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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과 과학
- 타이완 타이뻬이, 저녁법회
1979년 8월 16일
*자신의 참된 주체적 마음을 보게 될 때 본래진면목인 '참나'를 깨닫게 된다.
예술과 과학의 근본적인 차이란, 예술은 보다 더 정묘하고 깊은 감정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며, 과학이란 우주의 모든 면에서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합리적인 표현을 말한다. 무엇이 예술인가? 그대들은 수많은 일들을 한다. 그러한 일들을 좀 더 세련되고, 좀 더 미묘하게 처리하게 되면 해당 분야에서의 예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령 말하는 것이라든가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 그렇게 하면 예술적인 말과 예술적인 문장이 된다.
한편, 무엇을 하는데 있어서 합리적이며 논리정연하게 이끌어 가면서 원인과 결과에 대한 관계를 명백하게 해주는 것이 과학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과의 영역 안에 있다. 인과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각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뒤에는 그 원인적 요소가 있다. 예를 들면, 눈 앞에 보이는 설탕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탕수수나 사탕무다. 사탕수수나 사탕무가 원인이며 설탕은 결과다. 그리고 사탕수수와 사탕무가 결과면 그 씨앗이 원인이 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도 그 뒤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이란 합리성(논리)에 기초하여 모든 것들의 원인-결과 관계를 올바르게 규명하는 것이다. 2,000년 전에 위대한 현인인 까나더(Kana’da)라는 철학자가 “Ka’ran’a’bha’va’tka’rya’bha’vah - 원인이 되는 요소가 없이는 그 어떤 결과도 있을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영적 수련은 과학의 영역 안에 들어 있다. 영적 과학을 최초로 알려준 사람은 약 7,000년 전에 태어난 쉬바(Shiva)이다. 쉬바의 부인은 빠르바티(Pa’rvati)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빠르바티를 따라(Tara)라고 불렀다. 현재 이 영적 과학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 부분은 새의 두 날개와도 같다. 하나는 니가마(Nigama)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마(A’gama)이다. 빠르바티의 질문은 니가마로 알려졌고, 쉬바의 답은 아가마로 알려졌다. 한 때, 빠르바티는 쉬바에게 다음처럼 물었다. “오 주여, 삶의 모든 면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면에서 최소한의 자격요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학공부를 마쳐야 합니다. 의사의 최소 전제조건은 의학공부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과학을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최소한의 자격요건이 당연히 있지 않겠습니까?”
쉬바께서 대답하셨다.
“내면화의 과정에서 - 우주순환에서 정묘(진화)화로 나아가는 순환 과정에서 - 모든 것들은 거칠음에서 세밀함으로 나아간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5대 원소로 이루어진]거친 물질계에서의 갈등(clash)과 그것이 극복되는 (cohesion) 과정을 통하여, [고체요소가 최초로] 원시세포(protozoic cell)라는 생명체로 태어나며, 이 원시세포는 또다시 갈등과 극복(clash and cohesion)을 통하여 더욱 진화된 원형질 세포(metazoic cells)로 되고, 이 원형질 세포들로 이루어지는 신체구조를 가지는 생명체로 진화된다. 그리고 이 진화된 생명체는 마침내 지성이 있는 인간의 형상으로 진화한다. 인간 말고도 많은 생명체들이 지성을 가지고 있지만 직관은 없다. 인간의 경우에는 지성과 함께 직관도 갖고 있다. 인간은 매우 독특한 존재다. 인간의 마음은 의식할 수 있는 부분[conscious mind]과 의식할 수 없는 부분[unconscious mind]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속에 모든 잠재력이 숨어 있다. 쉬바는 말씀하시길 생명체가 인간의 형상[몸과 마음]을 얻게 되고 나서, 헌신의 감정을 개발하게 되면, 그 두 가지로서 [영적 수행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는 것이 되며, 그것으로 충분하며 또한 최종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몸을 갖고 태어나서 헌신의 감정을 깨워나가면 최고의 단계인 신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아무도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다. 지고의 경지, 신성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모든 인간의 타고난 권리다. 그 곳에는 계급, 종파, 인종, 학력의 차별이 없다. 교육을 많이 받았더라도 헌신의 감정이 없으면 뒤쳐질 수 있고, 많이 배우지 못했더라도 헌신이 감정이 넘쳐흐르는 사람은 최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이것이 쉬바의 대답이었다.
빠르바띠의 중국식 이름은 타라라고 말했다. 타라는 쉬바에게 헌신이 어떻게 유일의 길인지 알 수 있으며, 헌신이 유일한 길인지 일단 알았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모든 노력을 헌신을 개발시키는 데로 쏟을 수 있는지 질문했다.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칠 때의 마음이 헌신자를 만들며, 헌신자의 마음상태가 바로 헌신이다. 모든 것을 그분에게 드리고자 하는 마음의 정서 전체를 일컬어 헌신이라 말한다. 쉬바는 말씀하셨다.
A’TMAJINA’NAM’(아트마갸남) VIDURJINA’NAM(비두리갸남)
빠르바티는 “그러면 아트마갸남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쉬바는 다음처럼 대답하셨다.
