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경계인
본문으로 쓸 내용을 대충 정리하고 나자, 제목을 ‘교회로 돌아가다’로 해야 좋을 지 ‘교회로 돌아오다’로 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결국 글을 마치는 시점까지도 정하지 못했기에 양쪽을 모두 제목에 넣기로 했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교회로 돌아가다’라고 하면 교회와 내가 분리된다. 교회와 나는 필연적 관계가 아니라 선택적 관계가 되고, 돌아가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돌아간 것이 된다. 하지만 ‘교회로 돌아오다’라고 하면 교회와 나는 하나가 된다. 교회는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며 그곳을 떠난 순간부터 내가 가야 할 길을 벗어난 것이기에 돌아온 것이 당연한 게 된다. (교회에 대한 신학적 정의가 아니라 나의 현실적이며 정서적인 문제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교회 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와 관련된 일들, 그러니까 설교나 강의도 거의 하지 않을 뿐더러 주일예배도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교회를 떠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교리의 기독교’ 그러니까 배타교리를 절대화하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지만 ‘영성의 기독교’와 ‘운동의 기독교’까지 부정하고 떠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글 제목을 ‘~돌아오다’와 ‘~돌아가다’ 사이에서 여러 번 고쳐 썼다. 어쩔 수 없는 경계인이 된 탓이다.
내가 새롭게 일하게 된 새길공동체 역시 기존교회와는 다른 길(그래서 새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을 걷고자 하는 교회공동체였고, 배타교리가 아닌 따뜻한 예수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내가 그곳의 신학연구원으로 일하게 된 데는 상호간에 이런 인식의 공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2. 잘못된 만남이었을까?
새길교회는 1987년 봄에 한완상, 길희성, 이삼열, 최창락, 이렇게 네 명의 대학 교수가 주축이 되어 결성된 평신도교회다. 새길문화원(정식 명칭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은 새길교회의 산하기관으로 사회와 대화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새길교회 구성원들은 처음부터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고, 건물을 소유하지 않으며, 직업목회자를 초빙하지 않는 평신도교회로 운영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예수의 당부를 따라 기존 교회와는 다른 새길을 걷고자 소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사실 ‘새길’이 아니라 오래 전 예수께서 이미 걸어가셨던 ‘옛길’이었다.)
새길교회와의 인연은 내 친구 서인명(나의 첫 단행본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의 출간을 강력히 권했던 대광중 동료교사)과 신학대학원 시절의 은사였던 종교학자 길희성 박사로 인해 시작되었다.
강의석이 학교의 종교교육 강요에 단식으로 저항할 때 나는 시민단체 학자연(학교종교자유를 위한 시민연합)을 만들어 그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겠다고 결심했고, 새길교회 교인인 서인명 선생과 함께 길희성 박사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길희성 한완상 두 분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었고 새길교회 교우 수십 명이 학자연의 발기인으로 참여해주셨다.
이후 새길 교우들은 내가 학교와 교단을 떠나고 노점을 하는 과정을 애타게 지켜보았고 새길문화원 직원으로 초빙하는 문제를 논의하다 마침내 구체적인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다. 그 손길은 따뜻했지만 부담스럽기도 했다. 현실적으로는 구덩이에 빠진 나를 건져준 고마운 손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선뜻 그 손을 잡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새길공동체에 참여한 시점부터 풀기 어려운 난제를 안고 씨름하게 되었다.
“나는 자신에게 떳떳할 수 없었다.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겠다는 목표는 실패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깨어 있고 자유로운 교회공동체 중 하나였지만,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역시 개신교 교회의 산하기관이었다. 결국 나는 개신교 교회로 돌아왔고 다시 교회 일을 통해 생활비 일부를 벌게 되었다.”
지난 호에서 내가 썼던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새길교회 교인들 중에는 교리나 신학적인 문제보다 목사들의 전횡이 싫어서 (그러니까 의외로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도 적지 않았다) 전에 다녔던 교회를 떠나온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나를 초빙할 때도 목회자가 아니라 신학연구원으로 부른 것이다.
하지만 신학연구라면 나보다 훨씬 뛰어난 학자들이 이미 그곳에 많이 있었다.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쟁쟁한 신학자와 종교학자, 은퇴목사, 심지어 현직에 있는 기관목사까지 교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새길공동체에서 왜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광야로 내쫓긴 사람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기독신앙인으로서의 의무감도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분들이 나를 필요로 한 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3. 평신도교회의 딜레마
평신도공동체인 새길교회는 한 가지 풀기 어려운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직업목회자의 전횡에 지쳐 떠나온 교인들이 다수였지만 그들도 대부분 ‘목회적 돌봄’은 그리워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필요를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있는 분을 찾아가 위로하며 기도해주는 일, 삶에 지친 교우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상담해주는 일, 이런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은 어느 시대 어느 공간을 막론하고 교회가 꼭 해야 할 기본적인 일이다. 새길교회 교우들, 특히 책임을 맡은 지도층은 서로 서로 짐을 나누어지면서 이런 일들을 감당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온전히 감당해내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 있었다. 교우 중에 상을 당했을 때, 3~4일 동안 시간을 내어 장례예식을 전적으로 맡아 담당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각자 자기의 일터가 있었으니까. 전임 직원이 있기는 했지만 예식을 집전할 수 있는 전문 목회자는 아니다.
