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교수등 광해군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의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로 광해군의 실정의 대표작 과도한 궁궐공사를 듭니다.
그런데 그 근거로 내세우는 기록에 대해서 광해군일기는 명백히 반정세력들에 의해서 그 집필이 주도되었기에 과연 이런 기록을 얼마나 신뢰할수 있는가입니다.
물론 전란후에 소실된 궁을 복구하느 것이 필요하기는 한데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기존에 소실되었던 창덕궁외에도 인경궁 자수궁등을 경복궁의 10배수준으로 지었다라는 것에 대해서 이말이 과연 사실일까에 의문을 가집니다. 인경궁 자수궁을 경복궁의 10배수준으로 지을 것이라면 왜 진작에 중요한 핵심인 경복궁은 복원치 않았는지?
제일 중심인 경복궁을 폐허로 놔두고 새로히 다른궁들을 그렇게 거대하게 지어야 할 타당한 사유가 있슬지?
그리고 궁궐공사로 인한 민생고에 대해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하는데 당시 광해군을 가장 지지하던 정인홍등의 상소가 있었는가가 입니다. 정인홍은 비록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스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문제에 무관심한것이 아니고 철저히 정계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성격상 만일 광해군이 그런 무리한 토목공사로 민생고가 일어났다고 판단했스면 가차없시 중단요구 상소를 올릴것입니다.
이미 그는 임해군 영창대군 인목왕후등의 처리에 관한 상소를 올린바가 있기에 민생고와 관련된 궁궐공사에 대해서도 결코 좌시하지 않을것입니다.
헌데 그 관련해서는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광해군은 왕권기반이 아무래도 정통성에서 취약했기때문에 궁궐공사를 통해서 왕권을 세울생각이 강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민생파탄으로 이어질정도라면 되려 왕권이 무너지게됩니다.
광해군 일기뿐만 아니라 계축일기에도 보면 광해군에 대해서 온통 모두 부정적인 일변도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목대비의 광해군 죄목36가지도 당연히 억지부리는 내용 일변도이고.
오항녕 교수는 이밖에도 경연은 안하고 친국만 했다라는 소리를 하는데 경연을 안한다고 성군이 될수 없슬까요?
친국없시 마냥 경연만 할 정도라면 그 시대는 참으로 안정적인 시대여야 하지만 광해군시대가 그렇게 되도록 돌아갔슬까요?
광해군의 왕권이 불안한 처지에서 당연히 경연이 아닌 친국이 많을수밖에 없는 환경이 불가피한데 그러한 요인을 간과하고 광해군이 경연을 안했다라고 폭군이라고 매도한다는 것은 당연한 억지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