를 이해하고 알고 있다는 듯이,
가는 내내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한낱 사리분별도 전혀 하지 못하는 갓난 아이로서는 정말로 매우 드문 일이었다.
鄉間的人情味濃厚,池上鄉的純樸與寧靜似乎更適合她,涵養了她明朗舒坦而心胸開闊的個性。
童年的鄧麗君備受寵愛而且人緣奇佳,從襁褓中就顯而易見,討人喜愛的娃娃成了鄧爸同事們的開心果,
叔叔、伯伯們有事沒事就往鄧家跑,甚至有時候還為了搶著抱她而爭得面紅耳赤。
鄧媽媽在談到這段往事時,還笑著感嘆那些來到臺灣就沒有結婚的俗稱的「老芋仔」,
那時候多有人情味啊!她們這一輩結了婚的,家裡的大門永遠都為了單身漢的弟兄們敞開,
弟兄們對他們的孩子就像自己的孩子一樣,相處和樂融融。鄧麗君不怕生的好性情也是在那樣的大環境中養成的,
叔叔、伯伯、阿姨、嬸嬸的,叫得人心好甜,而她也特別懂得察言觀色,貼心而不嬌縱,
「真的是個天使」鄧媽媽紅著眼說:「她小時候,就有很多人跟我說,這女兒是天女下凡來報恩的,
我寧願她不是什麼天仙天使,也不要她來報了恩就匆匆回天上去了,我真的寧願她不要這麼好啊!」
시골의 인정미는 매우 깊어서, 池上鄉의 순박하고 평온함이 그녀에게 더욱 더 적합한 것 같아서,
그녀에게 밝고 쾌활하고 도량이 넓은 개성을 키울 수 있게 하였다.
애기 포대기속에서 이미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던 애기는 덩리쥔 아버지의 친구들을 즐겁게 하였으며,
아저씨, 큰아버지들도 일이 있거나 없거나 덩씨 집으로
달려갔으며 심지어 때로는 또한 그녀를 안으려고 다투다가 귀밑이 빨개지도록 싸우기도 하였다.
덩리쥔 엄마는 이때 지난 일을 이야기 할때 여전히 웃으면서 탄식을 하였는데,
그들은 대만에 와서도 결혼을 하지 못한
속칭「老芋仔;늙은 타로 토란; 역자 주; 국공 내전 당시 국민당 군인중 결혼 하지 못한
퇴역군인을 가리키는 말로 중국 대륙과 타로 토란이 비슷하게 생겨서 이렇게 불렀다고 함」이었는데,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미가 있었어요! 그녀들은 이들과 결혼한 것으로,
집안의 대문은 영원히 모두 다 독신남의 형제들을 위하여 열려 있었고 형제들은
그들의 아이들에 대하여 마치 자신의 아이들 처럼 서로 지냈고 또한 화기 애애하였다.
덩리쥔은 아마도 삶에 대한 좋은 성정도 이런 환경속의
아저씨 큰아버지 이모 작은 아주머니에게서 키워진 것이 아닐까 한다.
사람의 마음은 아주 좋은 것이라고 들었으며 그녀도 특별히 말씨를 살피고
얼굴 표정을 살피는 것을 잘 알았고 친밀하게 하였지만
버릇 없지는 않았다. ,「정말 천사 이었어요」 덩씨 엄마가 눈을 붉히며 말을 하였다.
:「딸 아이가 어릴 적에,많은 사람들이 나와 이야기를 나눌때,
이 여자 아이는 천녀가 보은하러 내려 온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차라리 딸 아이가 무슨 천사 선녀가 아닐 지언정, 보은을 하고
이처럼 빨리 하늘로 올라 가버리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나는 정말로 딸아이가 이처럼 잘 되지 말기를 바랬어요!」
有十分鐘之久,我們兩人都默對著冷掉的咖啡流淚,我想起白先勇在《謫仙記》裡所引用蘇曼殊的〈偶成〉所題:
「人間花草太匆匆,春未殘時花已空。自是神仙淪小謫,不須惆悵憶芳容。」
再多安慰的話都說不出口,一個母親要有多大的思念,多大的盼回,才會希望自己的女兒「不要太好」啊!
10 분이 흐르는 동안 우리 두사람은 모두 다 차가와 진 커피를 마주 놓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白先勇씨가 《謫仙記》에서 인용한 蘇曼殊씨의 〈偶成〉라는 제목의:
「세상에는 꽃과 풀이 너무나 바삐 가버리니,봄이 채 머물지도 않아 꽃은 이미 져버리라。
여기로 신선이 죄을 지어 잠시 귀양을 왔으니, 슬퍼하며 아름다운 그의 모습을 그리워하지 마라。」
글이 떠올랐다. 더 이상 위로의 말이 도무지 입에서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그 얼마나 많은 그리움,
그 얼마나 큰 회상을 있기에,정말로 자신의 딸아이에게 「不要太好:너무나 잘 되지 마라」고 희망하였으나!