교회 지도층은 내게 바로 그런 역할들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이라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교단에서 안수를 받아 20년간 사역한 목사, 하지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며 이런저런 전횡을 일삼고 다니는 꼴 보기 싫은 목사가 아니라 제자를 지키기 위해 목사자격증을 반납하고 이제는 야인이 된 사람. 그들에게 나는 목사 아닌 목사, 목사 이상의 목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그러면 왜 나는 그토록 열려있는 교회공동체와도 기꺼이 뜻을 함께 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 얘기를 하려면 오래 전에 겪었던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을 돌아보아야 한다.
4. 하느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에 관여하시는 분일까?
1997년 여름에서 가을, 그러니까 내가 대광중고등학교를 떠나기 7년 전의 일이었다. 학교 교사 중 한 분이 간암 판정을 받은 지 석 달 만에 운명을 달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40대 젊은 교사였고 어린 네 딸의 아버지였다. 나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의 병상을 매주 찾아가 그의 손을 잡고 기도해야했다. 내가 하고 싶은 기도가 아니라 그가 해주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지만 그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어린 딸들을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었던 그는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렸고 내가 방문하는 날을 학수고대했다. 그는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리시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느님이 반드시 낫게 해 주신다는 믿음보다 부르시면 따르겠다는 믿음을 가져달라. 그래야 꼭 해야 할 인생의 마무리를 잘 하고 떠날 수 있다...”
나는 내 신앙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솔직하고 싶다. 내 생각이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지만, 어쨌건 나는 내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움 없이 말하고 행동하고 싶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나는 이미 개인적인 청원기도는 하지 않고 있었다. 예배 때나 공동모임이 있을 때는 모임을 대표하여 기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구성원의 다짐을 결의하는 일종의 서약이었지 우리 삶의 현장에 신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공동기도조차도 하느님을 인격화하여 대화하는 형식을 빌어온다는 점에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기도로 불러내면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여 신앙인의 운명이나 생사를 바꾸기도 하시는 인격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의 하느님은 세상을 그의 법칙대로 운영하시는 분이며, 인격적 존재라기보다는 초인격적이며 궁극적인 실재 또는 질서다. 동양종교에서 말하는 이(理)나 법(法)과 다르지 않다.
이런 생각을 가진 나에게 있어서 “나의 (또는 우리의) 인생에 개입해 달라”고 요청하는 청원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그분(또는 그것)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따르는 ‘순종’이 필요할 뿐이다. (그냥 ‘순리를 따르는 삶’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내 신관과 신앙관을 소개할 수 없었다. 그가 너무 간곡했기에 그저 그의 요청대로 끌려갈 뿐이었다. 그러니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해석하는 인격적인 하느님이 살아계신다 한들 이런 믿음 없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결국 그는 몇 개월 만에 운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그의 주검은 장지로 향하기 전 잠시 학교에 들렀다. 전교생과 교사들이 운동장에 모여 영결식을 가졌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대표기도를 해야 했던 나는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도를 천여 명 학생들 앞에서 통곡하며 쏟아내고 말았다. 그것은 하느님을 교리 속에 가둬놓은 한국 교회에 대한 원망과 교회와 학교의 눈치를 보느라 책임을 다하지 못한 나의 연약한 처신에 대한 회한이고 통곡이었다.
하느님을 인격신으로 믿지 않는 사람, 우주의 원리나 자연법칙처럼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청원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 기도보다는 명상이나 합리적인 사고와 처신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교회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그 옛날 중세 교회는 이런 사람을 만나면 여지없이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기도 했다.
나는 이 문제로 오래 고민해오다 강의석 사건을 만났고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신앙의 자유, 아니 양심의 자유를 택했다. 그것은 (다원주의자인 내 생각에) 기독교 배타교리로부터의 자유였고 정직한 예수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일 년도 못되어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나는 새길문화원에 근무하는 21개월(2005년 8월~2007년 4월) 동안 줄곧 정직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또 다시 기독교 신앙의 문제로 고민해야 했다.
5. 대광중고 선생님들의 후원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남기고 싶은 추억이 있다. 나는 노점을 하는 4개월 동안 헛고생만 했을 뿐 거의 돈을 벌지 못했다. 아내가 가사도우미로 생활비 일부를 벌충했지만 생활비를 감당하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별 어려움 없이 적자를 내지 않고 살림을 꾸려냈다.
새길문화원에서 일하기로 결정된 다음에야 아내는 “3월부터 대광 선생님들이 모아준 후원금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 동안 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내 자존심과 고집을 우려한 선생님들이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기억으로, 선생님들이 모아준 후원금은 2005년 3월부터 새길문화원 일을 하기 직전인 7월까지 왔다. 동참해주신 분들 중에는 내 신앙관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후원에는 참여하고 싶다는 분도 있었다. 그때 참여해주신 선생님들께 이 지면을 빌어 마음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 이 글은 <공동선> 2015년 07+08월호에 실려 있습니다.