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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정신과 공동선
- 공동선 100호 출간을 축하드리며 -
공동선 100호 출간을 축하드리며, 저의 지난 세월을 잠시 돌아보고 싶습니다. 개신교 입문, 한국 교회에 대한 절망, 목사직 반납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제 인생 여정을 소개하는 것이 저와 비슷한 고민과 갈등을 겪는 독자님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 개신교 입문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저는 기독교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에는 별 거부감이 없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흔히 '예수 천국 불신 지옥'으로 요약되는 기독교의 주장이 제 눈에는 흑백논리와 독선에 사로잡힌 무지하고 사나운 논리로 보였고, 신에 대한 맹종을 강요하는 기독교는 반인륜적 종교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한 따뜻한 사람들을 만난 덕이었습니다.
대학 2년을 마친 겨울 어느 날, 저는 학교 내 기독학생동아리에서 마련한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곳의 분위기는 저에게 개신교에 대한 거부감을 더욱 키워놓았습니다. 몽환상태에 빠진 듯 부르는 찬송, 고함을 지르며 울부짖는 통성기도, 강사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집회의 모습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도 참기도 어려운 낯선 문화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곳을 뛰쳐나가지 못한 이유는 친절을 베풀어준 한 친구 때문이었습니다. 수련회가 마쳐질 때까지만 참고 참석해 달라고 저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너무나 친절하고 진정성이 담긴 그 친구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수련회 두번째 날 저녁 집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학생이 자기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힘겹게 살아온 지난날들과 하느님께서 지켜주셨던 순간들에 대해 말하고는, 앞으로도 하느님께서 변함없이 자신의 삶을 인도해 주시도록, 또한 자신이 늘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참석한 학생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꾸밈이 없어 보였고, 그의 얘기를 통해 드러난 것은 저라면 도저히 자존심 상해서 할 수 없는 자기의 온갖 약점과 비천한 환경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벌어진 장면은 제가 지금껏 쌓아왔던 세계를 온통 허무는 것들이었습니다.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법인데, 그래서 자기 약점을 노출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데, 그리고 약점을 간파당한 사람은 도태되거나 놀림감이 되는 세상인데, 여기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학생들 모두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자기 일처럼 간절히 그를 위해 울며 기도했습니다.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저도 그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만약 당신이 존재한다면 저 사람들의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셔야 합니다."
눈물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지난날의 제 모습이 온통 벌거벗겨지는 듯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이기심과 열등감이 뒤범벅된 채 살아온 나날들, 세상을 온통 의심투성이로 보며, 아무도 믿지 못하고 살아온 고독한 나날들이 떠올랐습니다. 밟히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쌓아온 제 자신의 오만과 착각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삶이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도 이들처럼 살 수 없을까? 하느님이 있건 없건 나도 이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 이런 생각에 휩싸인 저는 울며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이제 제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날짜와 시간까지 잊을 수 없는 그날, 1978년 2월 22일 새벽 2시경, 저는 하느님을 그렇게 만났습니다.
2. 한국 교회에 대한 절망
하느님과의 달콤한 데이트와 그로 인한 행복은 석 달 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인생이 신나고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기독동아리에서 배우는 개신교 교리와 학과에서 배우는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간격이 커서 당시의 저로서는 조합할 수 없는 갈등이었고 혼란이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비웃고 넘겼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모토가 일부 독선적 신앙을 가진 일부 개신교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교리의 중심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미 개신교 신앙에 투항(?)한 저에게는 함부로 부정할 수도 논리적으로 극복할 수도 없는 버거운 숙제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철학을 전공한 제가 <종교철학> <인도철학> 등의 과목을 통해 배우는 이웃종교는 개신교 교리를 뛰어넘는 따뜻한 인류애를 담고 있었습니다.
개신교 신앙에 대한 혼란과 갈등은 신학대학원에 진학해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풀기 위해 저는 졸업논문을 <기독교와 불교의 구원관에 대한 비교 연구>로 정하고 한동안 불교와 비교종교학 문헌 탐독에 몰입했지만 혼란과 갈등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하면서도 계속된 혼란은 1995년 경, 그러니까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지 10년 정도 지나 멈춘 것 같습니다. 흐르는 강물이 자연스레 바다에 이르듯, 긴 혼란과 갈등 끝에 제가 도달한 지점은 한국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다원주의 신앙이었습니다. 다원주의란, 배타적 교리에 기반을 둔 기독교의 절대성을 포기하고, 진리를 갈구하는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기독교를 인식하며, 다른 이웃종교들에 대해서는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길벗'으로 받아들이는 '거듭난 기독교사상'이었지만, 이천 년 동안 정통으로 군림하는 교리기독교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배타적 근본주의 신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교회의 풍토에서는 위험한 이단사상으로 금기시 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원주의자로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정직하게 다원주의 신앙을 밝히는 것은 스스로 목사 일을 접거나 개신교단에서 축출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반면에 제 정체성을 숨기고 목사 일을 계속하는 것은 양심을 속이는 일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정된 직업을 계속 가질 수 있었고 또한 암흑에 빠진 한국 개신교를 쇄신하는 데 기여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부끄럽게도 제 정체성을 속이고 목사 일을 계속하기로 하였습니다.