ATMAJUNA’NAM’ VIDURJINA’NAM
JINA’NA’NYA’NIYA’NI YA’NITU;
TA’NI JINA’NA’VABHA’SA’ NI
SA’RASYANAEVA BODHANA’T
그대들이 산스크리트어에 보다 익숙할 것이므로 나는 팔리어(Pali)로 말하지 않았다.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의 실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앎이란 외적 파동을 내적으로 투영시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이나 파동을 내적으로 투영시키는 것이 지식이다. 과학적으로 말한다면, 외부에서 오는 파동을 내적으로 투영하는 것, 즉 외부로부터 오는 느낌이나 파동을 마음에 투영시키는 것이다.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지식이란 객체(외부의 것)를 주체화(내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대가 어떤 외적인 것을 알게 될 때 그대의 마음의 일부[아함; 에고]가 아는 주체로 되고, 마음의 다른 일부[칫따]는 외적인 대상[의 모습]로 변환된다.[즉 아함이 대상의 모습으로 변환된 칫따(객관심; 상념)를 본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 자신을 알고자 할 때, 즉 자아실현(참나를 아는 것)을 이루고자 할 때는, 그대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예를 들면, 코끼리를 보거나 혹은 소를 보는 경우, 보는 것은 그대의 주관심[보는 행위를 하는 주체인 아함과 아함의 보고 있는 행위를 관조하는 마핫]이다. 그러나 주관심은 봄, 그 자체는 아니다. 그 보는 자(주관심)는 수많은 것을 보지만, 봄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실현(참나를 아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자아실현이란 자신의 궁극적인 주체(참나; 아트마)를 자신의 얼, 즉 자신의 순수의식(얼)의 능력으로써 보아서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쉬바는 말한다. 진정한 앎이란 자신의 참나를 아는 것, 즉 주체적 부분을 아는 것이라고. 이 물질계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철학이 있다. 그런데 물질이 모든 것이라면, 물질이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린다. 그 결과로 인간의 존재, 인간의 순수의식(얼), 인간 마음의 주체적 부분 등 모두가 흙이나 돌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 같은 철학은 인간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존경 받아온 칼 마르크스가 그런 잘못된 철학을 퍼뜨렸다. 반-인간적인, 도덕적으로 반-인간적인 그와 같은 잘못된 철학의 속박과 족쇄로부터 그대들의 마음을 해방시켜야만 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와 발전에 큰 해악이 되는 것이다. 결코 이 점을 잊지 말아라.
자, 돌아가서...시바가 말한 참나를 안다는 것은 마음의 주체적 부분[주관심; 마핫과 아함]이 순수의식(얼, 자성)으로 변환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만이 올바른 앎(자아실현)이고 소위 다른 앎들이란 별 소용이 없는 것이다.
A’tmajina’na’m vidurjina’nam
[나(I)의 여러가지 정의들]
☆ 되어진 나(Done-I): 칫따(Citta); 객관심(상념들)
☆ 행위주체인 나(Doer-I): 아함(Aham).
☆ 아함의 행위를 관조하는 나(또는 존재의 나):마핫(Existential-I , Wittnessing-I).
* 아함+ 마핫= 주관심
☆ 마핫을 아는 나: 아트만(참나;Atma)
그대들은 과학을 배우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림자에는 두 부분, 즉 아주 어두운 부분과 그 주변의 덜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시바 신은 그 어두운 부분과 덜 어두운 부분 모두는 앎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객관적인 지식, 소위 객관적인 대상의 내면화를 의미하는 앎(지식)이란 사실은 앎(지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둘은 단지 그림자의 어두운 부분과 덜 어두운 부분에 불과하다. 그 두 부분을 본다고 해서 실재로 존재하는 대상물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리치(lichee)라는 과일나무와 구아바(guava) 라는 과일나무의 그림자만을 보고서는 어떤 것이 리치나무이며 어느 것이 구아바나무 인지를 모른다. 직접 나무들을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영적인 과학을 준 시바는 그렇게 답하였다.
빠르바띠가 시바에게 물은 질문은,
“오 신이시여,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이 성지입니다. 저 곳은 성지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수많은 성지를 찾아서 온 세상을 헤매고 다닙니다. 무엇이 올바른 방법입니까?” 라는 것이다.
시바의 답은,
Idam’ Tiirtham’idam’ Bhramanti Ta’masajana’h
A’tmatiirtham’ na Ja’nanti Kat’ham’ Moks’o Vara’na’ne.
“오, 안됐도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헤매고 다니지만, 가장 성스러운 성지가 바로 자신들의 존재감[존재적 나인 마핫] 속에 있음을 모르는구나. 성지를 찾아서 다른 곳을 다닐 필요가 없다.”
조금 전에 내가 그대들에게 말했다. 물질적 지식(앎), 즉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이란, 외부세계의 주관화(내면화)의 과정을 거쳐서 얻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참앎이란, 시바의 설명에 의하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주관심[마핫]이 순수의식, 즉 아트마(A’tma)라는 지고의 앎의 주체로 변환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궁극의 목표인 지고의 아트마[Paramatma]는 그대의 “나”의 느낌[존재의 나; 마핫]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바로 그 “내가 존재한다(마핫)”는 느낌을 지니고 있다. 이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이 창조된 세계의 가장 궁극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 바로 창조된 우주의 궁극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존재의 나” 속(배후)에 그 지고의 순수의식(Supreme Consciousness; Parama’tma)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이 “존재의 나” 가 가장 궁극적인, 나아가서 유일한 “성지(Tiirtha)”인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 영적 구도자들이다. 그러므로 결코 정묘함에서 거침으로 나아가서는 안되며, 거침에서 정묘함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이 거친 세계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그대의 존재함은 바로 이 거친 세계에 의해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 거친 세계에 대해서도 적절한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만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주관적인 접근(지고의 순수의식의 지향)속에서 객관적인 조정(물질/정신 세계에 대한 적응)을 하는 태도로서 살아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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