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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하느님은 살육을 즐기시는 분인가?
이 글은 제가 참여했던 예수동아리교회 카페에서, 한 벗님이 외부 자료를 인용하며 그에 대한 저의 견해를 듣고 싶다고 요청한 질문에 대한 답글입니다. 벗님이 올린 글의 원문은 파란 글씨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산들님께 질문이 있습니다.
★ 젖먹는 어린 아기까지 무참히 도륙하는 야훼!
'지금 가서 아말렉 족속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와 젖먹는 간난 아이와 소와 양과 약대와 나귀를 남김없이 쳐 죽이라 하셨나이다.' (사무엘상 15장 3)
★ 임산부의 배도 칼로 갈라 쳐 죽이는 야훼 (5.18 광주는 저리가라?)!
'하사엘이 가로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너는 가서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어쳐 죽이며 아이 밴 부녀자의 배를 칼로 갈라 죽이리라. 하사엘이 가로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 큼찍한 일을 행하오리이까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열왕기하 8장 12-13절)
★.사마리아 사람들을 배반자라며 임산부 배도 갈라 죽이다.
'사마리아가 그 유대신을 배반하였으므로 여호와께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죽을 것이다. 그 어린 아이는 뼈가 부숴뜨리워 죽이고 그 아이 밴 여인은 배를 칼로 갈리어 죽으리라.' (호세아 13장16절)
아무런 죄가 없는 갓난 아이 그리고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도 죽이는 구약의 하느님은 신약의 하느님(예수)과 같은 하느님입니까?, 다른 하느님 입니까?
아니면 위의 구절들은 다 성경에 있지만 쓰레기로 치부해야 하는 구절로 보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 산들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1. 구약의 하느님 야훼는 젖먹이 아이까지 무참히 죽이는 잔인한 신인가?
위 성서구절의 인용자는 사무엘상 15장 3절을 가져오면서 '젖먹는 어린 아기까지 무참히 도륙하는 야훼!'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 내용을 다시 함께 보겠습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 족속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와 젖먹는 간난 아이와 소와 양과 약대와 나귀를 남김없이 쳐 죽이라 하셨나이다."
이 구절은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을 책망하는 내용의 일부로 성서에 등장합니다. 훌륭한 선지자로 알려진 사무엘의 말이라고는, 또한 신의 계시에 의한 전달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잔인성이 담긴 구절임에 틀림없습니다.
정말로 하느님이 이런 명령을 하셨다면 우리는 이런 신을 믿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를 읽을 때 우리가 미리 알고 있어야 할 매우 중요한 전이해(pre-understanding)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성서에 등장하는 신은 '절대 객관의 신'이 아니라 '그 때 거기에서 살던 사람들이 인식한 신'이라는 점
2) 성서의 언어는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고백의 언어'라는 점
3) 사건(또는 사건으로 기록된 이야기)과 기록 사이에는 수백 년의 간격이 있다는 점
구약성서에는 신이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 신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식한 신'이지 '기록된 그대로 실재하는 신'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약소국으로서 생존을 위해 주변 민족과 크고 작은 전쟁을 늘 겪으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삼천 년 전이라는 시대적인 한계, 또한 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이 인식한 신은 자기 민족을 지켜주는 신, 원수를 물리쳐주는 수호신의 범주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구약의 하느님 야훼는 임산부의 배를 칼로 갈라 죽이는 신인가? [1]
인용자는 여기서도 열왕기하 8장 12-13절을 인용하면서 '임산부의 배도 칼로 갈라 쳐 죽이는 야훼 (5.18 광주는 저리가라?)!'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인용한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하사엘이 가로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너는 가서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어쳐 죽이며 아이 밴 부녀자의 배를 칼로 갈라 죽이리라. 하사엘이 가로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 끔찍한 일을 행하오리이까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인용자는 위의 구절을 이스라엘의 신 야훼가 시리아의 장군이며 후에 왕이 되는 하사엘을 시켜 잔인무도한 일을 저지르겠다는 내용으로 읽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윗글은 선지자 엘리사가 하사엘이 저지를 일을 미리 내다보며 예언한 말로 기록된 구절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기록은 고백의 언어라는 점과, 사건(또는 사건으로 기록된 이야기)과 기록 사이에는 수백 년의 간격이 있다는 점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윗글은 시리아 왕 하사엘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략하면서 저지른 일을 직접 목도한 후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부녀자의 배를 가른 책임은 야훼가 아니라 시리아의 왕에게 있습니다.
어쩌면 인용자는 하사엘이 '내 주여'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하사엘이 야훼와 대담하는 것으로, 또한 야훼가 하사엘에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구약성서에는 야훼가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고백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주'라는 단어는 하느님께만 쓰는 단어가 아니라 자신보다 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쓰는 용어로 오늘날의 '선생님' 정도로 쉽게 쓰는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윗글의 인용자는 구약성서의 신 야훼가 실재하는 신이 아니라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이 인식한 '만들어진 신'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실재하는 신인 것처럼 직접적으로 '야훼'를 공격하는 이유는 교리기독교의 무지와 오만과 독선에 같은 방식으로 맞서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되며,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위의 구절을 근거로 '구약의 하느님은 임신부의 배도 갈라 죽이는 잔인한 신'이라고 단정 지은 것은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발생한 잘못된 결론입니다.
