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언어밖에는 없다.
사랑의 언어와 분리의 언어
이 지구상의 생명체라는 가족은 전부 다르다.
지구에 있는 70억의 인간도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모습과 성, 서로 다른 성향, 서로 다른 세대, 서로 다른 이념, 서로 다른 환경과 지역, 서로 다른 집단 등 같은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보면 70억의 인구는 누구도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모두 다른 생각을 지닌 우리는 모습이 분리된 만큼이나 언어도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분리되어 보이는 70억의 사람들이 절대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모순 속에 있는 지구인 공통의 운명이다.
이곳에서 생존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이가 가진 것을 빼앗든지 아니면 같이 공유해야만 한다.
지금까지는 약육강식을 기본으로 하는 동물성에서 진화한 인간인 우리는 주로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이들의 몫을 빼앗는 방법이 사용되어서 거대한 불평등과 고통을 초래했다.
그래서 힘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다.
이 고통을 넘어가는 방법은 서로에게 공감하고 물질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각자의 조건과 인연의 차이에 따른 기억에 근거하는 생각과 말이 완전히 달라서 서로에게 공감할 수가 없다. 유일하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그 집단에게 이익이 공유될 때뿐이다.
이익이나 손실과 상관없이 공유하는 방법이 아닌 언어는 바로 사랑이라는 언어이다.
영화 ‘미나리’는 바로 그 언어를 제시하고 있다.
그 영화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생각과 성향, 욕망이 각자 다 다르다.
그래서 모두 각자만의 언어를 갖게 되어 종종 충돌하게 된다.
그 가족 구성원은 한국인으로서 미국인으로 뿌리내리고자 분투하는 과정에서 각자만의 언어로 충돌한다. 특히 그 구성원으로 들어온 할머니는 정말 자신 만의 언어를 갖고 있어 막내 아들과 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에피소드와 함께 충돌과 순수한 유유머가 등장한다.
싸운다는 것은 상대방 언어를 배우는 행위의 일종이지 않을까?
세련된 이들은 겉으로 싸우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싸운다.
이런 식으로 싸우거나 드러내 놓고 싸우거나 우리는 모두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이 어려워서 괴로움을 겪는다.
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다른 말을 사용하면서도 소통에 상관없이 충돌하지 않은 할머니가 있다.
그 할머니에게는 오직 사랑의 언어밖에 없으므로 어떤 조건도 상관이 없다.
그 가족은 할머니를 중심으로 하여 싸우면서, 때로는 이해하면서 가족의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끈질긴 생명력, 미나리처럼 나아간다.
나도 삶을 돌이켜보면 서로의 언어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해 필요없는 고통을 겪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나 부모님, 자식들과 이웃과 갈등을 겪어가며 싸웠던 것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
남편이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간혹 “러시아어 하느냐?”면서 의아해 하던 생각이 난다. 나도 또한 그의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때가 참 많이 있었고 그래서 많이 싸웠었다.
더 나아가서 지구라는 공동체 가족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본질인 사랑에서 나왔기 때문에 싸우거나 안 싸우거나 사랑의 언어를 쓸 수 밖에는 없다.
단지 생존에 따른 두려움이라는 잠에 빠져 본질인 사랑을 망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진화는 모두 상대방의 언어를 알아가고 ‘모두가 하나이자 사랑(바바남 께발람)’이라는 본질로 나아가는 여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