過人毅力從小看大窮苦磨出好性子
남보다 뛰어난 굳센 의지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볼수 있었고,가난 속에서 온화한 마음씨를 닦았다.
另一件鄧媽媽說來就得意的往事是鄧麗君的「三日斷奶記」!一年多之後,五弟鄧長禧出生,
「那時,丫頭還沒真正斷奶,我餵五弟奶,丫頭也搶著要吃,好在那時候我奶水多,
總會先讓她吃飽再餵弟弟,直到她兩歲,滿口已經發好了快長齊的牙,再不斷奶就不像話了。」
鄧媽媽下定決心讓她不再想奶,託了一位伯伯把她帶到高雄去玩,
第一個晚上吵奶哭了一下,第二天給她喝牛奶、豆漿,才第三天,就斷成功了。
또다른 이야기를 덩리쥔 엄마는 이야기하는데 재미있는 지난 일로 덩리쥔의 삼일에 젖떼기 기억이었다. !
1년이 지난 뒤 다섯째덩창시가 태어 났는데,「.그때 야토우(덩리쥔:계집아이)는
아직도 정말로 젖을 뗀 상태가 아니었고 나는 다섯째 동생에게 젖을 멕여야 하였는데,
야토우(덩리쥔:계집아이)도 젖을 빨려고 다투었어요.
다행히도 그때는 내가 젖이 많아서,언제나 먼저 딸아이가
먼저 배불리 먹고 다음에 동생이 젖을 빨았지요.
내내 딸아이가 2살이 될때 까지 그랬는데 입에는 이미 빨리도 가지런히
자란 이들이 났어요. 더이상 젖을 떼지 않으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였지요。」
덩리쥔 엄마는 그녀에게 더 이상 젖을 줄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하고는 한 큰아버지에게 딸아이를 데리고
高雄으로 놀러가게 맡겼다.첫날 저녁에 젖 달라고 잠시 보채고 울었고,
그 다음날에는 그녀에게 우유,두유를 주었고,
비로소 셋째날에 마침내 젖을 떼는데 성공하였다.
鄧媽媽說,光從這件小事情上就可以看出鄧麗君的過人毅力,在以後的歲月裡,
鄧媽媽陪伴她所走過的顛簸歌途來看,的確也證明了她過人的自持力,幾乎很少把麻煩帶給人家,
總是自己承擔忍受。別人需要什麼,往往她察言觀色就能了然於心,
默默幫助別人也相當為人著想,心竅玲瓏剔透。
덩리쥔 엄마가 말하기를 단지 이런 작은 일로도 덩리쥔의 뛰어난 의지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후의 세월동안 덩씨 엄마는
딸아이를 데리고 험난 한 가수의 길을 걸었던 것을 보면은,
분명히도 딸아이가 뛰어난 자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증명되었고,
가족들에게 말썽을 부린 것은 거의 없었다. 언제나 스스로 참아 내었다.
다른 사람이 어떤 것을 바라면 종종 그녀는 말과 얼굴 빛을
살펴서 곧 그 마음을 알 수 있었고, 말없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고
상당히 남을 위하여 배려하였으며 마음이 아름답고
총명하였다.
池上鄉住了一年,舉家再搬到屏東市稍微像樣的住處,小小的鄧麗君成為三個哥哥想溜出去玩的最佳「護身符」,
只要抱著她大大方方的出門,總是萬無一失。出門後,左鄰右舍總會有人叫喚「丫頭,來這邊玩」,
他們就很放心的把她「塞」給鄰居,一溜煙的跑去瘋個夠,天黑回家時,她總是已經安安穩穩的在家裡了。
池上鄉에서 1년을 살았는데, 온 가족이 다시 屏東市의 조금은 그럴 듯한 집으로
이사를 하였는데,어린 덩리쥔은 3명의 오빠가
슬그머니 빠져나가 놀러 가고자 하는 가장 좋은 「護身符」가 되었다.
단지 그녀만 안고서 당당하게 대문을 나가기만 하면,
늘 결코 틀림이 없었다. 문을 나선 뒤 여기 저기 이웃집에서 늘
「야토우 이곳으로 와서 놀자」하며 사람들이 외쳤다.
오빠들은 안심하고 덩리쥔을 이웃집에 맡기고는 재빨리 제법 미친듯이 뛰어 갔다.
날이 어두어 집에 돌아 올때,덩리쥔
은 이미 편안하게 집에 있었다.
