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많은 나도 나이 드니 새벽에 일찍 잠이 깬다.
판차자야랑, 키르탄, 명상을 하려하니
무릎도 약간 쑤시고 몸이 찌부듯하여 도시 일어나기 싫다.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서 뒹굴뒹굴, 잡념이라는 허깨비만 날린다.
요새 살아온 일은 죄다 잘못된 것 같고 무상하고 살아 갈 일은 그다지 많이 남지 않다는 생각에 그냥 답답하고 막막하다.
무엇보다도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만 믿으면 되고 불교도들은 ’모든 것이 내 마음뿐, 너 자신(참나)을 등불로 삼아라.‘라는 부처님 말씀만 따르면 되는데 나는 오래 따르고 있다는 스승조차 시큰둥하다.
한 가지 가르침만을 무조건 따르기에는 자의식이 너무 강하고 시건방지다.
그렇다고 세상일에 열심히 몰두해 있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아, 죽음은 코 앞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에라 모르겠다
매화가 피어있는 옆산에 산책을 갔다.
어제 아침에 이어 오늘 아침도
물안개인지 안개인지 잔뜩 끼여 사물이 거의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활짝 핀 매화꽃도. 편백나무도
흐릿하고 사방이 희뿌연하다.
신비인지 모호함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마치 막 사물이 태어나는 듯한, 태초와 같은 신비스러움에 탄성을 한다.
이렇게 희뿌연하고 아련한 안개 속에서 막 태어난 아기같은 아주 작은 연초록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 놀라웠다!
우리는 왜 이렇게 새로움에 환호할까?
익숙함, 과거, 알고 있음, 경험은 안전하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고 있으려고 한다.
나이가 많아지면 점점 더 ’늘 해 왔던 것‘이 아니면 불안하다.
알 수 없는 것들은 불안하다.
우리의 에고는 늘 두려워하고 불안하다.
에고는 ’알고 있어야‘ 하고 알려고 노력하는 자아이다.
잘 알아야만 자신이 콘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믿음과는 반대로 늘 변하고 무상한 이 세상에서 영원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에고는 그래서 늘 좌절하고 불안하다.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까?
죽음이라는 존재의 소멸이야말로 ’알 수 없음‘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주님의 특성은 새로움, 알 수 없음, 영원한 현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주님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하셨다.
부처님은 ’무아‘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림자이고 허상임을 깨닫게 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가 개념일 뿐
오늘 아침, 짙은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만나는 매화꽃과 아주 작은 싹은 개념이 아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환희에 차서 집으로 돌아왔다.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프라밧 상키타를 들으면서
의미나 개념이 부질없다.
애초에 그렇게 이상해서 듣기 싫어하던, 그러나 점차 좋아지던 인도의 노래,
키르탄도 요새는 인도 키르탄에 끌려서 에전에 즐겨부르던 서양식의 키르탄은 시들해졌다.
왜 스승은 영성을 ’known’에서 ‘unknown’으로 향해가는 길이라고 하셨을까?
말은 개념과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림은 형상을 갖고 있다.
노래는 형상이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소리를 이용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소리마저 넘어가면 침묵, 현존, 고요함. 알 수 없음이다.
마치 침묵이라는 바탕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고
텅빈 공간에 없으면 사물이 존재할 수 없듯이
색깔의 세상, 현상계는 무수한 분별이 존재하지만
우리의 본질은 바로 알 수 없음, 영원한 현존이다.
스승께서는 천천히,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알 수 없음’으로 인도하신다.
개념과 의미, idealogy로
보이는 형상의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가장 정묘한 만트라와 춤, 리듬으로,
마지막 의미인 사랑으로
그리고 침묵인 명상으로
오직 Unkonwn, 알 수 없음만이 우리의 진정한 본향, 진정한 안도, 평안이다.
죽음인들, 삶인들 두려워할 것이 없다.
우리는 누구나 가장 편안한 곳, ‘알 수 없음, 모름’으로 인도되어질 터이니까.
첫댓글 참 아름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