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스카라(업식)에 대하여
대체 삼스카라(업식)이란 무엇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적 전통이 강하므로 업장이나 인과라든가 윤회의 개념에 꽤 익숙하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도 ‘뭔 업장이 이리 두터워서 이 고생을 하는가?“라든가 “인과응보”라는 말을 곧잘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이 무언가 모호해서 나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바바의 철학을 접하면서 업식이라는 말에 보다 명료한 이해를 갖게 되었다.
아난다 수트람에서는 대충 3가지 삼스카라가 있다고 한다.
타고 난 것(Inborn)- 유전이나 전생, 본능 등
주입된 것(imposed)- 환경적 조건 등
습득된 것(acquired)- 교육 등
그런데 삼스카라를 미쳐 채우지 못한 욕구(Umfufilled Desire)라고도 했다. 그 말은 당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충 이해가 된다.
그 말의 뜻은 타고난 습성의 욕구에다 주입된 것, 습득된 것들에 의한 조건에 의해 새로운 욕구 즉 정신적 업습이 생기고 그 욕구는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모든 욕구에너지는 작용 반작용이라는 인과를 낳게 된다.
말하자면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오게 되어있고
어떤 힘이나 가는 만큼 되돌아오게 되어있다.
물질 세상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이 그렇듯 모든 것이 변해갈 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은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할른지 모른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마음도 파동 형태의 아주 미세한 일종의 물질이고 욕구하는 마음은 행위에 의해 물질화가 된다.
인간은 오감에 의해 발생하는 오온을 통해 욕구를 해소하거나 새로 일으킨다.
미쳐 채우지 못한, 지속적인 욕구(삼스까라)는 업식의 씨가 되어
현생이든 내생이든 경험하게 된다.
경험은 다시 애착과 두려움을 낳고 작용과 반작용을 겪게 된다.
이것이 삼사라 세상의 영원한 사슬인 것이다.
바바는 이 사슬을 끊어내는 것은 ’내가 행위한다‘는
개체로서의 에고를 놓을 때만 가능하므로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간주하는 철저한 헌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가 혹 삼스카라와 비슷한 개념이지 않을까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예수님이 씻을 수 없는 원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구원을 했다는 말은 믿음, 신앙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에고로서의 나가 소멸되므로 인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가 아닐까?
바바는 모든 만물간의 차이는 오직 삼스카라의 차이뿐이라고 하셨다.
언젠가 그 예를 보여 주었다.
두 명의 다다가 떨어져서 앉아 있었다.
바바는 각각의 다다에게서 삼스카라를 빼내었다.
그러자 두 다다는 서로의 몸이 붙어 버리게 되었다.
다시 바바는 두 다다에게 한 다다에게는 수치심을, 다른 다다에게는 노여움을 넣어주었다.
그러자 두 다다는 저절로 몸이 떨어지고 멀어지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는 오직 업식이 다를 뿐 모두 하나이고 신성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원수도 사랑하라”하셨다
이는 이 세상 만물은 원수도 귀천도 없다는 말씀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사랑이다.
바바남 께발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