鄧媽媽頗為自信的說:「我們家丫頭長得不是很漂亮,但從小到大都一直很有人緣,
這點從她小時候就看得出來,走訪她的幾位鄰居,不論是爺爺奶奶級的、叔伯嬸姨輩的,
或者是同齡相仿的,幾乎都是異口同聲的說她「人緣好,有禮貌,嘴巴甜,心地好」的確,俗話說:
「人緣就是飯緣」她能夠迅速走紅,在天賦歌藝與後天努力之外,還有重要的人緣,
不論任何不公平的待遇,或是遭受無預期的冷淡、排擠,她都一笑置之。
不爭,是窮人家孩子磨出來的性情,做人處事的圓融,也是她在窮日子裡「訓練」出來的成功要素之一。
덩리쥔 엄마는 자못 자신있게 말을 하였다:
「 우리집에서 야토우는 그리 아름답지 않게 자랐지만,어릴 적 부터 클때 까지 늘
내내 붙임성이 있었어요, 이점은 그녀가 어릴 적을 보면 알 수 가 있어요,
딸아이의 몇몇 이웃 집을 인터뷰하면 ,
할아버지,할머니 연배는 물론이고 아저씨 아주머니 연배 또는 또래들
거의 모두 다 이구동성으로 그녀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 하였어요.「인상이 좋고 예의가 바르고 말씨가 아름답고, 마음씨도 좋아요.」
속담에서 이르길:「인상이 바로 식복이라네」,
그녀는 빠르게 인기를 얻을 수가 있었는데, 천부적인 노래 기예와 후천적인
노력이외에, 또한 중요한 붙임성이 있었으며, 어떤 불공평한 대우를 받거나 또는
예기치 못한 냉대나 배척을 겪더라도 ,
그녀는 늘 웃어 넘겨버렸다. 다투지 않는 것은 가난한 집의 아이가 닦아 만들어 낸 성정이었고,
처세의 원만함도 그녀가 가난한
시절에서 훈련하여 만들어 낸 성공의 요소중 하나이었다.
日子清苦卻也快樂,退伍下來的鄧爸試著做點小生意,鄧媽媽則發揮「理家」的才智,
空心菜梗炒辣椒、酸菜炒辣椒、黃豆芽炒辣椒、苦瓜炒辣椒等都是家中餐桌上常見的「佳餚」,
油水雖少,但色、香、味俱全,五個孩子們搶得津津有味,常常吃得盤底朝天,
一直到鄧麗君過世,酸菜、苦瓜、黃豆芽等,這些最最平凡不過的窮苦人家菜餚,
都是她每次回家最愛吃的,不少人很懷疑嗜辣如命、少一頓辣椒都不行的她,
如何能保養一付水晶般的清靈剔透的好嗓子,她都不置可否的笑笑,也許,就真的是得天獨厚吧!
생활이 너무 가난하고 고달펐지만 즐겁기도 하였다.군대에서 전역한
덩리쥔 아버지는 시험삼아 작은 장사를 하였는데,
덩씨 엄마는 바로 돈 버는 재주를 발휘하였는데, 공심채 줄기를 볶은 고추,
배추절임을 볶은 고추, 콩나물을 볶은 고추,
여주를 볶은 고추 등 모두가 집안의 식탁에서 늘 볼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비록 기름기는 적었지만, 색깔, 향,맛이
모두 갖춰지어서 다섯아이들이 맛있게 다투면서 늘 그릇이 뒤집어 지도록 먹었다.
덩리쥔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배추절임, 여주, 콩나물등, 이것들은 가장 평범한
가난한 사람들의 채소 요리이다.모두 다 그녀가 언제나 집에 돌아 오면 즐겨 먹던 것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매운 것을 목숨처럼 즐겨서, 한끼라도 고추가 없어도 안된다고 하는
그녀가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어떻게 수정 쟁반에 맑고 투명한 소리같은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그녀는 늘 웃으면서 무엇이라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실은 특별히 하늘로 부터 좋은 것을 타고 났으리라!
肉香飯香大胃王背後蘊藏親情記憶
고기 굽는 냄새,밥 냄새가 대식가 배후에 혈육간의 기억으로 얽혀있다.
蕉風椰雨是屏東的特色,鄧家的院中也有一欉香蕉樹,是他們生活中不可或缺的「重要加菜來源」,
個把月香蕉成熟時,鄧媽媽請菜市場的水果商割走,換得一些些微薄零用錢,當天就會為大夥兒「加菜」,
那是久久才吃得到紅燒肉的珍貴時刻,小小一鍋肉,惹來垂涎多少,當爸媽的說什麼也不捨得吃,
兄妹這五張口總是一餐就把它報銷掉。香港天香樓的老闆回憶鄧麗君常去店裡點「東坡肉」這道菜時,
就會講小時候的故事給同桌的人聽,她愛吃的不只是因為紅燒肉的美味,而且是整個童年回憶的甘芳好滋味。
열대지방의 풍광은 屏東의 특색이었는데,덩씨 집안의 뜰에도 한 그루의 바나나 나무가 있었는데
이것이 그들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반찬의 원천이었다.몇개월만에 바나나가 다 자란 때,
덩씨 엄마는 채소가게 과일 장사를 불러 잘라 가게 하여서,
아주 얼마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용돈과 바꿨다. 그날은 바로 많은 특식을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오랜만에 비로소 돼지삼겹살고기 볶음(紅燒肉)을 먹을 수 있는 귀중한 때이었다.
아주 작은 냄비속의 고기가 다소간 침을 흘리게 하였는데,그때 덩리쥔 엄마 아빠가
무엇이라 말을 하여도 먹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남매 다섯의 입은 늘 한끼에
그것을 모두다 먹어 치워 버렸다.