3. 구약의 하느님 야훼는 임산부의 배를 칼로 갈라 죽이는 신인가? [2]
인용자는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배반자라며 임산부 배도 갈라 죽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호세아 13장 16절을 인용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사마리아가 그 유대신을 배반하였으므로 여호와께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죽을 것이다. 그 어린 아이는 뼈가 부숴뜨리워 죽이고 그 아이 밴 여인은 배를 칼로 갈리어 죽으리라.'
이제는 이 구절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감을 잡으셨을 줄 압니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서기전 10세기부터 8세기까지(정확하게는 서기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하기까지) 약 200년 동안 남과 북이 분리된 '분단국가'로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남과 북으로 갈려진 그들도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정상회담을 통해 평화의 시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치르게 되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피눈물을 흘리며 가족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은 용서할 수 없는 원수이고 악마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전쟁을 직접 겪은 남과 북의 세대가 보이는 모습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훗날 남왕국 유다는 살아남았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남은 유대백성들은 한편으로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쌓여진 한과 노여움을, 또 한편으로는 동족이 없어진 데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여러 각도로 해석했고, 당시 그들의 세계관과 종교관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잘못했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점령당하면서 발생한 일을 야훼의 주권적인 행위로 이해했습니다. 포로기 이후 하느님의 사람들이 이해한 야훼는 전 세계를 창조하신 하느님, 또한 인류 역사 전체를 섭리하는 신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해가 결국 하느님을 잔인무도한 신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은 신의 전능성과 섭리,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받게 될 '복'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글을 마치며] 당신의 인식 안에 갇힌 하느님과 예수를 죽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살던 팔레스틴 지방은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3개 대륙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하기에 이집트와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 등 주변 강대국의 끊임없는 침탈에 시달렸고 아시리아 제국의 군대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포위되었을 때는 극한 기아를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잡아먹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발생된 비극이었으며, 현대 시대에도 비행기 추락으로 눈 속에 고립된 사람들이 숨진 사람의 고기를 먹고 생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는 전쟁의 공포와 비극이 없이 살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위협이 되는 상대 민족이 없어져야만 가능합니다. 평화조약을 맺어도 언제 그들의 마음과 상황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의 공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얻으려면 상대 민족의 갓난아이까지 없어져야 합니다. 그들이 자라면 전사가 되어 불과 20-30년 만에 다시 칼과 창을 들고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수호신을 '갓난아이까지 죽이라고 명령하는 신'으로 인식하고 기록한 고대인들의 신관을 마치 실재하는 신의 책임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도 무리이며, 그런 소망(?)을 자신들의 신관에 반영한 이스라엘 민족을 단순히 '이유 없이 이웃을 해치고 싶어하는 무모하고 잔인한 백성'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이삼천 년 전의 그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이스라엘과 갈등 관계에 있는 모든 족속을 죽이라는 잔인한 명령이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병균의 존재와 전염성에 대해 알지 못했던 고대인들이 교류가 없던 이방인과 섞이면서 양쪽 모두 전멸하거나 수많은 생명을 잃는 비극을 종종 겪었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알 수 없는데 끔찍한 비극이 발생하게 되니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대처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랜 경험으로 자기 종족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상대 민족의 모든 흔적을 불태우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런 경험적인 결론은 근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침입자가 정복된 민족을 멸절하는 비극으로 인류 역사에 종종 나타났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하느님을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생각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신의 백성을 지켜주기 위해 주변의 위협자 뿐 아니라 위험의 요소까지 완전히 없애주시는 분으로 자기 민족의 신 야훼를 인식했고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배계층은 그런 원시적인 신 인식에 의해 실제로 있었던 일을 객관적인 시각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고백의 언어로 기록하기도 하였고,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은 일을 장차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희망을 담은 고백적 기록이 후에 성서라는 책으로 모아져 전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지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민족의 기록이 오늘날 발견된다면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요? 아마도 이스라엘의 멸망을 염원하는 잔인한 내용이 똑같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기록은 남았고 상대방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의 성서를 읽는 사람은, 성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탄생된 책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서를 읽을 때는 TEXT에만 매달려 읽지 말고 CONTEXT(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공간적 상황)와 함께 읽어야 하며,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고, 저자가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가 무엇인지도 함께 알고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TEXT 뿐 아니라 CONTEXT 까지 연구하고 소개하기 위해, 그래서 성서의 뜻을 바르게 알게 하기 위해서 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결코 오류가 없는 완벽한 책이 아니며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나운 글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리기독교인들은 이런 (성서에 대한) 열린 연구과정 자체를 불손한 것으로 여기며 성서 자체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여 수많은 문제를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제가 교리기독교는 소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글을 읽어주신 벗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가 인식한 하느님이며 우리가 믿거나 따르는 예수 역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예수일 뿐 절대 객관의 신, 절대 객관의 예수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예수에 대한 수만 가지 저마다의 해석이 난무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우리의 이웃이며 길벗인 불자님들은 '살부살조' 즉 "깨달음에 방해가 되거든 부처도 죽이고 선사도 죽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자유로움을 기독교인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매이지 마십시오. 그분들이 여러분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그들을 떠나셔도 좋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매여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들을 벗님들의 머리에서 죽이는 것이 낫습니다. "당신의 인식 안에 갇힌 하느님과 예수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사회에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는 신이라면, 그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식한 신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우상이며 괴물일 뿐입니다.
* 2010년 2월 25일 작성.
* 2011년 6월 8일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