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원의 비애(悲哀)
필자의 나이가 환갑을 넘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있는 것 같다. 충분히 이해도하고 용서도 한 것 같은데 그 상처의 잔상(殘像)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한 동네에서 사시는 어머니는 어린 시절 필자에게 부족한 사랑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기회가 될 때마다 온갖 먹거리와 과도한 신경을 쓰시지만 그 때마다 필자는 거부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상실감이 숨어 있다가 나도 모르게 거절부터 하고 본다.
필자의 아버지는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거의 고아처럼 살아오신 분이었다. 가정을 이루었지만 어떻게 가장으로, 아버지로 남편으로 살아야할지 본(絊)이 없다 보니 그 부족함은 온 식구들이 감당해야 했었다. 특히 자녀들 학교생활은 전적으로 어머니가 다 감당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필자가 장남이라서 서로가 익숙지 못한 새로운 길을 가야 했다. 그 당시에는 육성회비라는 명목으로 학비를 내며 다니는 시대였다. 제 때 납입하지 못하면 담임 선생님께 불러 다니며 압박을 받아야만 했었다. 가정형편이 가난해서 겨우 끼니를 굶지 않을 정도였기에 수업료는 항상 기한 후에 내는 형편이었다. 미술이나 특별 활동시간에 준비물을 사야하는 경우는 거의 빈손으로 다녔고 그나마 감지덕지 하는 맘으로 다녔었다. 5학년쯤 담임 선생님이 시골 학생들을 위하여 특별한 숙제를 제시하였다. 모형을 제작하는 공작(工作)시간 이었다. 각 자 원하는 모형을 신청하면 공동구매해서 실습하는 시간이었다. 그 당시 인기 있었던 어린이 잡지에 나왔고 사진으로만 봤던 여러 탈것을 직접 모형으로 만드는 가슴 뛰는 제안이었다. 필자는 비행기 모형을 신청했고 그 당시 오백 원만 내면 되었다.
이 번 만큼은 꼭 사고 싶었다. 어머니께 미리 말씀했지만 돈이 없다며 단번에 거절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안 사도 학교 다니는 일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필자는 조르면 되겠지 하는 맘으로 계속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제시한 기한이 월요일이고 일요일 날은 사생결단으로 매달렸다. 부엌으로 따라 다니고 시냇가 빨래터까지 쫄쫄 다니며 온갖 사정을 다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간절히 사정해보는 것은 그 때 이후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들어주도록 하기 위해서 별 별 다짐과 약속을 다한 것 같다, 더 동생들 잘 보살피고 엄마 심부름도 잘하고 등 등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말은 다했다, 정말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어머니 일을 거들면서 강, 온 정책을 해보았다.
하지만 결국 빈손으로 그 다음 날 학교에 등교했다.
그 때의 상실감은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으며 거절의 두려움은 인간관계에서 평생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성경에 보니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이후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무엇을 강하게 요청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긍정적인 효과로 본다면 어떤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남에게나 나 자신에게 집요하게 구하는 일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는 집념이 강한 사람들과 달리 어느 정도 구하다 안 되면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타입이다. 가난이 주는 유익도 분명 있지만 또 평생 영향을 끼치는 부정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장애이다. 지금은 부족함이 없는 삶이지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범사에 때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김으로 지혜를 알리고자 하는 의도이다.
세상은 늘 변하고 돌고 도는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생명은 늘 자라기 때문이다.
나중에 잘하려는 장담은 우리에게 확실한 보장을 해주지 못한다.
그 날 그 날 해야 할 책임이 있고 제 때에 공급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식이든 부모이든 나중은 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하루의 삶에 만족하고 오늘 일이 중요하며 기회가 될 때 선한일 놓치지 말고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는 교훈이다.
나중에 어머니도 깨달았는지 동생들에게는 요구를 관대하게 들어 주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 야산개발로 품을 파는 어머니로서는 수중에 돈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인생 살다가 누구나 아픈 기억들이 있었겠지만 왠지 숨기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긴다. 그 예로 입양을 한 경우에는 거의 숨기지만 언젠가는 시한폭탄 같은 불안감을 안고 지내다 결국 알게 된다,
기독교 영향을 받은 서방은 처음부터 알리고 당당하게 키운다고 한다.
감출 것이 아니라 실수든 연약함이든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야만 또 다른 잘못을 반복하는 일을 줄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시대적 상황과 처지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방법이 더 나은 인생이리라. 필자가 요즘 결혼 적령기인 자녀들에게 가족의 역사를 카톡방으로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 가족의 배경은 이미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특히 배우자를 만나 서로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은 걸림돌이 된다. 살아온 본인 역사와 가족의 역사를 알아간다면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보내고 나이가 들어서야 그 시대와 배경을 이해하지만, 이미 흘러가버린 강물처럼 되돌릴 수 없다. 살아생전에 가족의 역사를 더 이해했더라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대하진 않았을 거라는 후회가 된다. 이제 팔순을 넘은 어머니와 노인 성도들을 좀 더 이해하고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이미 굳어진 삶의 습관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납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활뫼지기 박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