홍콩의 天香樓의 사장은 덩리쥔이 늘 식당으로 와서 「東坡肉」이 요리를 주문할 때는
어릴 적의 이야기를 같은 식탁의 사람들에게 들려 주었는데
그녀가 즐겨 먹는 것은 돼지삼겹살고기 볶음(紅燒肉)의 맛이 있어서가 아니고
오히려 온전히 어릴 적 추억의
달콤하고 좋았던 기분 때문이라고 회상하였다.
兒時的苦日子對鄧麗君而言,是家人向心力最凝聚的時光,這情分,她一直念念不忘,
日後不管她多麼走紅,總是想盡辦法在逢年過節的時候和家人團聚,就是因為想念家人在一起的這種歡樂與融洽。
這段日子在她的記憶中並不算久,當她長成少女,特別是出道唱歌之後,幾個兄弟工作的工作、
求學的求學,自己又經常到世界各國演唱,一家人反而相聚無多,紅燒肉香氣裡蘊涵的濃厚親情,
更讓她格外難忘。
어린 시절의 괴로운 나날은 덩리쥔에게는, 가족의 응집력이 가장 강 하였던 시기로
이런 사랑이 그녀에게 늘 잊지 못할 것이어서
훗날에 그녀가 아무리 인기를 얻고 있든지 간에 언제나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새해를 맞이하는 명절이나 가족이 함께 모이는 때에
함께 하기를 바랬기에,바로 가족과 함께 이런 즐거움과 화목함을 그리워하였다.
이런 시기는 그녀의 기억에서 결코 오래되지 않았다. 그녀가 성장하여
소녀가 되었을 때.특히 노래의 길로 데뷰를 하였을 때, 몇몇 오빠는 일을 하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하였으며 자기는 또한 늘 세계 여러 나라로 가서 공연을 하였다.
온가족이 오히려 함께 모이는 것이
많지 않았기에 紅燒肉(돼지고기 볶음요리)의 냄새속에
묻어나던 진한 가족애를 더욱 더 그녀로 하여금 특히 잊지 못하게 하였다.
雖然是北方大妞,鄧麗君卻不愛吃饅頭,小時候的家境清苦,哪能容得孩子挑食,鄧爸疼女兒的「偏心」,
在這個時候就看得出來了,做得一手麵食好手藝的他,總是差遣孩子拿著自家做的饅頭、
包子或大餅,到鄰家去換一碗白飯回來給她吃,真箇是應了「一粥一飯當思來處不易」的格言,
她珍惜著換來不易的白飯,對兄弟們常為她去四鄰「要飯」的這份恩情也久久不忘。
비록 북방의 여자인 덩리쥔은 오히려 만두를 먹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았다.
어릴 적의 집안이 가난하고 힘들어서 어찌 아이가 편식하는 것이 용납되었으리라.
덩리쥔의 아버지는 딸아이의 편식하는 마음이 아팠다. 이때를 보면 알 수 있었는데.
국수 요리에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늘 아이에게 자기가 만든 만두,찐빵, 사오빙등을 가지고,
이웃 집으로 가서 흰밥 한 그릇을 바꿔서 그녀에게 먹게 하였다.
정말로 「죽 한그릇, 밥 한그릇도 나올 곳을 생각할 때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마땅히 생각하여야
하리라」라는 격언을 생각하여야 하였다.
그녀는 쉽지 않게 바꾸어 온 흰밥을 매우 소중히 여겼고,
형제들에게 대하여 늘 그녀를 위하여 도처의 이웃집에 가서
「 얻어 온 밥」의 이런 사랑도 오래 오래 도록 잊지 못하였다.
這個「白飯情節」,還延伸到卅年後,在一九九○年她赴金門勞軍那天,原本早上要飛的班機因天候不佳而暫時停飛,
松山機場空指部的指揮官就請勞軍的一行人留在機場等候,並請她為松山駐守的空軍官兵和眷屬們做一次小型的勞軍演出,
鄧麗君毫不猶豫的答應,臨時起意的小小演唱會,在簡樸的中山室舉行,她一樣認真、盡心的唱了好幾首,
讓空軍官兵和眷屬們樂的不得了,對她毫無超級明星架子的平易近人更稱讚有加。
이 「흰밥 이야기」는 또한 삼십년이 지난 뒤까지 이어져,
1990년 그녀가 金門으로 군 위문 공연을 가던 그날, 원래는 아침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려고 하였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잠시 비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松山 비행장 공군지휘부의
지휘관이 군 위문 공연 일행에게 공항내에서 머물며 기다리라고 요청하였으며
아울러 그녀에게 松山 주둔 공군 장병과 군인
가족을 위하여 작은 군 위문 공연을 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덩리쥔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응답하였다.임시로 만든 작은 공연히 조촐한 中山室에서 거행되었다
그녀는 똑같이 진지하고 진심어리게 몇곡을 불러서, 공군 장병과 가족을 아주 즐겁게 하였으며,
그녀에게 초특급 대스타의 거만함이 조금도 없어 가까이 하기에 편안하게 여겨져 더욱 칭찬이 더해졌다.