신앙의 정체성으로 인한 갈등과 혼란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양심의 고통과 갈등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습니다. 개신교 입문 초기에 느꼈던 마음의 평안도 어느덧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청년 시절에 만났던 따뜻하고 아름다운 예수의 종교를 독선과 배타에 쌓인 교리기독교로 변질시킨 현실기독교와 그 조직에 대한 배신감이 참기 어려운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3. 강의석 사건과 공동선과의 만남
강의석 사건이 터진 건 2004년 6월 16일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약 10년의 기간을 저는 위선자로 살았습니다. 다원주의 신앙을 감춘 채 한국 교회의 변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도를 눈치 챈 학교 운영자들과 갈등이 빚어졌고, 강의석군 사건이 터지자 저는 더 이상 정체성을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항간에 제가 강의석군을 사주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강의석군 사건을 계기로 저는 학교를 떠나 다원주의 신앙을 당당히 밝힐 수 있게 되었고,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냥 '기독교개혁운동'이 아니라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기로 한 이유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배반한 것임을 기독교인들이 깨닫지 못하면, 기독교는 끊임없이 인류 사회에 갈등을 부르는 사납고 무례한 종교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사회의 존경을 받는 아름다운 종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도나 윤리개혁만으로는 부족하며 독선적인 교리 자체를 개혁해야 하는데,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의식이 보편적으로 깨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깨우는 일에 남은 생을 집중하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목사의 길을 접은 저에게 맡겨주신 새로운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남아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갑자기 직장을 잃었지만 저는 여전히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었습니다. 또한 조직에 갇히지 않고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도 경제적 자립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장사를 배우기로 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둘 때 받은 퇴직금이 있었지만 당분간은 그 돈을 쓰지 않고 지키기로 했습니다. 먼저 장사하는 법을 배우고 나중에 그 돈으로 조그만 구멍가게나 국수집이라도 차리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기투자금이 별로 들지 않는 노점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아울러 저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꼈습니다. 그 옛날 예수님께서 찾아가셨던 가난하고 억눌리고 힘없는 이웃들의 삶의 자리를 경험해볼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노점은 그런 저에게 일석이조였습니다. 인터넷을 뒤지며 정보를 얻었습니다. 노점카페에도 가입하고 정모에도 참석하여 조언을 구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명동 등지의 노점을 답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몇 달 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쳐 악세사리 노점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공동선을 처음 만난 건 바로 그 때였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공동선 기자가 현장을 찾아왔지만 노점을 펴지 못한 채 제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내용이 공동선 2005년 7+8월호에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그 인연으로 저는 공동선의 지면을 통해 현실기독교의 문제점과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원형이 어떻게 다르며 기독교 신앙의 참다운 가치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동선이 제가 평생의 사명으로 여기는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의 중요한 기반이며 동반자가 된 것입니다.
4. 오직 사람을 위하여
지금 기독교는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 큰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조직 교회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사람이 떠난 교회의 건물은 텅텅 빈 채 문화공간으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런 현상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기독교는 몰락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자리로 스며든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속권력을 쥐었을 때 예수의 가르침은 땅에 떨어졌으며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 품고자 했던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들의 삶의 자리는 더욱 척박해졌습니다. 기독교가 조직교회로 위세를 떨치고 "땅 끝까지 선교하자"고 구호를 외치며 세계로 진출했을 때, 세계는 기독교와 손잡은 서구 세력의 침탈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천여 년 동안 의심 없이 믿어왔던 기독교 교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서구세계가 인식하고 눈을 뜨기 시작하였기에, 이후 기독교신학이 진화하면서 기독교의 중심 가치는 배타적 교리가 아니라 예수께서 전하신 인류애 정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서구세계가 추구하는 자유 평등 박애 등의 가치는 예수의 가르침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조직으로서의 기독교회는 쇠퇴하고 있지만 기독교의 진정한 정신은 서구인들의 삶에 스며들어 그들의 정신과 문화의 중심에 여전히 자리한 채 진화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서구에서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피를 벗고 내면화되어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본 훼퍼 목사는 "예수는 우리에게 새로운 종교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관심은 종교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사람에 있었습니다. 사람을 위하여, 오직 사람을 위하여 예수는 부패한 종교조직과 싸웠고, 민중의 피를 빠는 정치세력과도 싸웠습니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회도 오래된 외피를 벗고 이웃종교와 문화를 존중하고 인류의 미래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열린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앞으로 기독교가 살 길이며 공동선의 가치와도 부합하는 일입니다.
* <공동선> 100호(2011년 9+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2011년 8월 10일 작성.
* 2011년 9월 2일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