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48자나 되는 엄청난 관직명이다. 이 관직명은 당대의 권신 김부식의 관직명에 이어 고려에서는 2번째로 긴 관직명이다. 또 이 관직명을 받기전 신돈은 '진평후(眞平侯)'라는 작위를 받기도 한다. 명나라에서는 공민왕을 왕이라고 하고 신돈을 국상(國上)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당시의 신돈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신돈은 과연 개혁자의 모습만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가 한일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권문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성균관을 중용한 것 밖에는 없다. 이런 것도 그가 권력을 손에쥔 초기에만 행해졌던 것들이다.
신돈의 생각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는 그의 한가지 행적을 통해서 단적으로 알 수있다.
1370년, 그는 이미 앞서 말한 관직 48자나 되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으면서 또 공민왕에게 충주천도를 제의하며 스스로 '5도 도사심관'에 올라 사심관을 부활시키려다 공민왕에 의해 좌절된다.
여기서 공민왕이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사심관은 도둑과 같다.'
과연 사심관은 어떤 관직이었을까?
'사심관'제는 고려초기 태조때부터 시작된다. 태조가 항복한 경순왕을 신라지역의 사심관으로 삼고 그 지역을 자치하게 함으로써 시작된다.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해당지역의 민심이반을 막기 위해서 시작되었던 샘이다. 사심관은 초기에 주로 지방세력 회유목적으로 잘 이용되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지방에 세력을 둔 사심관들의 경제적, 정치적 성장이 어울려저 지방에 기반을 둔 마치 지방제후와 같이 변모해 중앙에서 통제할 수 없는 형태로 변질되어 간 제도이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이 제도를 폐지해 왕권의 위협을 막는다. 사심관은 지방에서 토지, 농민, 노비를 사유화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돈이 원한 '5도 도사심관'은 어떤 관직이었을까?
고려시대는 지방행정이 경상도, 전라도, 교주도, 서해도, 양광도의 5도와 북계, 동계의 양계로 분할된다. 이중 5도 도사심관이라 하면 양계를 제외한 5도 모두를 스스로의 관할로 삼는 권리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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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적힌 신돈의 기행을 우리는 곧이 곧대로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후대에 조선왕조의 부정적인 시각이 의도적으로 들어가있기 떄문이다. 그러나 시대를 불문하고, 동양의 역사서 편찬원칙은 '술이부작(:서술하는 것이지 짓는게 아니다.)'의 원칙이 확고하게 지켜져 왔다. 그때문에 역사서를 편찬할때는 역사적사실을 곡해하는 것이 아니고 내용밑에 주를 달아 편찬자의 생각을 다는 정도이다. 고려사에도 신돈에 대한 내용에도 주를 달아 편찬자의 생각을 따로 정리한걸 보면 이 술이부작의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신돈은 공민왕의 개혁방편으로만 등용되었지만 최후에는 공민왕세력에 의해 제거당한다. 실질적으로 공민왕이 숙청한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권력추구과정에서 공민왕에게까지 위협적으로 부담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돈은 몸종 반야를 공민왕의 첩으로 삼아 우왕을 탄생시키는데 공헌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시황때의 진나라의 대부 여불위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불위과 스스로의 애첩과 관계한뒤 몸을 배이게 하여 진나라의 태자 자초와 결혼시켜 태어난 것이 진시황이다. 그때문에 진시황은 여불위에 자식으로 의심받고 있다. 신돈도 몸종 반야와 관계한뒤 공민왕과 결혼시켜 태어나게 한것이 우왕이다. 그때문에 우왕도 신돈의 자식이라 의심받고 있다.
과연 이는 후대의 위작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혹 일각에서는 신돈이 승려라는 점을 들어 신돈이 몸종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신돈은 이미 환속한 파계승이였으며 이미 본 바와 같이 권력을 손에쥐고 야망을 꿈꿨던 사람이다. 이런 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몸종을 거느리는 것도 사리에 맞을 것이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신돈은 스스로 고려의 '여불위'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 오도도사심관이 되고 조정을 한때 틀어쥐어 공민왕에게까지 위협이 된 인물 신돈. 역사서에 드러나는 개혁의 일각보다 우리는 그의 야망이 무엇보다도 컸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신돈을 평가할때 그가 실시한 개혁으로만 그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신돈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 실시된 개혁에 대한 평가가 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참고자료를 하나 덧붙이고자 한다.
고려말의 이존오란 사람이 신돈의 모습을 보고 지은 시조이다.
이 시조를 보고 나면 그가 당대에도 권력가의 모습으로 남아있었다는것을 얼핏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돈의 횡포를 풍자한 시조
- 제목 : 구름이 무심탄 말이
- 작자 : 이존오(1341~1371) - 자는 순경, 호는 석탄. 고려 공민왕 때에 정언 벼슬을 지냈다. 성품이 강직 결백하여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후에 대사성에 추증되었다.
- 주제 :간신의 횡포 풍자(신돈의 횡포 풍자)
- 내용
구룸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중천(中天)에 떠 이셔 임의(任意)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光明)흔 날빗츨 따라가며 덮나니.
*구름 - 간신을 비유함. 요승 신돈을 가리킴
*허랑하다 - 믿기 어렵다.
*중천 - 조정을 비유함
*날빗 - 임금(공민왕)의 총명을
- 해설
구름에게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말이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허황된 말이로다. 구름은 하늘 한복판에 번듯이 떠서 멋대로 돌아다니며 짓궂게도 밝은 햇빛을 쫒아다니면서 덮어 버린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구름은 의뭉한 신돈이요, "과명한 날빛"은 왕의 총명을 비유한 것이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라는 구절은 신돈의 권세와 방자함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부분이고,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는 신돈의 행패를 신랄히 꾸짖은 구절이다.
첫댓글 딤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