中午和官兵一起會餐時,她吃完第一碗白飯,很不好意思的小聲說:「太好吃了,我可不可以再添一碗?」
大家好高興她這麼喜歡軍中的伙食。結果,那一餐她總共吃了三碗飯,把許多年輕力壯的阿兵哥都比下去了,
不可思議的「大胃王」如何維持好身材,大家都不去猜測啦,只記得這位當紅明星毫不忸怩作態的落落大方,
也讓大家更為喜愛她的真樸、可親。
오후에 장병과 함께 식사를 할 때 그녀는 제일먼저 흰밥 한그릇을 다 먹었고
너무 미안해 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너무나 맛이 있어요, 한 그릇 더 할 수 있나요?」
모두들 그녀가 이렇게 군대 단체식사를 좋아흔 것을 기뻐하였다.
결과 그날 한끼에 그녀는 모두 다 3 그릇을 먹어서, 수많은 젊고 튼튼한 장병들이 모두 다 뒤 쳐버렸다.
불가사이한 「大胃王;대식가」가 어떻게 이런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지 모두들 추측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이 인기 대스타가 조금도 머뭇 거리지 않는 태도의 호방함을 기억하고
이것이 역시 모두들에게 더욱 더 그녀의 순박함과
친근함을 좋아하게 하였다.
鄧麗君雖然小時候不太愛吃饅頭,長大後卻對媽媽包的「一口餃」情有獨鍾,三哥鄧長富記得她在小時候就會自己和麵、
擀皮兒、調餡子、包水餃樣樣都來,鄧麗君去日本發展時,當時擔任日本寶麗多社長的舟木稔也一直記得,
「去鄧家吃水餃」是一大享受,滋味真的很難忘,也記得鄧麗君有一餐吃四十個小水餃的紀錄,
大家對她何以這麼能吃,又能一直保持這麼好的身材都驚訝不已!
덩리쥔이 비록 어릴 적에 그다지 만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 자란 뒤에는
오히려 엄마가 빚어준 찐빵에 대해서는 특별한 정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오빠 덩창푸는 기억하기를 그녀가 어릴 적에 스스로 반죽을 하고,
피를 밀고 만두 소를 넣고 물만두를 빚어 만들어
모두 다 하였는데. 덩리쥔이 일본으로 가서 활동할 때 당시 일본 폴리도 사장인
舟木稔도 내내 이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덩리쥔 집에 가면 물만두를 먹는다」는 하나의 즐거움이고 좋은 맛은 정말로 잊을 수 없었다.
또한 기억하고 있는데,
덩리쥔은 한끼에 거의 40개의 물만두를 먹은 것이 기록이어서,
모두들 그녀가 어떻게 먹을 수 있는 지 또한 내내 이렇게 좋은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지 의아해 하기를 그치지 못하였다.
水餃中有著對家鄉的懷念,有著對童年的記憶,對念舊的她而言,在包水餃的過程中會有一家人濃濃的親情記憶浮現,
那是她最珍惜的往昔歲月,在香港獨居的日子,她常教幫忙做飯的明姐包水餃,並且一邊包,
一邊說小時候的故事,樣樣瑣事都記得可清楚了,明姐回憶她們常在廚房一邊洗菜做飯,
一邊吱吱喳喳說往事的日子,怎麼也不肯相信這間小小的廚房裡,再也聽不到親切又愛聊天的女主人的聲音了……
물만두 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고,
옛날에 대한 그리워하는 그녀에 대해 말하자면, 물만두 빚는 과정
속에는 한 가족의 진한 우애의 기억이 떠오르고, 그것이 그녀가 가장 아끼는 지난 날의 세월이었다.
홍콩에서 홀로 지낼 때. 그녀는
늘 밥을 짖느라 바쁜 명씨 언니에게 물만두를 빚으라고 하였고
게다가 만두를 빚으면서 한편으로는 어릴 적 이야기,여러 소소한 것을
모두 다 아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명씨 언니는 회상하기를 그녀들은 늘 부엌에서 채소를 씻으면서 밥을 짓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난 일에 대한 세월을 조잘조잘 대기고 하였다고 하며
이 작은 부엌에서 친절하고 수다떨기를 좋아하던 여주인의 목소리를
더이상 듣지 못한다는 것을 어쩐지 믿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很講義氣六歲登臺不怯場特愛拍照
매우 의리를 중시하였고 여섯살에 무대에 올라 주눅이 들지 않았고 특히 사진 찍기를 좋아하였다.
