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1. 기독교의 무례, 예수로부터 온 것인가?
"기독교인이 안하무인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동물원을 탈출한 맹수가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이웃종교를 무시하고 적대하라고 가르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인류의 사대 성현 중 한 분이라는 예수님이 정말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도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얼마 전 불자님들의 모임에서 '종교간 이해와 대화'를 주제로 강의한 후에 받은 질문이다. 얼굴이 화끈거려 답변하기 전에 죄송하다고 사과부터 했다. 이 질문은 아마도 많은 불자님들과 이웃종교인들, 또한 상식과 합리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는 사회인들이 함께 묻고 싶은 질문이 아니었을까?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가 배타와 독선에 빠져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이웃종교와 문화를 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화계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찰에 대한 방화사건과 훼불사건, 지금은 대통령이 된 전 서울시장의 서울시 성시화 발언, 전 울산시장의 성시화 발언, 이웃종교를 모두 사탄의 종교라며 날을 세우는 길거리 전도자들, 수십만 생명을 앗아간 쓰나미 사건 등의 자연재해조차도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거리낌 없이 설교하는 목사들, 심지어 스님들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 목사 등 기독교인들이 저지르는 무지와 무례의 실례를 들자면 끝도 한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기독교의 독선과 무례에 대해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불자님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만일 그토록 무지한 사상이, 또한 그로 말미암는 무례한 행동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나는 진작 예수를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무지하고 독선적인 분이 아니며, 이웃종교와 문화를 배타하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다. 안타깝게도 독선과 배타로 무장한 우리나라의 주류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를 배반한 종교다.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현대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예수는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 편에 서서 기득권자의 폭력에 대항한 개혁자였다. 당시 유대인이 인식한 신은 자기 종족만 사랑하고 이방인은 미워하는 신이었지만 예수는 그런 배타적 신관을 거부했다. 그가 인식한 신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햇빛과 단비를 내려주시는 하늘 아버지'였다.
예수는 '원수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약의 가르침도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으로 승화시켜 다시 가르쳐주셨다. 예수 이전의 선인과 악인, 원수와 이웃이 예수에 의해 하늘 아버지의 한 가족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들이 절대신념으로 받들고 있는 배타적 교리와는 너무도 다르며, 이런 이유로 나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들을 향해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2. 늙고 병든 로마제국, 기독교와 손을 잡다
그렇다면 세계종교인 기독교가 왜 이렇게 스승의 가르침과는 반대방향으로 가게 되었을까? 사대성인으로 추앙받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쩌다 그렇게 배타와 독선에 싸인 교리로 탈바꿈하게 된 것일까?
서기 4세기 초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늙고 병든 제국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기독교를 동반자로 선택했다. 제국의 정신적 구심점을 새로이 세우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와 사상을 아우르는 절대신념체계가 필요했는데, 마침 그때 지난 200여 년에 걸친 정책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신념으로 버텨낸 유일신 종교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제국의 동반자로 선택한 중요한 이유는, 예수가 "카이사르(로마 황제)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말함으로써 로마제국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사실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타협을 시도한 당시 교회가 예수의 입을 빌어서 한 말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예수를 중심으로 모인 기독교회조차 하나의 신념으로 통일되지는 않았다. 예수는 유일신의 유일한 아들로 고백되기도 했지만, 단순히 인류의 영적 스승 중 한 분으로, 또는 기득권에 저항하는 혁명가로 인식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에게 필요한 것은 '유일신의 유일한 아들'로서의 예수였다. 그래야만 예수의 가르침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신의 절대계명이 될 수 있었고,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바치라는 신의 명령을 중심으로 제국을 하나로 규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자로 추앙받고 있지만 로마 황제이며 이교도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선택에 의해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의 친구'였던 예수는 '신의 아들'의 지위를 넘어 급기야 '신 자체'로, 또한 인류에게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로 선포되었다. 이리하여 모든 이웃을 신의 자녀로 품은 예수의 너그러운 사상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배타적 교리로 바뀐 채 중세 천년을 지나 한반도에까지 유입되었다. (예수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신이 되는 과정을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제가 지은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3. 한국 교회의 깊은 자성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기독교인 중에는 일반 사회생활에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상식에 따라 살아가는데, 종교문제로 들어가면 너무나 배타적이고 독선적으로 돌변하는 사람들이 많다. 쉽게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통해 왜곡된 역사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하지만 이런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기독교는 한반도를 넘어서면 더 이상 기독교의 주류가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은 이런 배타적 기독교의 모습을 극복한지 오래다. 오히려 이웃종교를 존중하여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 스님 등을 초빙하여 강의를 듣는 등 매우 열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은 여전히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들도 이런 시대의 흐름을 끝까지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21세기에도 살아남으려면 자신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아집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하며, 무엇보다 이웃종교에 적을 두고 그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종교인을 기독교인으로 개심시키려는 무모한 선교정책을 당장 중지해야 한다.
만일 한국 교회가 지금과 같은 무모한 공격적 선교를 계속한다면 우리 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여 제어하기 어려운 갈등을 겪게 될 수도 있고 한반도에 종교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한국 개신교가 독선과 배타에서 벗어나 이웃종교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함께 길을 걷는 길벗으로 존중하며 상호 교류와 대화를 통해 서로 영성을 배우고 나누는 바른 종교로 거듭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국 교회의 깊은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 불교여성개발원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 2010년 9월 30일 작성.
* 2011년 6월 8일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