話說回她的幼年時期,備受父母兄弟及親友鄰里的愛護,特別是很會看臉色又乖巧懂事,
很少挨罵挨打,那時眷村小孩普遍都在嚴格的「庭訓」中過著「棒下出孝子」的日子,
鄧爸爸教育兒女也很嚴格,鄧媽媽分享這有幾分俠義心腸的女兒行徑:每次只要是哥哥、
弟弟們不乖,被鄧爸罰跪了,她就會默不作聲的自動自發跑去和兄弟們跪在一起,
這種小小年紀就「患難相挺」的義氣,讓老爸看了也不忍心,不一會兒就會連帶免去了對眾兒子們的責罰。
「妳看,她才多小年紀啊,就懂得察言觀色,還知道怎麼摸準老爸的心去救兄弟,真的是很講義氣!」
鄧媽講這段往事時,眼裡盡是笑意。
이야기를 그녀의 어린 시절로 돌리면, 부모 형제 그리고 친구 동네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특별히 얼굴 빛만 보아도 영리하게
사리를 분별할 수 있어서, 거의 혼나거나 야단을 맞는 것이 없었으니
그때 권촌의 어린 아이들은 보편적으로 엄격한 가정교육속에
「매 아래서 효자가 난다」라는 세월을 보내며 지냈다.
덩리쥔 아버지도 딸아이를 가르칠 때 엄격하게 하였고 엄마도 다소간 의협심
이 있는 성품을 가진 여자가 되기를 바랬다.
언제나 만일 오빠,동생들이 얌전 하지 않으면,아버지가 벌로 무릎을 꿇게 하였다.
덩리쥔은 말없이 잠자코 자발적으로 스스로 형제들 가까이로
다가 가서 함께 무릎을 꿇었는데 이같이 아주 어린 아이가
함께 어려움을 나눈다는 의협심도 있어서 아버지로 하여금 보고는
더이상 모질게 하지 않게 하여 잠시뒤에 아들들의 잘못을 함께
면하게 하여 주었다.
「딸아이를 보면 겨우 몇살 되지 않았지만요,말을 살피고 얼굴 빛을 보아서 잘 알 수 있고
게다가 어떻게 아버지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서 형제를 구할 수 있는 지를 알았지요 ,정말로 매우 의협심이 많았어요!」
덩리쥔의 엄마는 지난 날의 이야기를 말할 때, 눈에는 내내 웃음이 보였다.
鄧麗君才兩、三歲大,就跟著收音機學唱歌,咿咿呀呀的逗人得很,鄧媽媽當時從沒有想過有朝一日她女兒會成了歌星,
只覺得這個孩子只要有音樂聽就乖乖的,實在好帶;四、五歲的她也特別喜歡跟著媽媽看電影,
片長兩個鐘頭,只消拿兩塊餅乾給她啃,就能不吵不鬧的看到電影終了,這個小影迷一直保持著愛看電影的嗜好,
直到她去世前,都還在清邁的度假時光租片子來看,清邁的錄影帶出租店老闆形容她很懂得選好片子,
會挑水準很高的來看,而不是隨便租了些殺時間的商業片而已,如果她不是這麼早過世,
她甚至於還開玩笑的想過,要嘗試退居幕後當導演哩!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서 누구에게 배웠나요? 덩리쥔의 엄마는 마치 자신도 이렇게 조금은
「 공로」가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바로「 현명하게도」 라디오를 샀었다.
덩리쥔이 겨우 2,3 살때 이었는데,라디오를 따라서 노래를 배웠어요,
종알 종알 하면서 사람들을 아주 즐겁게 하였는데 덩리쥔 엄마는
그때 언젠가 딸아이가 가수 스타가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이 아이는 단지 들을 음악만 있으면 곧 얌전해 진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실제로 잘 데리고 다녔으며, 대여섯살때의
딸아이도 특히 엄마와 같이 영화 보는 것을 좋아 하였다.상영시간이
2시간이라도 단지 餅乾 두개를 쥐어 주어서 그녀가 먹게
하기만 하면 떠들지도 보채지도 않고 영화가 끝날 때 까지 보았다.
이 작은 영화 매니아는 내내 쭉 영화를 좋아하는 취미를 유지하여서,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도 이르러, 늘 치앙마이에서 휴가를 보낼 때도
역시 영화를 빌려서 보았다. 치앙마이의 비디오 대여점
주인이 설명하기를 그녀는 매우 좋은 영화를 고르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수준이 높아 볼 만한 것을 고를 수 있었다고 하였다.
게다가 마구 시간을 때우려고 상업 영화만을 골랐던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만일 그녀가 이처럼 빨리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심지어 농담 삼아 생각하면, 공연의 막 뒤로 물러난 뒤에 시험 삼아 영화감독이 되었을 거야!
總會把她打扮得漂漂亮亮的帶去參加,有時客串唱歌帶動氣氛,贏得一片驚嘆、讚美聲:
鄧家的女兒好會表演,是大家一致的印象。鄰居裴媽媽最愛聽她唱〈採檳榔〉、〈晚霞〉等老歌,
每次一看見她就呼喚到家裡來,要她唱幾支曲兒,她也有求必應、字正腔圓的唱將起來;
平時還喜歡模仿明星,逗得在鄰里媽媽都開心非常。
집안에 딸아이가 오직 하나이어서, 덩리쥔 엄마는 덩리쥔을 특히나 마음을 써서 잘 돌보았다.
친구나 혹은 동네 이웃집에
경사가 있으면 늘 딸을 예쁘게 치장하여서 데리고 같이 갔고,
때로는 특별히 노래를 불러서 분위기를 이끌게 하여서,
한바탕 경탄, 칭찬하는 소리를 얻었다.
: 덩씨네 딸아이는 정말로 노래를 잘 부르네, 이것은 온 동네 사람들의 일치된 인상이었다.
이웃집의 裴씨 아줌마는
덩리쥔이 부르는〈採檳榔〉、〈晚霞〉등의 옛노래를 가장 듣기 좋아 하여서,
언제나 덩리쥔을 보기만 하면 자기 집으로
불러서, 몇곡을 부르길 바랬다. 덩리쥔도 부탁하면 언제나 들어 주어서.
옹골지고 똑똑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평상시에는 또한 스타를 흉내내기를 좋아 하였고 동네 아주머니들을 즐겁게 하여
모두들 매우 즐거워 하였다.
不只歌好、表演好,教人喜歡,她更為人所讚揚的是:「特別懂禮貌」。
那天我花了一整天在蘆洲老家訪問聽過她小時候唱歌的鄰居伯伯、媽媽,
一提起鄧麗君,幾乎是異口同聲的說:這孩子很懂事,嘴巴很甜,一碰面就會叫人!
「叔叔、伯伯好」「阿姨、媽媽好」常掛在口頭,那是自然流露的家教好,
有禮貌,而並非有所企圖的討好,因為這樣的小孩並不多見,所以,這一點特別讓鄰居們印象深刻,
歌唱得好不好已經不記得了,但是,只要喚她來唱,她總是有求必應的,給他們帶來一段相當愉悅的時光。
연기도 잘하였는데 이는 천부적이기도 하도 노력이기도 하였다.
오래된 권촌에서는 툭하면 어린 나이의 그녀가 노래 연기 모두 뛰어난 공연을 들을 수 있었다.
단지 노래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연기도 좋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여서, 그녀가 더욱 더 사람들의
칭찬받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특별히 예의를 잘 아는 것」。
그날 나는 하루 온종일을 蘆洲의 고향에서 그녀가 어릴 적에 부른 노래을 들었던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들을 방문하는데
다 썼다. 덩리쥔에 대해 이야기를 일단 꺼내면 거의 대부분 이구동성으로 말을 하였다;
이 아이는 매우 철이 들었고 말씨가 예쁘고, 한번 만나면 사람들을
아저씨,큰 아버지 안녕하세요, 이모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라고
잘 불러서 늘 입에 달고 다녔다. 그것은 자연히 가정교육이 좋고
예의가 바르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고, 아울러 결코 의도적으로 잘 보일려고 하는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어린 아이를 결코 많이 보지 못하였기에 그래서 이런 점이 특히 이웃집 어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노래를 잘하였는지 못하였는지는 이미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잔지 그녀를 불러서 노래르 시키면 그녀는
언제나 부탁하면 응낙하여서, 그들에게 상당한 즐거운 시간을 한참 가져다 주었다.
把她的膽子練大了,應變能力也掌握得很靈活,鄧媽說,她真的膽子很大,
也該說是她夠自信吧!後來的歌途發展上,無論在任何國家、任何陣仗上,她都沒有怯場過,
她也從不逃避任何挑戰,語文不夠好,該學語文,她就努力地去學通、學好,
該入境隨俗的也能很快就適應下來,這的確是一種相當難得的秉賦,也似乎注定了她該當「國際」級的明星。
그녀가 최초로 무대에 정식으로 올라 공연을 할 때가 겨우 여섯살에 지나지 않았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어린 나이의 아이 시절부터 용감하게 낯선 사람 앞에서 공연하였기에
그녀의 담력이 크게 단련되었을 것이다.
임기 응변의 능력도 매우 민첩하게 장악하였다. 덩리쥔의 엄마가 말을 하였는데,
딸아이는 정말로 담력이 컸으며,
또한 말하여야 할 것은 그녀는 제법 자신감에 차 있었다!
훗날 가요계의 길에서 성장할 때 어떤 나라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나,그녀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고, 또한 어떤 도전도 피한 적이 없었다.
언어 실력이 충분하지 못하면 공부를 하여서
그녀는 노력하면서 통달하게 되었고 잘 배웠다. 다른 나라에 들어 가면
그지역의 풍습을 따라서 빠르게 적응 하였다.
이런 정확함은 상당히 얻기 어려운 천부적 재질이었기도 하며
그녀는 국제적 스타가 되어야 한다는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같았다.
總是被鄧媽媽打扮得漂漂亮亮的,衣服雖然不多,卻總是乾乾淨淨,絲毫沒有窮小孩的破舊髒亂感覺,
大約她也知道自己的可愛,從很小就顯得喜歡照相。最初,鄧媽媽會帶她到鄰居初媽媽所開設的照相館拍照;
四歲多的時候,鄧麗君居然敢一個人走到照相館,告訴初媽媽說媽媽叫她來拍照,
照相館老闆欣然為她拍了一張。傍晚,告訴鄧媽媽說相片照好了可以取件,
鄧媽媽才知道女兒的鬼靈精。那張照片一直保存到現在,成為她幼年時代最有紀念意義的一張照片。
그녀는 또한 엄마를 놀라게 한 총명한 모습이 있었는데
바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것이었다.귀엽게 자라서 또한 들어 내기를
좋아한 그녀는 언제나 엄마가 예쁘게 치장하여 주었으며,
옷이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깨끗하고 말쑥하였기에 조금도
가난한 집 아이의 낡고 더러운 느낌이 있지 않았다.
대체로 덩리쥔도 자기가 귀엽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어릴 적 부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드러나 보였다.
최초로 덩리쥔 엄마는 딸 아이를 데리고 이웃에 처음으로 문을 연 사진관에 갔었다.
: 네살 때 덩리쥔은 뜻밖에 혼자서 사진관에 자신있게 가서 처음에 엄마가 말한 대로
엄마가 저더러 사진을 찍고 오래요 하고 이야기 하였고 사진관 주인은 흔쾌히
덩리쥔을 위하여 사진을 한장 찍어 주었다.
저녁 무렵 덩리쥔 엄마에게 사진이 잘 찍였으니 찾아 가도 된다고 이야기하였다.
덩리쥔 엄마는 그제서야 딸아이가 아주 영리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진은 내내 지금껏 보존되어 있는데,
그녀가 유년 시절에 가장 의미가 있는 기념 사진이 되었다.
幼稚園唱唱跳跳的學習課程裡,老師明顯看出她有唱歌跳舞的天分,學唱學跳又快又好,
放學後,就回家唱給爸媽和左鄰右舍的媽媽、叔伯聽。當然,沒有物質鼓勵的年代,
只能贏得許多掌聲,掌聲,是她成長的養分,讓她從小就自信滿滿。
덩리쥔 아버지 어머니는 낮 동안 늘 매우 바빠서 딸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덩리쥔이 네살이 좀 지났을 때 그곳에 유일한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노래를 하기도 하고 춤도 추기도 하는 학습 과정에서 선생님은 그녀가 노래하고 춤추는 것에
천부적 재능이 있음을 분명하게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노래를 배우고 춤도 배우는데 아주 빠르기도 하고 잘하기도 하였다.
방과후에 집으로 돌아 와서는 엄마 아빠와 이웃의 아저씨 아줌마 에게 노래를 불렀다.
당연히 물질 없이 격려하는 시기이어서
단지 수많은 박수 소리을 얻을 수 있었다. 박수소리는 그녀가 성장하는데 양분이었고,
그녀로 하여금 어린 시절부터 자신감에 차게 하였다.
她帶著鄧麗君到當時屏東唯一的「李彩娥舞蹈社」學芭蕾舞,聰明伶俐的她,同樣的一下子就學會,
連同班的大姊姊們都佩服這個不足齡的小芭蕾舞星。然而,學舞畢竟是有錢人家才玩得起的,
在這個舞蹈班的短短學習歷程,不久就因家中經濟狀況不佳而停止,
但已經為她打下相當不錯的基礎,對她日後的演藝事業有相當的影響力。
덩리쥔 엄마는 그당시에 갑자기 기발한 생각을 하였는데, 집안의 경제적 빈궁함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이를 악물고서 그녀를
잘 키워야겠다고 결정하고는 딸아이를 데리고 당시 屏東의 유일한「李彩娥 舞蹈社:이채아 무도학원」
에서 발레를 배우게 하였다.
총명하고 영리한 그녀는 같은 태도로 단시간에 열심히 배웠기에 같은 반의 큰 언니들 조차도
이 나이 어린 발레무용스타에 대해서
탄복하였다. 그러나 발레를 배우는 것은 필경 부잣집만이 배울 수 있었기에
이 무용반은 단기간의 학습 이력이 되었다.
오래되지 않아 집안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멈추게 되었지만
이미 그녀는 상당히 좋은 기초를 다 배웠기에 그녀가 훗날
연예 사업을 하는 것에 상당한 영향력을 있었다.
飜譯 김강현 kim ganghyeon 金康顕
[등려군노래 중국어 제2집 20곡]☜zip
鄧麗君歌曲大全(第二集/中國語)影音珍藏.
飜譯 김강현 kim ganghyeon 金康顕1000곡 [WMP]
첫댓글 지금 중국에서 이 책을 사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我在网上购买这本书,正在看书看得很入迷。)이렇게 한국어로 번역하시는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번역한 것을 읽으시다가 혹시 부족한 점이 발견되시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번역의 노고에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진캉시앤님 감사드립니다./멋진남자님에게도 감사들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캉시앤님 의 長文의 글 번역작업
찬사를 보냅니다.
회원의 한사람으로 무한한 감사 드립니다,
애 쓰셨읍니다.
대만이나 우리나라나 어려웠던 시기에
덩리쥔도 고생하며 꽃을 피웠고
아마도 우리의 장년 세대도 이글을 보면
왠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것 같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시며 관심을 보여주신 여러분께도
감사 드리며 자신을 돌이켜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잘잃었읍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